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21
질병(疾病)과 건강(健康)
가을이다. 지루하기만 하던 여름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던 가을이 불쑥 찾아 왔다. 후텁지근한 날씨 탓으로 미뤄 두었던 많은 일이 일렬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가을이면 수십 조(兆) 개의 세포가 팝콘 튀듯 하고, 의욕의 피가 돌며 근골은 아우성친다. 오늘은 무슨 일을 보태고 무엇을 뺄 것인가. 줄 서 줄 서!
그런데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도 선명하듯이 일장(一長)이 있으면 일단(一短)이 따르게 마련이다. 가을의 의욕과 반가움 뒤에는 질병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이도 있다. 이 땅엔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를 지나 상쾌한 가을이 오니 다소 안심이지만, 지구촌 다른 곳에선 우기를 맞아 모기와 바이러스에 의한 온갖 질병이 창궐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지난해에는 메르스(MERS) 공포로 한여름에도 마스크를 하고 다니고 많은 행사가 취소되기까지 했었는데, 올해는 낯선 지카 바이러스(zika virus)와 구태의연한 콜레라(cholera)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브라질 등 남미에서 잠시 주춤하는 듯하던 지카 바이러스가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동남아에서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동남아 국가들의 경우 우리 국민의 방문이 잦은 지역이라,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사라진 줄로 알았던 콜레라 공포가 15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콜레라 환자 두 명이 국내에서 발생했는데, 이들은 남해안에서 회를 먹고 발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질병관리본부에서는 발병 원인을 해수 오염에 두고 조사를 강화하고 있다. 콜레라는 잘 치료하면 사망률은 낮지만, 내버려 두면 사망률이 50%가 넘는 무서운 질병이다.
평생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곳이 병원과 세무서이다. 그만큼 무서워하면서도 정면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질병과 세금 때문이다.
‘질병(疾病)’이란 무슨 뜻일까. 질병과 관련한 여러 말의 의미를 살펴보며 건강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것도 소중한 일이라 생각한다. 인생 후반부에는 몸에 해롭다면 고기라도 피하고, 건강에 좋다 하면 쓰디쓴 차도 마다하지 않는다.
질병은 ‘질(疾)’과 ‘병(病)’이란 두 글자가 합쳐진 말이지만, 두 글자의 유래는 확연히 다르다. ‘병 질(疾)’ 자는 글자 안에 있는 ‘화살 시(矢)’로 보아 ‘화살이 몸 밖에서 안으로 꽂히듯 갑자기 일어나는 외적 질병’을 뜻하고, ‘병 병(病)’ 자는 ‘남녘 병(丙)’으로 보아 ‘몸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발생한 내적 질병’을 가리킨다. 병(丙) 자는 땅 속에서 슬며시 싹이 돋아나는 모양이므로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앞의 질(疾) 자는 나중에 ‘화살처럼 빠르다’는 의미가 추가되어 질병도 아니면서 질주(疾走), 질풍(疾風)과 같은 단어가 생겨났다.
질병에 해당하는 모든 글자는 질(疾)과 병(病)에서처럼 ‘앓을 녁(疒)’이 들어 있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는 이 역(疒) 자 안에 쓰인 글자를 보면 단번에 무슨 병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疒) 자의 왼쪽 부분은 ‘평상 장(爿)’의 생략형으로 ‘침대’를 뜻하고, 윗부분은 침대 위에 드러누운 ‘환자(亠)’를 뜻한다. 그러니까 환자가 앓고 있는 질병의 원인은 환자 밑에 놓인 글자를 보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아마도 ‘암(癌)’일 것이다. 이 글자를 보면 환자가 산 위에 있어야 할 바위[嵒]를 몸 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암은 덩어리가 작을 때 미리 박살내야지 때를 놓치면 삶이 암담할 수밖에 없다.
고약한 말이지만 ‘지랄염병’이란 말이 있다. 지랄은 간질(癎疾)을, 염병(染病)은 장티푸스를 가리킨다. ‘간질 간(癎)’ 자를 보면 이 환자는 시공간[間]을 구분하지 못하고 발작하는 질병에 걸렸음을 알 수 있고, 염병의 ‘물들일 염(染)’ 자를 보면 이 환자는 감염(感染)에 의한 전염병(傳染病)에 걸렸다는 걸 금세 판단할 수 있다. ‘지랄’은 순우리말로 손짓, 발짓이라고 할 때의 동작을 뜻하는 ‘짓’과, 앓다[痛]의 어근인 ‘알’이 합쳐져 ‘짓알’이 되었고, 이 말이 다시 ‘지랄’로 변화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말 지랄은 ‘하는 짓이 덧난 병’의 뜻으로 볼 수 있겠다.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운 병을 일러 고질병(痼疾病), 줄여서 고질이라 하는데, ‘고질 고(痼)’ 자에는 ‘굳을 고(固)’가 들어 있으니 이 병은 병이 굳어 난치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아름다운 자연에 미쳐버린 연하고질(煙霞痼疾)은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그리고 수집벽(蒐集癖)·도벽(盜癖)도 병의 일종인데, 이 병은 ‘버릇 벽(癖)’ 자가 보여주듯이 피할[辟] 수 없는 병에 해당한다.
구제역(口蹄疫)은 소나 돼지 따위의 동물이 잘 걸리는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성 돌림병이다. ‘입 구(口)’와 ‘발굽 제(蹄)’로 보아 입과 발굽에 생기는 역병의 일종인데, ‘돌림병 역(疫)’ 자를 보면 ‘몽둥이[殳]’를 들고서라도 급히 물리쳐야 할 병임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돌림병은 소독, 예방, 주사 등을 통한 방역(防疫) 대책을 잘 세워야 한다. 몸 안에 균이 침입해도 병에 걸리지 않을 만한 저항력이 생겼다면 면역(免疫)이 되었다고 한다.
노인성 질환인 치매(癡呆)는 ‘어리석을 치(癡)’ 자로 볼 때 의문(疑問)이 사라진 병이다. 치(癡)대신에 치(痴) 자를 쓰기도 하는데, 매사에 궁금증이 없으니 이는 정신병에 해당한다.
모든 병은 병이 나기 전에 먼저 어떤 증세(症勢)가 나타난다. 그 증세를 미리 알기 위해 우리는 건강검진을 하는데, 증(症)에 ‘바를 정(正)’ 자를 쓴 것을 보면 어떠한 증세가 나타나면 정상(正常)이 아니므로 즉시 바로잡아야 한다.
병은 때가 되면 통증(痛症)을 동반한다. ‘아플 통(痛)’의 약은 ‘통할 통(通)’, 곧 소통(疏通)이다. 산모가 분만 전에 겪는 산통(産痛)을 ‘진통(陣痛)’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 속에는 아픔을 진압하고자 하는 진통(鎭痛)의 염원이 담겨 있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출산의 아픔도 해산이라는 소통 후에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감기(感氣)도 조심할 일이다. 감기는 냉기(冷氣)에 감염되었다는 뜻이다. 감기 자체가 질병은 아니지만, 스트레스처럼 모든 질병의 원인은 될 수 있다. 감기를 중국어로는 깐마오(感冒, gǎnmào), 일본어로는 가제(風邪, かぜ)라 한다. 우리와 달리 쓰는 걸 보면 감기란 말은 우리 고유의 한자어로 보인다.
그렇다면 질병 없는 건강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건강(健康)’이란 두 글자에 해답이 있다. ‘튼튼할 건(健)’ 자는 ‘붓[聿]처럼 몸을 꼿꼿하게 세워서 다닐 것’을, ‘편안할 강(康)’ 자는 ‘마음을 편안하게 쓸 것’을 요구하고 있다. 건강은 몸과 마음의 조화에서 비롯한다. 강(康) 자의 갑골문을 보면 알곡을 훑으며 탈곡하는 모양이었다. 먹을 게 있어야 마음도 편안해진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건강론이다.
갑자기 눈앞이 침침하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피곤(疲困)이 엄습해 오는가 보다. ‘지칠 피(疲)’ 자를 보면 피곤은 피부(皮膚)에서 온다. 이쯤하고 푹 자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