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10 - 먹빛 피부, 핏빛 인생, 알리여 안녕!


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10

먹빛 피부, 핏빛 인생, 알리여 안녕!

 

한 인간의 치열한 삶은 본인에게는 아픔이지만 남에겐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감동은 선한 죽음으로 극대화된다.

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평화를 주는 게 아니라 시련을 주는가 보다. 어쩌면 시련이란 이를 극복할만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시련은 인간을 단단하게 만들지만, 평화는 장군을 질식하게 한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임진왜란이 기회였고, 넬슨 제독에게는 트래펄가 해전이 선물이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불세출의 미국의 천재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지난 3, 향년 74세를 일기(一期)로 멀고 긴 하늘 여행길에 올랐다. 전설이 된 복서 알리의 장례식은 10일 그의 고향인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치러졌다. 고인의 뜻에 따라 이슬람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종교, 인종, 성별을 따지지 않고 공개행사로 열렸다. 32년간 병마와 싸우다 하늘의 부름을 받은 알리를 추모하기 위해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정치가,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을 비롯한 유명 스포츠인,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던 아널드 슈워제네거를 비롯한 유명 배우 등 14,000여 명이 참석했고 노제에는 10만여 명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종교를 초월하고 국적조차 극복하고자 했던 복서 알리는 여성들도 다 알리라. 알리가 알리는 메시지는 먹빛 피부를 깨닫는 순간 삶은 치열했고, 투쟁의 핏빛 인생 뒤에 오는 아픔은 너무나 길었다.’라는 것이다. 인종 차별에서 오는 울분은 주먹과 독설로 삼키고 그것도 모자라 알리는 결국 알라신을 찾게 된다. 그리고 병은 길었고 죽음은 빨리 왔다. 그 엄청난 영욕과 갈등 속에 이어진 인생 후반부의 아픔을 그 누가 알리.

이제 하늘 복서가 된 알리. 미국 최초의 먹빛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백악관 성명에서 알리는 링 위에서는 투사였고, 마이크 앞에서는 훌륭한 시인이었으며, 옳은 일을 위해 싸운 인물로 평가했다. 그리고 마틴 루터 킹 목사,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함께 흑인 인권운동을 위해서도 기여한 바가 크다라고 회고하였다.

뜬금없는 얘기, 하나다. 붓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종이[], [], [], 벼루[]의 문방사우(文房四友)가 필요하다. 글 쓰는 일은 고독한 작업이기 때문에 모두 물건이지만 인격화하여 문방사우라 부른다. 옛날에는 이를 통하여 명예도 쌓고 실리를 챙길 수 있었기에 문방사보(文房四寶)라 칭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우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제자들에게 물어보면 붓 또는 종이를 든다. 틀렸다. 먹이 가장 중요하다. 벼루는 먹이 빛을 낼 수 있도록 먹을 갈기 위해 존재하고, 붓은 먹을 옮기는 도구이며, 종이는 먹을 안고 빛을 내는 먹빛 창고일 뿐이다. 붓털과 종이가 흰빛이라고 더 좋아해서는 안 된다. 비록 검지만 먹빛은 영원하다.

인류의 고향은 아프리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고향 사람들의 피부가 검다는 사실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먹빛 아프리카 사람들은 온 인류의 종손(宗孫)이다. 비유하자면 인조 보석이 아닌 자연산 흑진주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지구온난화가 뭔지 모르지만 이를 막기 위해 난개발을 하거나 화석연료를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 강 유역의 숲을 지키는 종족이나 남태평양의 마오리족 등은 모두 양식(養殖) 인간도 양식(洋式) 인간도 아닌 순수 자연산(自然産) 인간이다. 못사는 미개한 민족이 아니라 폭식을 거부한 청정한 인간이다.

천재 복서 알리는 1942년 미국 켄터키에서 자연산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살던 곳은 인종차별이 특히 심한 곳으로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는 늘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생각했으며, 이것이 자존심 강한 알리를 만들었다.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위대함을 알기 전부터 이 말을 했다.”

12세에 권투를 시작한 그는 1960년 미국 대표로 로마 올림픽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한다. “내가 인식할 수 있고 내 마음이 믿는다면 나는 그걸 달성할 수 있다.” 알리는 미국의 영웅이 된 줄 알았다. 그러나 금메달로 국위를 선양했음에도 동네 햄버거 가게에서 인종차별로 쫓겨나는 일을 겪는다. 이에 울분을 느낀 알리는 즉시 오하이오 강에 달려가 금메달을 미련 없이 던져버린다. “강물은 흑백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돌아와 프로 복서로서의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간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것을 포기할 때 당신은 패배한 것이다.”

이때 그는 이슬람교에 입교하고 노예 이름인 케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를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찬양받는 사람, Muhammad Ali)’로 개명하기에 이른다. 알리는 뛰어난 반사신경과 예리한 공격기술에다, 상대를 자극하고 대중을 열광하게 하는 뛰어난 언변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드디어 1964년 첫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고는 미국의 대표라는 환상을 깨고 세계의 최고 복서로 재탄생한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때릴 수는 없다. (Float like a butterfly, string like a bee, You can't hit what your eyes don't see)”라는 말은 그의 평생 좌우명이었다.

하지만 시련은 이어졌다.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했다.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였다. “베트콩은 나를 검둥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총을 들이댈 이유가 없다.” 이 명쾌한 신념이 반전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챔피언 타이틀을 박탈당하고 36개월간 링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 나이가 생명인 선수에게 이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불가능, 그것은 나약한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하다.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불가능, 그것은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역경을 뚫고 마침내 그는 통산전적 6156537KO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세 번이나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유일한 복싱 영웅이 된다. 그러나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라 했던가. 1981년 그는 마침내 은퇴선언을 한다.

운명의 장난인가 숙명의 굴레인가. 행복도 잠시 은퇴 3년 만에 그는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무려 32년 동안 병마와 싸우게 된다. 201412월에는 폐렴, 이듬해 1월에는 요로 감염 등 각종 질병으로 편치 않은 삶을 살게 된다.

나비와 벌을 닮은 그도 서서히 변해갔다. 말이 점점 느려지고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표정마저도 사라져 갔다. 선수 시절의 뇌 충격 탓인가. 어쩌다 아픈 그가 행사장에 나타나면 넥타이부대는 어김없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장례식장에서도 그랬다. 이제 더는 정치적인 눈치 박수가 아니라 먹빛 피부에 핏빛 인생을 살다 간 전설의 복서 알리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박수이길 바란다.

이 세상의 자리를 비우고 떠나는 그에게, 나는 그의 어록을 적어 만장을 대신하고자 한다. 평등과 자유를 위해 두 주먹 불끈 쥐었던 알리여, 이젠 투쟁 없는 안식의 세계로 잘 가소. 먹을 갈 때는 아리랑인지 알리랑인지 구분되지 않는 노래가 머뭇거리더니, 그의 야멸찬 명언을 마주하는 순간 붓끝에서는 먹물이 눈물 되어 흐르고 코끝에서는 그의 고향 민요 켄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이 터져 나온다.

 

켄터키 옛집에 햇빛 비치어 여름날 검둥이 시절

저 새는 긴 날을 노래 부를 때 옥수수는 벌써 익었다.

마루를 구르며 노는 어린 것 세상을 모르고 노나.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리니 잘 쉬어라 켄터키 옛집.

잘 쉬어라 쉬어, 울지 말고 쉬어.

그리운 저 켄터키 옛집 위하여 머나먼 집 노래를 부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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