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으라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으라

 

得樹攀枝未足奇(득수반지미족기)

懸崖撒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

水寒夜冷魚難覓(수한야냉어난멱)

留得空船載月歸(유득공선재월귀)

 

가지 잡고 나무에 오름은 족히 기이한 일이 아니고

낭떠러지에서 손을 놓아버릴 수 있어야 대장부니라.

물은 차고 밤은 냉랭하여 물고기를 찾기 어려운데

머뭇거리다 빈 배에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누나.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나오는 선시(禪詩)이다. 이 시의 키워드는 현애살수(懸崖撒手)’이다. 나를 버리라는 말이렷다. 활연대오(豁然大悟)를 위한 마지막 일갈이다. 깨달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 때문에 깨달을 오()’ 자에는 나 오()’ 자가 들어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시방세계현전신(十方世界現全身)’이라는 선가의 화두와 상통한다. 백 척의 장대 위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온 세상의 모습이 전신에 나타난다는 의미로 사뭇 비장한 결단을 재촉하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이 선시를 읽으면 이순신 장군의 좌우명인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이란 경구가 떠오른다.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꼭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전투에 임하는 병사들에게 결연한 자세를 촉구하는 엄명이다.

나뭇가지나 낭떠러지는 카오스 상태의 진공(眞空), 장부와 달빛은 묘유(妙有)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선재월(空船載月)’의 경계는 동요 속에 나오는 은하수를 떠가는 하얀 쪽배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삼라만상 하나하나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진여(眞如)의 존귀한 존재이다.

강을 버려야 바다를 얻듯이, 나를 버려야 모든 걸 얻을 수 있으리라. 버릴까 말까 할 때는 버리고, 행할까 말까 할 때는 행해야 한다. 어쩌면 오체투지(五體投地)도 나를 버리는 연습으로 보인다. 여기서 오체(五體)는 오체(吾體)이기도 하다.

 

빙해설소(氷解雪消)의 봄이 왔다. 자연은 겨우내 모든 걸 버렸기에 화려한 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몸은 겨울 내내 춥다는 핑계로 모으고 쌓고 덮기만 했으니, 어쩔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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