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34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34
언성에서 함성으로, 촛불에서 횃불로

대한민국은 작지만 큰 나라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한 가운데 여섯 차례나 토요일마다 단일 집회에 참여한 인파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지난 3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는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에 사상 최대 인파인 170만 명 정도가 모였단다. 전국적으로는 232만 명이 광장에 쏟아져 나왔음에도 큰 사고 없이 평화롭게 진행되었음은 다행한 일이다. 이를 보고 많은 외신이 한국 국민의 성숙한 민주 시민의식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있다니, 내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도 느껴진다.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국민의 ‘언성(言聲)’은 ‘함성(喊聲)’을 이루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촛불’은 ‘횃불’을 더하여 파도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우주의 씨앗인 소리와 빛의 축제장이었다.
우리말 ‘소리’는 그 의미의 폭이 대단히 넓지만, 크게 보면 자연의 소리와 동물의 소리 및 인간의 소리로 나눌 수 있다.
자연의 소리로 ‘바람 소리’ ‘나팔 소리’ 등과 같이 ‘진동에 의한 소리’가 있는가 하면, 동물의 소리로 ‘황소 울음소리’ ‘산비둘기 소리’ ‘귀뚜라미 소리’와 같은 ‘금수나 곤충의 소리’도 있다.
사람의 소리도 다양한데, ‘떠드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와 같이 의미 없는 ‘목소리’도 있고, ‘근거 없는 소리’ ‘누구에 대한 이상한 소리’와 같은 ‘소문’의 소리도 있다. 그런가 하면, ‘답답한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와 같은 ‘주장’의 소리도 있고, ‘판소리’에서처럼 ‘창(唱)’과 같은 소리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무서운 소리는 ‘국민의 소리’ ‘백성의 소리’와 같은 ‘여론의 소리’라 할 수 있다.
여론으로도 통하지 않을 때는 언성(言聲)이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있으니 그것은 함성(喊聲)이다. 함성이란 여럿이 함께 지르는 고함을 뜻한다. ‘소리 함(喊)’을 보면 ‘입 구(口)’에 ‘모두 함(咸)’으로 모든 입이 모여서 함성을 이룬다는 뜻이다. ‘입이 여럿이면 쇠도 녹인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것은 함성의 힘이다.
그리고 ‘소리 성(聲)’ 자에는 ‘귀 이(耳)’ 자가 붙어있다. 소리는 상대방이 귀로 들을 때 의미가 있다. 과학적으로도 소리에 굴절이 있어 낮말은 새가 잘 듣고, 밤말은 쥐가 잘 듣는단다. 벽을 치면 대들보가 울리고, 변죽을 치면 복판이 울게 마련인데, 어찌하여 청와대는 불청(不聽)인가. 달걀로 바위 치기요 물풍선으로 송곳 치기니 답답한 심사로다.
예부터 소리를 가장 잘 듣는 사람을 일러 성인(聖人)이라 했다. ‘성인 성(聖)’ 자의 구성 요소를 보면 듣고 남의 말을 듣고, 자기 뜻을 말하는 데에는 오뚝한[壬] 인물이 아닌가. 공자는 예순 살부터 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일을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된다고 한 데서 ‘육십이순(六十耳順)’이라 하지 않았는가.
소리로도 안 될 때는 어찌할 것인가? 다음 수단은 ‘빛’이다. 초기에는 ‘촛불’로 시작하되, 촛불로도 안 되면 홧김에 ‘횃불’이 등장하니 조심할 일이다. 횃불은 화마(火魔)를 데리고 다니므로 민의(民意)의 마지막 표현 수단이라 할 수 있다. ‘홰’라는 말에는 막대의 의미가 있다. 닭장 속에는 닭이 올라앉는 ‘홰’가 있고, 방안에는 옷을 거는 ‘횃대’가 있다. 그렇다면 횃불은 막대에 붙인 불이다. 불이 꺼져도 무기가 될 수 있다. 조심할 일. 촛불이든 횃불이든 이 땅의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과 같은 어둠의 정치를 밝히는 일이니 갈채를 보낸다.
함성이라 해서 정의의 좋은 함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선수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응원할 때의 함성은 좋은 함성으로, 선수에게 기운을 주고 전체 분위기도 띄운다. 하지만,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약한 상대를 위협하는 ‘왕따 함성’이나,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약소국에 겁주는 강대국의 ‘내 맘대로 함성’은 근절되어야 한다.
‘소리’의 어근 ‘솔’과, ‘사뢰다’의 어근 ‘살’, 그리고 ‘말씀’의 ‘씀’ 등은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 소라의 껍데기로 만든 옛 군악기 ‘나각(螺角)’을 만드는 걸 보면, ‘소라’도 소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입으로 소리를 내는 것은 음(音)과 성(聲)이고,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은 청(聽)과 문(聞)이다.
‘소리 음(音)’은 원래 ‘말씀 언(言)’과 같이 입안에서 나오는 소리를 뜻하는 글자로 두 글자 간에 구별이 없었다. 그러다가 진(秦) 나라 소전(小篆)에 와서는 ‘언(言)’은 ‘말(speak)’의 뜻으로, 언(言) 자에 한 획을 더한 ‘음(音)’은 ‘소리(sound, music)’의 뜻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음(音) 자를 바탕으로 하여 ‘뜻 의(意)’, ‘억 억(億)’ 자 등이 만들어지는데, 의(意)는 ‘마음의 소리’로, 억(億)은 ‘사람의 뜻은 매우 많다’는 데에서 착안한 점이 재미있다.
‘소리 성(聲)’의 갑골문은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석경[声, chime stone]’이라는 악기와 ‘귀[耳]’를 합한 형태로 석경 소리를 듣는 모양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위의 글자에 ‘방망이 수(殳)’와 ‘입 구(口)’를 더한 형태인데, 이는 손[又]에 나무망치[几]를 들고 석경을 치며 입[口]으로 노래하는 모양이다. 이후 소전에 오면 구(口) 자를 뺀 나머지 형태인 지금의 성(聲) 자가 완성된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석경 모양의 ‘소리 성(声)’으로 쓰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2차 청문회(聽聞會)가 열렸다. 청문회란 어떤 문제에 대하여 질문하여 그 내막을 듣는 모임이다. 듣는 데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른 시일 내에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 국격을 드높여야 한다. 
‘들을 청(聽)’의 갑골문은 ‘귀 이(耳)’ 옆에 ‘입 구(口)’ 자가 하나 또는 둘이 붙어있는 형태로 볼 때, ‘여러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나타난 금문에서는 ‘귀 이(耳)’ 밑에 ‘흙더미 위에 우뚝 선 사람’의 상형인 ‘우뚝 설 임(壬)’에, ‘열 십(十)’ ‘입 구(口)’ 등의 글자가 추가되었으니, 이는 ‘높은 곳에 서서 열 사람의 말, 곧 여론을 적극적으로 듣는다’라는 뜻으로 구체화하였다. 소전에 와서야 ‘입 구(口)’가 사라지고 대신에 ‘덕 덕(悳)’ 자가 붙어서 지금의 청(聽) 자와 비슷한 형태로 되었다. 덕(悳) 자는 직(直)과 심(心)을 합한 글자로 ‘바른 눈과 마음’의 뜻에서 출발한다. 결국 청(聽)은 ‘바른 안목과 바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다’라는 뜻을 지닌 다소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다. 오늘날은 ‘청명(聽命)’에서처럼 ‘받아들이다’의 뜻과 ‘청정(聽政)’에서처럼 ‘정사를 듣고 처리하다’ 곧 ‘다스리다’ 등의 뜻으로 의미 확장이 이루어졌다.
‘들을 문(聞)’의 갑골문 형태는 생뚱맞게도 한 사람이 두 손을 모으고 꿇어앉아 뭔가 듣고 있는 형태이다. ‘듣는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귀를 크게 그려 놓았었다. 그런데 소전에 와서는 ‘귀 이(耳)’만 그대로 두고, ‘문 문(門)’ 자를 얹은 지금의 형태가 나타난다. 이로써 /문/이라는 발음도 살리고,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다’라는 의미도 살리게 된다. 청문(聽聞)에서 청(聽, listen)과 문(聞, hear)의 의미 차이는 영어로 이해하면 쉽게 구별이 된다.
가뜩이나 민생이 어려운데, 함성과 횃불 집회를 위기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 ‘위기’는 ‘위대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노자가 듣기에는 그 정도 함성이야 개울물 속의 물고기 꼬리 치는 소리 정도로 여길는지도 모른다. 그는 ‘대음희성(大音希聲)’ 곧, ‘큰 음은 소리가 희미하다’라고 했다. 빛으로 나가면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춘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지 않았는가. 누가복음 8장 17절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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