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후손 없는 광복군 묘소 참배

2017년 9월 23일(토) 11시

흥사단 문화예술팀과 함께

서울시 강북구 북한산 국립 4.19묘지 뒤편에 있는

후손 없는 광복군 18위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가슴에 뜨거운 울림...
음복 후에 시래기 국밥집에 들러 담소를 나누다가 내려왔다.

고 박갑수 교수님이 생각난다.

아버님을 대신하여 참례하는 아드님이 기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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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金順根 : 1945년 밀정(密偵) 색출(索出) 공작 중 체포되어 자결(남몰래 사정을 살피는 일을 하다가 체포되어 자결). 곧 스파이를 찾다가 잡히자 자결.
工作 2. 어떤 목적을 위하여 미리 일을 꾸밈.
金雲白 : 1943년 9월 태항산에서 순국
金有信 : 1943년 6월 낙양지구 맹진에서 순국
金贊元 : 1945년 8월 태원에서 순국
董邦石 : 태항산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文學俊 : 1943년 8월 임현에서 순국
白正鉉 : 1945년 6월 태원에서 순국
安一勇 : 1944년 9월 산서성 고평전투에서 순국
李道淳 : 서산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李漢基 : 1943년 7월 태항산지구에서 순국
李海淳 : 1945년 8월 천진에서 순국
田一黙 : 1945년 8월 태원에서 순국
鄭相燮 : 1943년 9월 태항산에서 순국
趙大均 : 하북성 북경대학에서 지하조직원으로 활동
韓輝 : 1943년 7월 태항산에서 순국
玄以平 :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활동
신원미상 1인 : 1940년 6월 서안에서 순국
            - 환경부, 국립공원 북한산, 국가보훈처, 강북구
권상호
- 한국광복군 창설 제72주년 기념식 기념사 -
존경하는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원 여러분!
오늘은 우리 국군의 정신적 토대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지 72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입니다.
먼저 국권회복을 위해 이국땅에서 불굴의 독립정신으로 일신을 헌신하신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하며, 유명을 달리하신 애국선열께도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초 수많은 약소국가들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국권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해 27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그 중심에는 한국광복군이 있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창설되어 중국 대륙 뿐만 아니라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하여 눈부신 활약을 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전략첩보국과 연합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하는 등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한 것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해 강력한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무력을 갖춘 당당한 한국광복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국군의 모체가 되었으며, 확고한 역사의식과 불굴의 투쟁정신은 우리 국군의 성장과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자리를 함께 하신 여러분!
오늘의 대한민국은 수많은 애국선열들과 호국영령, 그리고 국가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위에 서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광복군을 비롯한 애국선열들의 위국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나라를 물려줄 수 있도록 국민 호국정신 함양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2012.  9.  17 국가보훈처장  박 승 춘  대독

우리는 광복군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국땅에서 불굴의 독립정신으로 일신을 헌신하신 한국광복군동지회 황의선 회장님과 회원 여러분께 경의를 표합니다. 또한 유명을 달리하신 애국선열들께 삼가 명복을 빕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날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오랜 기간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그 중심에는 한국광복군이 있었습니다.
권상호
■ 제사란 무엇인가
"제사(祭祀)"란, '신령에게 음식을 바쳐 정성을 나타내는 의식'이다.
차례를 비롯한 모든 제사는 조상신을 모셔와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
제사 제(祭)자는 '제사상(示) 위에 손(又)으로 고기(肉→月)를 올리는 모습이다.'

■ 제사상 차리기
우리나라 속담에 "남의 제사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뒤집어 놓으면 집안마다 음식을 차리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제사상을 차리는데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여러가지 제사상을 차리는 방법에도 공통적인 원칙이 있다. 이러한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혼백이 일어나 남을 향하여 앉도록 제사상은 되도록 북쪽으로 놓는다.
(2) 실제로 혼백이 앉아 먹는다고 생각하고 놓는다.
(3) 좋은 음식은 혼백 가까이, 외쪽보다는 오른쪽에 놓는다.
(4) 절은 짝수로 하고, 음식은 홀수로 놓는다.

* 제사상은 북쪽으로 차린다.
대궐에서 왕이 자리에 앉거나, 관아에서 원님이 앉을 때에도 모두 등이 북쪽을 향한다. 따라서 제사를 지낼 때에도 혼백의 등이 북쪽을 향하도록 앉으니까, 자연히 제사상은 북쪽에 차리게 된다.
하지만 아파트 생활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북쪽을 고집하기가 힘들다. 더우기 안방은 침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제사상을 놓을 자리가 없다. 이런 경우에는 혼백이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으시도록, 소파 앞에 제사상을 차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  좋은 음식을 혼백의 가까이 놓는다.
혼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맨 먼저 놓는 것은 밥과 국이다. 그 다음 부터는 좋은 음식을 혼백 가까이 놓으면 된다. 술을 먼저 올리고 진메는 나중에 올린다. 이를 두고 주주객반이라 한다. 받은 술잔과 술 안주를 가장 가깝게, 진메와 반찬은 그 다음 순서, 그리고 디저트에 해당하는 과일은 혼백으로 부터 가장 먼 곳에 진설한다. 
제사상 차리는 법으로 과채적탕(果菜炙湯 - 과일, 채소, 적, 탕)이라는 말이 있는데, 맨 앞줄에 과일, 다음 줄에 채소로 만든 나물, 다음이 적(부친 음식), 그 다음이 탕(끊인 음식) 순으로 놓는 방법이다.
하지만 일부 지방에서는 적과 탕의 순서를 바꾸어 놓는 경우도 있다. 돌아가신 분의 생각하여 술안주와 반찬의 위치를 정하면 되겠다.

* 좋은 음식을 혼백의 오른쪽에 놓는다.
제사상을 차릴 때 혼백의 가까이에 좋은 음식을 놓듯이, 혼백의 오른쪽에 좋은 음식을 놓는다. 주로 사용하는 오른손 가까이에 좋은 음식을 놓아 드시기 편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차례와 같이 2~4대의 제사를 한상에 차리는 경우 오른쪽부터 높은 조상신(증조부-증조모-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을 모시기 때문에 오른쪽에 더 좋은 음식을 놓는다.
제사를 차리는 법으로
어동육서(魚東肉西 - 생선은 동쪽, 고기는 서쪽)라고 있다. 생선보다는 고기가 비싸기 때문에 고기를 혼백의 오른쪽에 놓는다.
두동미서(頭東尾西 - 생선의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 꼬리가 먹기 좋은 쪽이기 때문에 혼백의 오른쪽에 놓는다.
(동서와 좌우의 우열에 관해서는 한족과 몽골족 및 우리가 서로 다르므로 더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 숫자에 담긴 음양의 이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절을 할 때에는 1번하지만, 죽은 사람에게 절을 할 때에는 2번한다. 살아 있음은 양(陽)을 의미하고, 홀수인 1도 양(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죽음은 음(陰)을 의미하고, 짝수인 2도 음(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자는 4번 절을 하는 집안도 있다. 이는 남자는 양(陽)이고, 여자는 음(陰)이기 때문에, 여자(陰)가 죽은 사람(陰)에게 절을 하면, 음(陰)과 음(陰)이 겹치기 때문에 4번이 된다.
하지만 절을 하는 횟수를 제외한, 제사는 지배하는 숫자는 다음과 같이 모두 양의 수이다.
- 분향할 때 향의 개수는 한개 혹은 3개를 꽂는다.
- 제사상에 음식을 놓는 줄 수는 3줄 혹은 5줄이다.
- 제물의 개수(생선 마리 수, 과일 수, 나물의 종류, 탕의 종류 등등)는 모두 1, 3, 5, 7... 개로 모두 홀수이다.

* 제사상에 사용하지 않는 음식
고추나 마늘을 사용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김치는 제삿상에 올리지 않는다.(일부 지방에서는 김치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김치는 고추가루가 들어가지 않은 백김치이다)
원래 고추는 한국에서 재배되지 않았다. 한국에 들어온 내력에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독한 고추로 조선 사람을 독살하려고 가져왔으나, 오히려 고추를 즐기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고추는 임진 왜란 때 일본에서 들어 왔고, 이로 인해 제사상에는 고추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름에 "치"자가 들어가는 생선(넙치, 날치, 멸치, 꽁치, 갈치, 한치 등 주로 비늘이 없는 생선)은 제사상에 사용할 수 없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한약을 먹을 때도 비늘 없는 생선을 금기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옛날에는 이름에 "치"자가 들어가는 생선이 비교적 흔하고 싼 생선이기도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복숭아나무가 요사스런 기운을 몰아내고 귀신을 쫓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제사상에는 복숭아를 쓰지 않고,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심지도 않는다.
이외에 바나나, 오렌지, 수입포도 등 국내에서 재배되지 않는 과일을 제사상에 올리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제한이나 금기는 없다(오히려 조선 시대에는 이런 과일이 귀해 임금이나 가까운 신하들만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가급적 국산 과일을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
 
■ 제례 올리기
제사지내는 법식은 지방이나 문중에 따라 모두 다르기는 하나, 골격을 이루는 순서는 대략 다음과 같다.

(1)혼백을 불러와, (2)인사를 드리고, (3)술을 올리고, (4)식사와 차를 대접한 후 (5)제사를 끝낸다.
일견 복잡해 보이는 제사도 따지고 보면 일반 손님을 초대해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면 각각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자.

1. 조상신의 혼백을 불러온다.
혼백이란 혼(魂)과 백(魄)이라는 두 글자의 합성어이다.
혼은 정신적인 영(靈)을, 백은 육체적인 영(靈)을 의미한다.
또,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백(魄)은 시신과 함께 땅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조상신에게 식사를 대접하기위해서 혼백을 모두 불러오는 것이 제사의 첫 순서이다.(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혼백을 불러 올까?

2. 하늘에 있는 혼을 불러오기 위해 분향을 한다.
먼저 혼(魂)을 불러 오기위해서는 향을 피운다. 향을 피우는 이유는 향의 연기와 냄새가 하늘 높이 퍼져 하늘에 계시는 혼을 불러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에서 맨 먼저 하는 것이 분향(焚: 불사를 분 香: 향기 향)을 하는 것이다. 또한 문상을 가거나 참배를 할 때 분향을 하는 이유가 바로 혼을 부르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낼 때 대문과 방문을 열어두는 것도 혼이 들어오게 함이다.

3. 땅속에 있는 백을 불러오기 위해 땅에 술을 붓는다.
백(魄)을 부르기 위해서는 술을 땅에다 3번 나누어 붓고는 두번 절한다.땅에다 술을 붓는 이유는 백이 땅속에 묻혀있기 때문에 술이 땅 속으로 흘러 들어가 백을 불러 온다는 것이다.
성묘를 갔을 때에는 술을 땅에 부을 수 있지만, 집안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땅이 없다. 그렇다고 방바닥에는 술을 부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릇에 흙과 풀을 담아 땅을 대신한다. 이렇게 흙과 풀을 담을 그릇을 모사(茅沙 - 풀과 모래) 그릇이라 부른다. 즉 그릇에 황토 흙이나 가는 모래를 담고 그 위에 풀을 담은 그릇이다.(풀 대신 짚을 조그마하게 묶어 올려 놓기도 한다.)
실내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이런 모사그릇을 향을 피우는 향로 옆에다 둔다. 이와 같이 혼백을 부르는 절차를 강신(降:내릴 강 神:귀신 신 - 신이 내려온다)이라고 부른다.

4. 혼백에게 전원 인사를 드린다.혼백을 불러 모셨으면 처음으로 해야할 일은 당연히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제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함께 두번 절한다. 이와 같은 절차를 참신(參:뵐 참 神:귀신 신 - 신을 뵙는다)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참(參)자는 참배(參拜)한다는 의미이다. 

5. 혼백에게 3잔의 술을 올린다.예로부터 술의 의미는 음식 이상의 것이었다. 결혼을 하거나 맹서를 할 때 술을 나누어 먹고, 아랫사람에게 술잔을 내려 노고를 치하하고, 윗분에게 예를 다하기 위해서는 술을 올렸다.
우리나라 속담에 "죽어 석잔 술이 살아 한잔 술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모셔야한다는 의미인데, 이때 "죽어 석잔 술"이란 "제사 때 올리는 술 석잔"을 의미한다.
석 잔의 술을 올리는 의식을 각각 초헌(初:처음 초 獻:바칠 헌 - 처음 바침), 아헌(亞:버금 아 獻:바칠 헌 - 다음 바침), 종헌(終:마지막 종 獻:바칠 헌 - 마지막 바침)이라 부른다. 헌(獻)자는 바치거나 헌납(獻納)한다는 의미이다. 초헌은 제주가 하고, 아헌은 제주의 부인이, 종헌은 제주의 맏아들이 한다. 각각 술을 따라 올리고, 두번 절을 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여자를 아예 배제하여, 초헌을 제주가 하고, 아헌을 남자 형제가하고, 종헌을 제주의 맏아들이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호주제가 사라지는 마당에 남성 중심의 이러한 제사법은 옳지 않다고 본다. 아마도 남녀 구분없이 연장자 순으로 절을 하는 것은 어떨까?

6. 첫잔을 올린 후 제사를 지내게 된 이유를 설명해 드린다.
이중에서 초헌(初獻)을 할 때에는, 잔을 올린 후 축문(祝文)을 읽고 절을 한다.
축문의 내용은 제사를 지내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제사에서는, "몇 년 몇 월 며칠, 아들(혹은 손자) 누구누구가 기일을 맞이하여, 음식을 차려 올립니다. 등등" 이런 내용을 미리 글로 써두고 읽는다.
원래 이런 축문은 한자로 쓴다. 하지만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는 축문을 한글로 써 읽기도하고, 별도의 축문 없이, "오늘 새해를 맞이하여 가족들이 모두모여 조상님께 인사를 드려려고 합니다..."하고 제주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혹은 묵념으로 대신한다.
이와 같이 축문(祝文)을 읽는 것을 독축(讀:읽을 독 祝:축복할 축)이라고 부른다.

7. 혼백이 식사를 한다
술올리기(초헌, 아헌, 종헌)가 끝나고 나면, 혼백이 식사를 한다.
맨 처음 밥뚜껑을 연다. 이러한 의식을 개반(開:열 개 飯:밥 반 - 밥 뚜껑을 연다)이라고 부른다.다음으로 숟가락은 밥에 꽂고(숟가락 안쪽이 동쪽을 향한다 - 혼백이 오른손잡이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젓가락은 반찬 위에 올려 흡사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재현한다. 이러한 절차를 삽시(揷:꽂을 삽 匙:숟가락 시 - 숟가락을 꼽는다)라고 부른다. 삽(揷)자는 꽂거나 삽입(揷入)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나서 편안하게 식사를 하시도록 방문을 닫고 나온다. 이러한 의식을 합문(合:합할 합 門:문 문 - 문을 닫는다)이라고 부른다.
혼백이 식사를 하는 동안, 방 바깥에서 서서 기다린다.(혹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기다리는 시간은 밥 9수저 정도 드실 시간이다. 

8. 식사가 끝나면 차(茶)를 올린다
식사가 끝나면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 국그릇을 치우고 숭늉을 올리고, 숟가락과 젖가락을 숭늉그릇에 담구어 둔다. 숭늉을 올린 후 숭늉을 마실 시간 동안 잠시 묵념을 한다. 이러한 의식을 헌다(獻:바칠 헌 茶:차 다 - 차를 바친다)라고 부른다. 다(茶)자는 차 다(茶)자이다. 중국에서는 차를 올렸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숭늉으로 대신한 것 같다.
잠시 후 숭늉에 밥을 조금씩 3번 떠서 넣고, 밥뚜껑을 덮는다. 지방에 따라 숭늉에 밥과 함께 반찬들을 조금씩 넣는다. 이렇게 숭늉에 담긴 음식은 제사가 끝난 뒤 대문 바깥에 한지를 깔고 그 위에 올려놓는다. 이 음식은 조상신을 모시고 갈 사자를 위한 음식이라고 한다.

9. 잘 가시라고 인사를 하고 제사를 끝낸다
제사를 마치는 의미로 제주가 술잔을 올리고 잘 가시라고 두 번 절한다. 이때 제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같이 절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서 지방을 태운다. 이러한 의식을 사신(辭:말씀 사 神:귀신 신 - 신을 보낸다)라고 부른다.
이렇게 제사가 끝나면 제사상의 음식을 다른 상으로 옮겨 놓거나 상을 90도 돌려 놓는다. 이러한 의식을 철상(撤:거둘 철 床:평상 상 - 상을 거둔다)라고 부른다. 철(撤)자는 거두거나 철수(撤收)한다는 의미이다.
제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지낸 음식을 먹는 것으로 제사를 끝낸다. 이런 의식을 음복(飮:마실 음 福:복 복 - 복을 먹는다)이라고 부른다. 제사 음식에는 복이 들어 있어서 복을 나누어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의미이다.
안동 지방의 일부 집안에서는 제사를 지낸 후, 밥과 나물 등을 모두 비벼 똑같이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빔밥을 나누어 먹는 이 의식이 너무나 좋아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평등사상이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제사를 지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에서 열거한 복잡한 형식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이다.(이 말은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담배를 즐겨 피우셨다고, 담배에 불을 붙여 제사상에 올려 놓는 사람도 있다. 담배를 제사상에 놓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 돌아가신 분을 위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TV드라마에서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생전에 화투(花鬪)를 즐겼었다고, 어머니 제사상 앞에 화투를 갖다 놓고, 어머니와 화투치는 시늉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감동 그 자체였다.
더 중요한 것은 일 년에 몇 차례 가족이 모두 모여, 돌아가신 분을 기리며 음식를 대접하고, 서로 간에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서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최근 명절증후군이라고 해서 명절이 되면 몸이 아파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가족을 위해 일년에 몇 차례만 희생한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런 병은 사라지리라 본다.
권상호
무후광복군의 업적 연구

김성률(金聲律)
독립운동계열 : 광복군
출생 : 1920.4.
출생지 : 황해 연백
사망 : 1943. 9.
사망장소 : 산서성 능천전투에서 순국
훈격 : 애족장
훈격년도 : 1991
공적내용 : 황해도 연백(延白) 사람이다.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적후방에서 공작 중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386·408면

金順根 : 1945년 밀정색축공작 중 체포되어 자결
金雲白 : 1943년 9월 태항산에서 순국
金有信 : 1943년 6월 낙양지구 맹진에서 순국
金贊元 : 1945년 8월 태원에서 순국
董邦石 : 태항산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文學俊 : 1943년 8월 임현에서 순국
白正鉉 : 1945년 6월 태원에서 순국
安一勇 : 1944년 9월 산서성 고평전투에서 순국
李道淳 : 서산지구 공작요원으로 활동
李漢基 : 1943년 7월 태항산지구에서 순국
李海淳 : 1945년 8월 천진에서 순국
田一黙 : 1945년 8월 태원에서 순국
鄭相燮 : 1943년 9월 태항산에서 순국
趙大均 : 하북성 북경대학에서 지하조직원으로 활동
韓輝 : 1943년 7월 태항산에서 순국
玄以平 :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활동
신원미상 1인 : 1940년 6월 서안에서 순국
            - 환경부, 국립공원 북한산, 국가보훈처, 강북구

1975년에 조성한 비석 후면의 명단
김천성(1975.8.8. 국립묘지이장)
김찬원 문학준 정상섭 김운백 김성률 안일용 전일묵
현이평 김유신 백정현 이해순 이한기 한휘 한성수(韓聖洙-업적에는 빠져있음- 현장 확인요) 김순근
이도순 신원미상 1인

김상신(金相臣,金成律?,金成慄)
- 1886. 8.25~1949. 9.12
- 애국장(90)
 
전북 임실(任實) 출신이다.
1907년 호남 의병장 이석용(李錫庸) 의진에 입진(入陣)하여 도로부장(道路部長)으로 활약하였으며, 1908년 9월 6일 일본 헌병의 밀정인 김실일(金實日)을 살해하였다.
경술년 이후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에서 1912년까지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전주지청(全州支廳)에서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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