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明天地(광명천지)
頓忘一夜過(돈망일야과)
時空何所有(시공하소유)
開門花笑來(개문화소래)
光明滿天地(광명만천지)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이 어디에 있는가.
문 열자 꽃은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온 천지에 가득하여라.
정초에 해인사 향적(香寂) 주지 스님께 세배를 드리러 갔다. 스님께서는 일찍이 1985년에 본지 <해인(海印)>을 창간하고 초대 편집장도 역임하셨다. 쏟아지는 귀한 덕담을 몰록 메모하고 싶었지만 기록할 겨를이 없었다. 말씀 중에 스님께서는 <선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라는 비교적 긴 제목의 시집 한 권을 몰록 선물로 내놓으셨다. 직접 해설을 붙인 선시집이었다.
이 책을 여는 시가 바로 동곡(東谷) 일타(日陀) 스님(1929~1999)의 선시였다. 일타 스님께서는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해인사 주지를 역임한 바 있다.
그런데 ‘몰록[頓]’이란 첫 단어가 시선을 멈추게 한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지만 자전(字典)에서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흔히 편지 마지막에 성명 뒤에 ‘돈수(頓首)’라고 붙여 쓰는데, 머리를 숙여 땅에 대고 절을 한다는 뜻의 겸사이다. 불교에서는 돈오(頓悟)의 예에서 보듯이 ‘갑자기, 문득, 단번에’의 뜻으로 쓰인다. 돈오(頓悟)란 깊고 오묘한 교리를 듣고 단번에 깨달음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돈생(頓生), 돈사(頓死)의 의미도 미루어 알 수 있다.
‘몰록’이란 말이 어디에서 왔을까. ‘모르다’는 말이 ‘몰(沒)+알다’에서 왔듯이 몰록은 ‘몰(沒)+록(錄)’으로 ‘기록할 사이도 없이 갑자기’의 뜻이 아닐까?
1구와 2구는 깨달음을 위한 정진에 몰입하다가 보니 하룻밤이 몰록 지나갔음을 노래하고 있다. 정일집중(精一執中)의 상태에서는 시간은 물론 자신의 존재조차 깨닫지 못하는 아망오(我忘吾)의 경지이다. “시간과 공간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시공초월(時空超越)의 자득(自得)의 깨달음이다.
3구와 4구는 깨달음에서 오는 법열(法悅)을 노래하고 있다. 활연대오(豁然大悟)의 순간이다. 번뇌와 망상의 칠흑 같은 밤이 지나고 광명한 지혜의 아침을 맞이하면 꽃의 웃음소리도 들을 수 있고, 드넓은 우주도 한눈에 들어오리라.
순간 생식과 장좌불와(長坐不臥), 燃指發願(연지발원)에 일일삼천배(一日三千拜)로 기도하신 일타 스님의 전신 세포가 빛을 발하며 법신(法身)이 되었다.
수월 권상호
권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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