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동방일사(東方逸士)의 일품묵향(逸品墨香)

동방일사(東方逸士)의 일품묵향(逸品墨香)

권상호(문학박사, 칼럼니스트)

1. 일품(逸品), 나를 말하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예 일사(逸士)들이 모여, 표일(飄逸)하고 청일(淸逸)한 일품(逸品)으로 일품향(逸品香)인 묵향(墨香)을 담아, 서예 명가인 백악미술관에서 먹빛을 펼치니 이른바 한국서예일품전(韓國書藝逸品展)이다. 일품 작가들은 오랜 세월 혼자만의 시간 갖기에 익숙함을 넘어, 고독을 즐길 줄 아는 향적불고(享寂不孤)의 서가(書家)로서 자긍(自矜)이 대단하다. 적어도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바람을 참고, 설중매를 보기 위해 눈서리를 견뎌 온 분들이다.
일품(逸品)은 일품(一品)으로 붓 멋과 먹 맛의 경계를 벗어나 있다. 범품(凡品), 법품(法品), 능품(能品), 예품(藝品), 묘품(妙品), 절품(絶品), 도품(道品), 신품(神品) 등의 서예계(書藝系) 행성(行星)을 두루 섭렵한 뒤에 궤도 밖에서 놀고 있는 별이다.
누구나 보고 읽을 수 있을 정도의 평범한 범품(凡品), 교통법에 따라 운전하듯 필법에 따라 운필한 법품(法品),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차별화된 능력을 인정받는 능품(能品), 정교한 필묵 연주의 기예에 감동하게 되는 예품(藝品), 획법·자법·장법이 치밀하면서도 운치가 넘쳐흐르고 오묘한 묘품(妙品), 학술적 깊이와 관조적 정서가 비할 데 없는 절품(絶品), 오랜 수련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달인의 도품(道品), 붓끝에서는 신운이 감돌고 내용마저 신비로워 인간의 손에서 나왔으나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신의 도움을 받은 듯한 신품(神品), 일체의 세속을 벗어나 더할 수 없는 높은 경계에 이르러 생각의 깊이와 느낌의 넓이와 상상의 높이를 알 수 없는 일품(逸品). 일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 있으면서도 영원히 ‘작가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아우라(aura)가 느껴진다.
개인에게는 인격(人格)이 있고 나라에는 국격(國格)이 있듯이 예술 작품에는 품격(品格)이 있다. 필자는 조심스럽게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앞뜰에 놓인 품계석(品階石)처럼 구품(九品)으로 구분해 보았지만, 서열을 매길 생각은 전혀 없다. 작품은 기록경기와 달리, 순서를 매길 수도 없고 매겨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설령 등수를 매긴다 하더라도 미적 잣대에 따라 순위가 달라진다. 하지만 품격(品格)이란 이름으로 작품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많이 있어왔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2. 서예(書藝), 문자권력을 말하다

인간의 발명품 중 최고 작품은 아마 ‘글’일 것이다. ‘말’도 중요하지만 휘발성이 강하여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글은 불변성(不變性)·영속성(永續性)의 특성과 함께 인류문화(人類文化)와 역사(歷史)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러고 보니 붓의 사명(使命)은 대단하면서도 절대적이다.
돌이켜 보면 역사시대(歷史時代) 이래 지금까지 문자(文字)는 권력의 구심점에 있었다. 문자를 터득하고 붓을 잡는다는 것은 권력을 잡는 일이었다. 이를 일러 ‘문자권력(文字權力, 이후 文權)’이라 할 수 있다. 서사 도구를 문방사보(文房四寶)라 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문자는 발명 이래 양반이나 귀족과 같은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으로서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갑골문(甲骨文)은 제사와 수렵을 맡은 제왕의 문권(文權)이었다. 소전(小篆)은 진시황의 문권이었고, 파스파 문자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문권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도 몽골문자를 개량한 만주문자를 만들어 문권을 휘둘렀다.
우리의 경우도 이두(吏讀)는 ‘이(吏)’ 자가 일러주듯 벼슬아치들의 문권이었고, 고려 광종 때(958년)부터 갑오개혁 때(1894년)까지는 한문이 절대적 권력이었다. 물론 이때는 문자라 하면 으레 한문을 가리켰다. 세종의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대한 최만리의 반대 상소는 문자권력 누수(漏水)를 염려하여 나온 행위였다.
옛날의 간찰(簡札)은 한결같이 초서(草書)로 쓰여져 하인은 봐도 알 수 없었다. 초서는 작가의 성정(性情)을 마음껏 풀어주는 서예술의 꽃이기도 하지만 문자권력 그룹의 비표(祕標)이기도 했다. 요즘도 한글날을 즈음하여 법률·의학·행정 등의 전문용어를 쉽게 고쳐 쓰자는 여론이 일어나지만 결코 곧이듣지 않는다. 이유는 기득권자가 이미 문권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아예 약방문(藥方文)을 환자가 이해하면 약효가 떨어지고, 부적(符籍)을 남이 읽어내면 영험함이 사라진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달라졌다. 소통(疏通)과 빅 데이터(big data)가 대세인 세상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인공지능(人工知能, AI)은 인간의 능력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슬로우 아트인 서예의 입지가 약화되는 건 당연하다. 초서로 아무리 빨리 쓰더라도 엄지족이 쏟아내는 정보의 양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다. 서예는 이제 실용적(實用的) 소통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예술적(藝術的)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서(書)’에 ‘예(藝)’ 자를 붙인 우리의 ‘서예(書藝)’라는 단어 선택은 중국의 ‘서법(書法)’이나 일본의 ‘서도(書道)’에 비해 탁월한 판단이자, 미래지향적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번의 일품전은 황홀한 ‘붓의 갈라 쇼(gala show)’라 할 수 있다. 붓으로 지휘하고 먹으로 연주한 ‘일품(逸品) 오케스트라’는 매우 성공적인 클래식 연주에 비견할 수 있다. 소위 캘리그래피(calligraphy)가 서예의 실용성을 어느 정도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차제에 실용성은 컴퓨터 폰트에게 완전히 넘겨주자. 그리고 이번 전시는 ‘순수예술(純粹藝術)로서의 서예선언(書藝宣言)’을 하는 역사적 이벤트로 기록되길 바란다. ‘신서예주의(新書藝主義)’랄까. 이것이 서예의 새 활로이며 새로이 문자권력을 획득하는 길이다.
 
3. 개성(個性), 자존(自尊)을 말하다

“Be a voice not an echo.”
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남긴 격언(格言)이다. ‘메아리가 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는 정도의 뜻이 되겠다.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지 말고 자기 주관(主觀)대로 실천하라는 말이다. 이론 물리학자의 말이지만 창조(創造)를 생명처럼 여기는 예술가에게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목소리는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르다. 내 목소리는 틀린 게 아니라 ‘다름’이다. 다름이란 예술가에게 있어 절대 자존(自尊)의 ‘나만의 세계’ 곧, ‘개성(個性)’인 것이다.
한 외국 작가가 한국의 서예공모전을 보고 ‘개인전인 줄 알았다’고 말한 웃어넘길 수 없는 일이 있었다. 한마디로 ‘몰개성(沒個性)의 전시’였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큰 울림으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래, 앞으로 한국 서예계는 모든 붓쟁이를 ‘법노(法奴)’로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 서예를 즐기는 ‘낙서가(樂書家)’로 키워야 한다. 그래야 서예 김연아도 나오고, 서예 박지성도 나올 수 있다.
학원에 다니지 않아도 자전거를 탈 줄 알고, 한두 달이면 자동차 면허증도 딸 수 있다. 운필(運筆) 라이선스(license)도 서너 달 골똘히 수련하면 취득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왕희지(王羲之)나 김정희(金正喜)가 스승의 서슬 아래 법노로 묶여 있었다면 결코 명필(名筆)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객관적 악필(惡筆)도 주관적 명필(名筆)일 수 있다. 이러한 ‘프라이드(pride) 서예정신’에서 뜻밖의 새로운 작품이 창출된다. 안진경(顏眞卿)만 죽도록 따라 쓰다가는 안진경 아류(亞流)밖에 될 수 없고, 스승의 체본(體本)만 열심히 베끼다 보면 결코 스승을 능가할 수 없다.
‘Be a voice’는 한국 서단에 경종을 울리는 격언으로 들린다. 나름의 붓 연주로 자신만의 개성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날 수 있다. 작가는 외적으로 겸손하더라도 내적으로는 무한한 자존감(自尊感)이 필요하다. 석가모니가 아니더라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잘 났다”라고 자부하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일품 작가로 남기를 기도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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