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5
보아야 할 것과 보지 말아야 할 것
‘보다’라는 동사는 사전에 의하면 그 의미가 스무 가지가 넘는다. “나는 산을 본다.”에서 ‘보다(看, see)’라는 서술어는 주어 이외에 하나의 필수 성분을 더 요구하기 때문에 문법에서 ‘두 자리 서술어’라고 한다. 여기에서 주어가 ‘나’라고 할 때, 목적어는 내 눈으로 보는 ‘대상’이라 할 수 있다. 보는 대상은 동서남북, 전후좌우처럼 방향에 따라 원근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보다’를 포함하고 있는 서술어로는 ‘돌보다, 맞보다, 엿보다, 떠보다, 밉보다, 얕보다, 흉보다, 바라보다, 쳐다보다, 내다보다, 둘러보다, 가려보다, 가로보다, 노려보다, 쏘아보다, 칩떠보다, 훔쳐보다, 째려보다, 돌아보다, 돌이켜보다, 거들떠보다’ 등에서 보듯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자어도 있다. ‘목도하다, 관찰하다, 관람하다, 관망하다, 조망하다, 열람하다, 시찰하다, 전망하다’ 등은 물론 ‘좌고우면(左顧右眄)’ 또는 ‘좌우고면(左右顧眄)’도 있으니 이는 이쪽저쪽을 돌아본다는 뜻으로, 앞뒤를 재고 망설임을 이르는 말이다.
가끔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며 생각에 젖곤 한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위치다. 왜 눈이 입보다 위에 있을까? 이는 아마 많이 보고 적게 말하라는 뜻일 거야. 두 눈은 앞으로 붙어있지만 두 귀는 왜 양옆으로 붙어있을까? 두 눈으로는 옆도 뒤도 보지 말고 앞만 바라보며 가라는 뜻이고, 두 귀로는 양쪽의 서로 다른 의견을 균형 있게 들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며칠 전 한 친구가 카카오톡으로 영동고속도로 봉평터널 입구에서 일어난 5중 추돌사고의 끔찍한 동영상을 보내왔다. 사고 순간을 보는 순간 이른바 멘붕이 일어날 정도였다. 장래가 만 리 같은 20대 여성 4명이 소리도 못 지르고 죽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순간 어지럼증이 난다. 빠르게 달리던 관광버스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앞에 있던 승용차를 그대로 들이받는 장면으로 버스에 깔린 승용차들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관광버스 운전사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앞만 보고 달렸으면 사고는 없었을 텐데...
본의는 절대 아니었겠지만 어쨌든 사고결과는 관광버스 기사가 살해(殺害)를 저지르고만 꼴이다. 살해는 남에게 끼치는 해 중에 가장 큰 해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눈으로 무엇을 ‘본다’는 것에 대한 관점은 예와 지금이 사뭇 다르다.
<논어(論語)> 안연편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에게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실천 조목으로 사물(四勿)을 제시했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도 말라.’는 것이다. ‘하지 말라’는 규제로 보기 쉬운데 따지고 보면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으로, 예만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禮)의 해석은 인(仁)의 실천 방법으로 보기도 하고, 사람이 본래 지녀야 할 예의와 법도로 보기도 한다. 따라서 극기복례란 곧 자신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와 법도를 따르는 마음을 회복하자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공자의 사물(四勿)에 대하여 송(宋)나라 정이(程頤)는 사물잠(四勿箴)이란 잠언(箴言)을 지었다. 사물잠 중의 처음에 나오는 시잠(視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음은 본래 형체가 없이 텅 비어 있는 것으로 사물을 마주함에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마음을 다잡아 보존하는 요령이 있으니 보는 것이 법도가 된다. 물욕이 눈앞을 가리면 마음은 그리고 옮겨가니, 이것을 밖에서 통제하여 안에 있는 마음자리를 편안하게 해야 한다. 자신의 욕심을 누르고 예(자연의 섭리)를 따르면 오래도록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 (心兮本虛 應物無迹 操之有要 視爲之則 蔽交於前 其中則遷 制之於外 以安其內 克己復禮 久而誠矣)”
시잠의 내용은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실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 마디 붙이자면, 1분짜리 시잠을 읽지 않아 예가 아닌 것을 보고 물욕을 통제하지 못해 68년 검찰 역사상 현직 검사장의 첫 구속 사례를 남긴 진경준 검사장이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옛날에는 ‘예(禮)만 보라’고 했는데, 오늘날은 봐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집안에서는 TV와 컴퓨터를 봐야 하고, 밖에서는 교통 신호등을 비롯한 무수한 경계선을 봐야 한다. 게다가 손안의 작은 스마트폰까지 수시로 살펴봐야 하니 현대인의 눈은 참으로 바쁘고 피곤하다. 이러하니 많은 현대인은 안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옛 그림에서 소나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며 독서를 하거나, 술에 취한 채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즈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불법 운전 또는 음주 운전에 해당하겠지만, 나귀는 사이드미러도 핸들도 없는 미래형 차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옛날에는 천지인(天地人)을 보라고 가르쳤지만, 지금은 교육도 종교도 돈만 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선조는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의 가치를 중시하고 하늘, 자연, 인간은 공존해야 할 것으로 보았지만, 오늘날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나머지는 지배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 결과 1등만을 미덕으로 생각하게 되고, 세상은 1등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과 갈등의 장으로 바뀌었다.
멀리 바라보는 것은 인공위성이 대신하고 인간은 손안의 스마트폰만 살피는 근시안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동물로 전락한 인간은 사소한 일에도 잘 흥분하고 살인과 폭행을 게임처럼 즐기며 테러와 전쟁에 광분하고 있다.
IS에 의한 테러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더니, 프랑스 니스에서는 끔찍한 트럭 테러가 발생했다. 자고 일어나니 이번에는 터키의 군부 쿠데타 소식이다. 영국이 브렉시트로 흔들리더니, 정치는 강대국을 중심으로 점차 우경화되는 추세다. 세계 경제는 불황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남중국해 분쟁으로 인한 중국과 필리핀, 베트남과의 갈등은 미·중간의 갈등으로 심화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성주군이 사드 배치 반대 집회로 벌집같이 요란하더니, 북한은 미사일 3발로 사드를 겨냥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금 지구촌은 매우 불안하다. 뉴스 보기가 두렵다. 이런 때일수록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말고 묵묵히 내 갈 길을 가야겠다. 봐야 할 것은 바로 나 자신이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비교 대상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울기보다 내일을 바라보며 웃어야 한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며 한숨지을 것이 아니라 밝은 앞날을 내다보며 희망을 품어야 한다.
날이 샌다. TV를 켤까 말까. 뉴스 채널로 돌릴까 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