도정동정

역사 속의 인물을 영상처럼 살려내는- 이야기 문인화가 심관(心觀) 이형수(李亨守)

역사 속의 인물을 영상처럼 살려내는
이야기 문인화가 심관(心觀) 이형수(李亨守)

 

황홀한 동해 절경과 천혜의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 그곳엔 영덕(盈德)이 있다. 영덕 출신으로 영덕의 자연과 인간을 지독히 사랑하여, 평소 흠모하던 영덕 태생의 역사적 인물들을 살아서 꿈틀대는 붓끝으로 모셔와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생을 맡긴 문인화가가 있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역사 속의 인물들이 걸어 나와 문학과 철학, 인생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활동사진처럼 들려준다. 그렇다. 영덕에 가면 애향심으로 똘똘 뭉친 역사 문인화가 심관(心觀) 이형수(李亨守) 선생이 있다.
영덕은 동해의 신비로운 ‘덕의 언덕’이다. 그래서 영덕의 본명은 ‘덕원(德原)’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덕으로 가득하다’는 뜻의 ‘영덕(盈德)’이다. 자연의 덕으로는 산과 바다가 있어, 이곳에서 나오는 많은 물산은 건강을 지켜주고, 맑은 물과 상쾌한 공기는 심신을 씻어준다. 인간의 덕으로는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후손들에게 커다란 자부심과 삶의 지혜를 깨우쳐 주고 있다.
‘영덕대게’도 빼놓을 수 없는 자연의 덕이지만, ‘영덕문향(盈德文香)’ 또한 지나칠 수 없는 영덕의 자랑거리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낳았다는 점에서 영덕 사람들은 적어도 ‘땅이 좋아야 훌륭한 인물이 난다’라는 뜻의 ‘인걸지령(人傑地靈)’을 믿고 있다.

흔히 그림 중에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장르가 인물화라고 한다. 유연한 원뿔꼴의 모필로 먹물이 번지는 화선지 위에 인물을 그리기는 더욱 어렵다. 더구나 사물의 특징만을 잡아내어 문기(文氣)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문인화가로서 인물화에 손을 대기란 정녕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심관(心觀) 선생은 문인화 작가로서 보기 드물게 우리 역사상의 훌륭한 인물들을 살아 움직이는 영상 이미지처럼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이번에는 누구나 존경하고 숭배하는 세 분의 영덕 위인, 곧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 여말 선초의 대학자로서 6천여 수의 방대한 시문을 남긴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조선 중기의 여류문인이자 요리 연구가로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장계향(張桂香, 1598~1680) 등을 그만의 독특한 동적 필세로 표현하고 있다.
화폭 안의 시문을 음미하면서 인물들의 표정이나 동작을 살펴보면, 그들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게다가 인물 곁에 있는 소나무나 바위, 매화나 대 등도 나와 함께 경청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면, 절로 미소가 맴돈다. 작품 속 주인공의 문학과 철학 세계를 천착하지 않고서는 그려낼 수 없는 것이 문인(文人)의 그림, 문인화(文人畵)이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의 인간의 의사소통은 음성이나 문자가 주로 담당해 왔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사진기의 일반화로 급격히 이미지 시대를 맞이하는 듯하더니, 급기야 최근에는 스마트폰과 영상기기의 일반화로 유튜브 시대, 곧 동영상 시대를 맞이했다.
사진기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우리는 회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프랑스의 역사화가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는 당시의 프랑스 화가이자 사진을 발명한 루이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 1787-1851)에게 비난을 퍼부으며 “오늘을 마지막으로, 회화는 생명을 잃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히려 회화는 죽지 않고 사진과의 경쟁을 통해 인상주의, 미래파, 극사실주의 등과 같은 새로운 미술 세계를 열어나갔다.
마찬가지로 각 가정에 TV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영화가 사라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영화는 TV의 위협을 물리치고 대형 영상이 주는 독점적 지위를 지키며 굳건히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에는 TV가 사라지고,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에는 책과 종이신문이 사라지는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전통적 미디어는 변신을 거듭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건강하게 살아남아 있다.
컬러사진이 나타나자 먹빛은 설 자리를 잃고, 다양한 폰트가 난무하자 서예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먹빛은 찬란하고, 서예는 캘리그라피가 위협해도 까딱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먹빛을 새롭게 창조하고, 슬로우 아트인 서예를 갈고 닦는 심관 선생과 같은 훌륭한 작가가 탄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잘하기도 어려운데, 심관 선생은 오랜 세월 동안 시(詩)·서(書)·화(畵) 세 가지를 기본 소양으로 갖추고, 거기에다가 현실 코드와 문화 트렌드를 정확히 읽어내며 위기의 문인화를 지키고, 살리는 방법을 꿰뚫고 있었다. 자칫 응물상형(應物象形)·전이모사(傳移模寫)에 머무를 수 있는 문인화를 역사 속 인물의 정신세계에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붓 길을 찾아내는 등, 선생에게는 전통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줄 아는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림과 글씨 및 그 내용 등의 각 요소가 절묘하게 어울려 아름다운 협주곡을 이룰 때, 우리는 훌륭한 지휘자로서의 작가를 만나게 되고, 나아가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아우라를 느끼게 된다.

심관(心觀) 선생은 그의 아호처럼 마음으로 느낀 ‘심상(心象)’과, 눈으로 캐치한 ‘관점(觀點)’에 따라 사물의 핵심을 잡아채고 있다. 역사 속에 비석처럼 멈춰선 선인(先人)들의 삶을 그만의 감성 여울로 불러내어 말을 걸기도 한다. 그리고 고향의 묵은 텃밭에서 오랫동안 가꾸어 온 예술혼으로 작품의 결실을 보고 있다.
SNS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소통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소통의 시대에는 상황에 어울리는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자칫 문자권력을 부린답시고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치달으면, 작가 자신도 자기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해프닝이 일어난다. 아무리 좋은 선인들의 말씀이라도 소통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심관 선생은 한글이 없던 시절의 한시를 그대로 쓰고, 다시 이를 한글로 풀이해 주는 친절한 소통의 작가라 할 수 있다. 국한문 혼용의 글씨임에도 절묘한 하모니를 이룸은 자신만의 산조나 재즈풍의 가락이 들어있기 때문이리라. 

심관 선생의 관심은 인간과 자연의 대결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조화에 있다. 역사 속의 인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자연의 일부가 되고, 인물이 들려주는 삶의 철학은 사군자를 비롯한 소나무, 연꽃, 바위 등의 자연물이 대변해 주기도 한다. 가끔은 까칠한 까치와 너그러운 호랑이가 이야기로 들려주기도 하고, 집 나온 게나 해변을 찾은 개구리가 기타를 치며 노래로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소란한 건 물론 아니다. 이따금 차 한잔 속에 절대 침묵으로 흐르기도 한다. 자연은 늘 그의 스승이자 경외의 대상이다. 그래서 화제 마지막엔 항상 ‘합장(合掌)’ 또는 ‘손 모음’으로 맺고 있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간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가 태어난 곳, 역시 고려 말의 문장가 이곡(李穀)이 노마드가 되어 산수유람 차 들렀다가 대문장가 이색(李穡)을 낳은 땅, 사랑과 나눔의 조선의 큰어머니 장계향(張桂香)이 시집온 곳, 조선 초기의 대학자 권근(權近)이 귀양 왔다가 쓴 ‘해안루기(海晏樓記)’에서 선경(仙境)으로 표현한 지방이 영덕이다.
‘대게의 맛, 문향의 멋’이 넘치는 영덕에 들러, ‘붓질의 흥, 먹물의 향’이 넘치는 심관 선생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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