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8
폭염(暴炎)인가 복염(福炎)인가
인류 생존의 4대 과제는 식량, 물, 에너지, 환경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네 가지 기본 조건이 갖추어져야 먹고 마시고 자고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상호의존적 호혜관계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상호배타적 견제관계이다. 이를테면 더 많은 먹을거리 생산을 위해서는 더 많은 물과 에너지가 필요하고, 또 숲이나 초원을 들로 만들어야 하니 환경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곧 호수의 한쪽 둑에만 신경 쓴다면 다른 쪽이 무너지기 쉽다는 뜻이다. 게다가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위하여 국가 간에 경쟁논리를 도입하면 환경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게 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만약 환경오염으로 마실 물과 숨 쉴 공기가 부족하고, 기온상승으로 인간이 생활하기 힘든 지구별이 된다면 결국 인류는 공룡처럼 화석만 남기고 지구 위에서 사라지는 대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긴급재난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국민안전처에서 보낸 문자로, 서울 경기 일부 지역에 폭염(暴炎) 주의보를 내리니, 노약자는 낮 시간에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충분한 수분 섭취 등 건강에 유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직 5월이 다 가지 않았는데 서울 경기 일대가 섭씨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날씨가 며칠간 계속되고 있다. 5월 중순의 한낮 기온으로는 1932년 이후 84년 만에 가장 더웠다고 한다. 이 더위는 다음 달에도 계속되리란 소식과 함께 오늘도 맑은 가운데 뜨거운 땡볕이 내리쬐고 있다. 더구나 인도 북서부 사막지대에서는 섭씨 51도까지 올라가 기상 관측 사상 최고를 기록했으며 이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최소 300명이 넘는다는 소식이다.
절기로 보면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된다는 소만(小滿)이고, 이때는 햇볕이 풍부해야 만물이 생장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뭔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일시적인 캐나다의 대형 산불 탓인가, 본격적인 지구온난화 영향인가.
언어유희 같지만, 음력으로 사월(四月)은 사월(巳月)이고, 오월(五月)은 오월(午月)이다. 지금은 음력으로 사월 중순임에도 오월처럼 뜨겁다. 오월(午月)의 오(午)는 원래 ‘절굿공이’를 본뜬 글자이다. 이 글자가 십이지(十二支)의 하나로 쓰이자 본뜻을 살리기 위해 만든 글자가 ‘공이 저(杵)’이다. 하루 중에는 오시(午時), 곧 정오(正午)의 햇볕이, 연중에는 오월(午月)의 햇볕이 가장 따갑다. 햇볕이 머리 위에서 절구질하듯이 내리찍으면 따가움을 넘어 현기증에 쓰러지기도 한다. 강한 자외선과 높은 농도의 오존이 인체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 햇볕의 열 덕분에 열매가 열고 또 익으니 폭염(暴炎)이 아니라 복염(福炎)이라 부르고 싶다.
오(午) 자가 숨어있는 다른 글자의 내력을 캐보면 재미있다. 액체를 담는 그릇인 ‘장군 부(缶)’는 질그릇[凵]을 만들기 위해 공이[午]로 흙을 다지는 모양이고, ‘시웅’ 소리를 내며 시위를 시원하게 떠나는 ‘화살 시(矢)’는 공이[午]에 깃을 단 모양이다.
기후환경만큼 언어환경도 중요하다. 한 나라의 언어환경을 살펴보면 그 국민의 성숙도를 알 수 있다. 어쩌면 선진국에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은 언어환경의 숙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환경은 어떠한가. 내가 보기엔 신문, 방송에 온통 ‘사나울 폭(暴), 터질 폭(爆)’ 자투성이다. 폭염(暴炎)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가격의 ‘폭등, 폭락’에, 날씨에는 ‘폭풍, 폭우’가 있고, 개인의 ‘폭음, 폭식’에, 권력자에겐 ‘폭정, 폭압’이 있고, 조직폭력배에겐 ‘무차별 폭행, 폭언, 성폭행’ 등도 있다. 이 외에도 치안과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동, 폭리, 폭주족, 난폭운전’ 등을 폭로해 보니 과연 우리는 ‘폭(暴)’ 자 지뢰밭에서 살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아니 폭 자에 ‘폭’ 파묻힐 지경이다. 이러다가 인류 문명이 하루아침에 ‘폭삭’ 주저앉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이왕 내친김에 폭언을 더 해 볼까나. ‘사나울 폭(暴)’보다 더 무서운 글자가 ‘터질 폭(爆)’이 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KAL기 폭파, 천안함 폭침’에다 북한의 ‘핵폭탄’ 위협, 먼 나라의 일이긴 하나 ‘IS 폭격, 공항 폭발, 자폭테러’에다 끔찍한 ‘원폭 피해, 폭탄 테러’까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그 뿐인가. 칠곡의 미군 부대 ‘가스 폭발’처럼 사고에만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야구에서는 ‘폭투’, 방송에서는 ‘폭소클럽, 폭소 대작전’, 게다가 광고에서는 ‘남심(男心) 폭격’과 같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의미의 심리적인 용어에도 폭(爆) 자가 태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걸 보면, 호전적 문자는 그 폭발력도 원폭 급이다.
‘폭(暴)’ 자의 본래 모습은 평화로웠다. 전서에 보면 ‘해 일(日)’, ‘날 출(出)’, ‘두 손 공(廾)’과 ‘쌀 미(米)’의 합자였다. 여기에서 ‘해가 나오면 두 손으로 알곡을 퍼내어 말리다’가 본뜻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사납다’의 의미로 쓰이자 본뜻을 살리기 위하여 ‘말릴 폭(曝)’ 자를 다시 만든 것이다. 폭(暴) 자의 지금 모습을 보면 한 번 더 놀라게 된다. 얼마나 뜨거웠으면 글자 밑에 ‘물 수(氺)’ 자를 슬쩍 집어넣었을까. 이 글자의 발음도 처음에는 ‘포’로서 ‘포악(暴惡)한 행동’의 예에서 보듯이 ‘폭’만큼 난폭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글자의 발음은 그 의미와 상통한다. ‘폭’이라는 발음은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를 일단 막았다가 터뜨리면서 내는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