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춘기(春氣)를 어쩔거나

세계일보 칼럼- 문자로 보는 세상 18

춘기(春氣)를 어쩔거나

 

지천으로 핀 꽃이며 새싹이며 정녕 볼 게 많은 봄이로구나. 이 꽃이 지면 열매 여는 여름이 올 터이고, 그 열매 거두고 깎는 가을이 지나면, 찬바람 눈보라에 지내기 겨운 겨울이 올지니…….

계절의 변화는 순환인가 수난인가?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로 보면 순환의 즐거움이지만, 적응의 어려움으로 보면 수난이라 할 수 있겠다. 나같이 건강하지 못한 자에게는 한 계절에 적응할 만하면 어느덧 다른 계절로 바뀌니 이에 대비할 기초 체력도 부족하고 마음의 여유도 없다. 특히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하고 기온의 일교차가 심한 나라에서는 과일과 단풍의 빛깔은 고울지라도 인간이 날씨 변화에 적응하며 무덤덤하게 살아가기에는 쉽지 않은 노릇이다.

인간과 기계의 두뇌전쟁, 멈추지 않는 폭탄테러 속에서도 봄은 오는가 보다. 땅속 풀싹은 기지개를 켜며 바깥세상을 향해 머리를 내밀고, 수목은 실눈을 뜨고 햇살의 세기와 햇볕의 다사로움을 저울질하고 있다. 산 너머 남촌으로부터 불어오는 샛바람이 꽃향기를 안고 몰려온다. 도시에서는 행인의 가벼운 옷자락과 밝은 표정에서, 시골에서는 하루하루 달라지는 산야의 빛깔과 화사한 꽃 잔치에서 봄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잊었을 때도 영락없이 오는가 보다.

우리말 이라는 말은 촉각, 청각, 후각, 미각보다 시각에서 온 말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보다의 명사형인 과 계절로서의 의 어원이 같으리라는 생각이다.

이라고 할 때의 첫소리 은 모양으로나 소리로나 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은 입술소리로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내는 소리이다. 기도와 식도가 비로소 열리고 다물었던 입술을 떼면서 나오는 소리가 이다. /엄마, 맘마/에서 출발하여 /, , , 마음/ 등의 원초적이고 귀중한 단어가 모두 에서 출발한다.

, , , 등이 모두 입술소리인데, ‘의 양쪽 끝에서 봉긋 솟아 나온 두 싹의 이미지가 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둘은 많을 다(), 풀 초()’ 자처럼 많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더구나 봄 싹은 처럼 빠르게, ‘처럼 사방으로 퍼진다는 사실이 감동을 준다.

과 관련한 단어로 보다, , , , 보리, , 밟다, 보리밥, 방귀, 방긋, 바깥, 바람, 벌판, 보들보들, 보슬비, 보드랍다, 반하다, 버드나무, 벚나무, 뿌리, 뻗다, 삘기, , 푸르다등은 모두 입술소리로 시작한다.

볼 게 많은 봄에 자연만 볼 것인가?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국민은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학자는 책을 보고, 농부는 씨앗을 보며, 과학자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을 보고, 선거를 앞둔 국회의원 후보자는 국민의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주변 환경을,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잘 살펴봐야 한다. ‘보다는 말 속에는 눈으로 보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우리는 일도 보고, 신문도 보고, 시장도 보고, 맛도 보고, 손해도 보고, 술상도 보고, 흉도 보고, 사주도 보고, 대소변까지도 본다.

 

봄이 주는 미덕은 아무래도 일이다. 일어나면 일을 하고, 일을 놓으면 놀게 된다. 경칩과 춘분의 3월이 봄의 문을 열어 주었다면 청명과 곡우의 4월은 봄의 일을 제공한다. 꿈이 있는 자에게는 봄이면 희망의 문이 활짝 열리고 부지런한 자에게는 봄이면 해야 할 일이 많은 법이다. 조선업 등 우리 경제에 빨간 불이 켜진 이 때, 원초적 노동을 위한 명심보감 한 구절 읊어 볼까. ‘春若不耕(춘약불경)이면 秋無所望(추무소망)이라.’ 봄에 갈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저마다의 본색을 보드랍게 보여주는 봄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런 때 만물이 자신의 꼴을 일으킨다 하여 꼴림이라 했다. 어떤 일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외적 조건(optimization)과 최적화된 신체 상태(fitness), 그리고 심적인 동기부여(motivation)까지 갖추어졌을 때 진정한 꼴림이 일어날 수 있다. 나의 경우, 붓꼴림이 없으면 붓을 잡지 않는다. 봄은 꼴림의 계절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제 꼴을 불러일으키기에 여념이 없다. 새와 짐승은 물론 산천초목조차도 체면 없이 제 꼴을 찾아 본성을 드러내기에 여념이 없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장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아들러의 말을 빌리면 이런 때에는 미움 받을 용기를 갖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내가 남의 기대까지 충족시키며 살아갈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왜냐하면 다른 사람 역시 나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활절 지나고 청명, 한식이면 봄을 타기 시작한다. 춘기(春氣)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친다는 말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싱숭생숭한 기분이 심신을 들뜨게 한다. “수풀에서 우는 새는 춘기를 못내 겨워 소리마다 교태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니 흥()이야 다를 소냐.” 정극인의 상춘곡(賞春曲)에 나오는 구절이다. 춘기에 불을 붙여 활기를 찾아야지, 지나친 춘기 때문에 생기를 잃으면 곤란하다. 하지만 주의 하나. 지나치게 봄을 타면 입맛을 잃고 몸이 허약해지기 십상이다. ‘봄 조개 가을 낙지라 하지 않았는가. 오늘 저녁엔 조개구이에 막걸리 한잔을 때려야지…….

? 그런데 왜 졸음이 오지? 미몽(美夢)을 꾸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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