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문화기획- 문자로 보는 세상 9
예술에 웃고 야술에 울다
5월의 대한민국 예술계는 희비의 쌍곡선을 그었다. 문학은 웃고 미술은 울었다. ‘웃음’이든 ‘울음’이든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 공교롭다.
신의 창조물이 자연이라면 인간의 창조물은 예술이 아니던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신과 인간, 자연과 예술에 대한 인식과 관계 설정에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처지에서 바라볼 때, 신은 삶의 지표요, 자연은 삶의 터전이며, 예술은 삶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삶의 과정이 진실하면 아름답지만, 진실을 잃으면 추하다.
예술은 우리의 지친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오염된 영혼을 씻어주는 해독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근래의 우울한 경제 지표와 경색되어가는 남북 관계 속에서도 그나마 희망의 싹에 물을 뿌려주는 것은 한류 예술문화의 새바람이었다.
10여 년 전 <겨울연가>와 <대장금>과 같은 TV 드라마에서 출발한 장엄한 한류가 케이팝(K-Pop)이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를 거쳐 이제는 클래식, 문학, 발레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10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폴란드 쇼팽 피아노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지난달 16일에는 소설가 한강이 영국 런던에서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로 한국인 최초의 ‘맨 부커 국제상(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을 받고, 그다음 날 발레리노 김기민은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춤의 영예)’라는 최고남성무용수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를 가지고도 상대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했던 문학에서의 수상 소식에 기립박수를 보낸다.
맨 부커상은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로 영어권에서는 최고 권위의 상으로 꼽힌다. 부커 그룹이 주최하고, 맨 그룹이 후원하는 본 상의 대상은 영국에서 출판된 영어 소설 작품이다. 1969년 첫 시상이래. 2005년부터는 맨 부커 국제상이 추가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번에 한강이 받은 맨 부커 국제상은 영국의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Deborah Smith)와 함께 받았다. 소설가 한강이 문학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데는 번역가의 공도 컸다. 데보라 스미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할 무렵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는데, 마침 영국에 한국어를 전문으로 하는 번역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가 한국어를 독학으로 익히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한글을 터득했다는 사실이 사뭇 놀랍기만 하다. 이로써 ‘한글은 배우기 쉬운 과학적 언어’라는 실증적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세종대왕의 미소가 느껴진다.
그녀는 한국어가 블루오션이란 사실을 깨닫고 2010년 런던대학교 한국학 석사과정에 입학하고, 이후 2015년 런던 대학교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과정 중이었던 2012년에 출판사로부터 <채식주의자>를 건네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다음 해에 번역을 완성하고 이어 출판하기에 이른다. 이후 번역본 <The Vegetarian>은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가디언 등 유력 일간지로부터 ‘한국 현대문학 중 가장 특별한 경험’, ‘감성적 문체에 숨이 막힌다’ 등의 표제로 호평을 받는다.
2015년 4월 상 선정위원회가 <The Vegetarian>을 국제상 최종 후보에 올렸을 때는 그녀가 한글을 배운 지 6년이 되는 된 시점이었다. 현재 28살의 데보라 스미스가 7년 전만 해도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학생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의 언어적 재능을 인정하더라도 한글이 대단히 쉬운 언어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판소리에서 고수의 장단과 추임새가 소리를 살리듯이, 훌륭한 번역가는 한국문학을 살려준다. 음악과 무용에는 재해석이 있을 뿐이지만 문학은 반드시 번역 과정을 거쳐야 세계화를 기대할 수 있다. 번역은 문학의 재창조이다. 따라서 '문학 한류'는 훌륭한 번역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문학과 무용계의 축제 분위기와 달리 미술계에서는 대중가수 조영남의 ‘대작 논란’으로 화가, 화랑, 소장자 모두 내홍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화투 그림을 대신 그렸다고 폭로한 송기창 외에 다른 화가 두세 명도 조 씨의 그림을 대신 그려준 사실이 추가로 드러남으로써 가뜩이나 활기를 잃고 있던 미술계가 더욱 술렁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28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2016 쎄시봉 친구들 콘서트’에서 조 씨는 “어른들이 화투를 가지고 놀면 안 된다고 했는데, 너무 오래 가지고 놀다가 쫄딱 망했다.”라고 하면서 현 상황을 코믹하게 풀이했다. 코치 밑에 선수가 있듯이 화가 밑에는 대필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항상 문제가 되는 건 대필이 아니라 작가의 진정성(眞情性)이다. 진정성은 양심에서 우러나는 법인데 그것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진정성에도 천적이 있다. 돈이다.
어쩌면 백남준의 ‘예술은 사기’라는 멘트를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겠지만, 내 생각에는 예술세계는 전혀 현실이 아닌 창조된 세계라는 뜻으로 내뱉은 화두로 생각된다. 곧 창조에 대한 역설이라고 본다. 칸트가 말한 “미(美)에는 객관적 논리가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학창시절에는 기타를 치며 ‘딜라일라’를 따라 부르느라 바빴고,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제비’와 ‘화개장터’를 즐겨 부르는데…. 포크송 가수에서 크로스오버 가수로, 청년문화운동을 일으킨 주역으로, 바닥을 치며 쓰러질 듯 파안대소하던 소탈한 그의 모습에 포장된 진정성이 숨어있었다는 말인가. 러시아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은 “진실한 말 한마디가 전 세계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진실의 가치는 영원하다. 진실하지 않으면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움이 없으면 예술이 아니다.
그래도 한류는 흐른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한류도 그렇게 흐른다. 문제는 높은 곳에 흘려보낼 물이 없으면 건천이 되고 만다. 따라서 한류를 줄곧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문화의 물을 자아올리든가 예술의 단비를 쏟아부어야 한다.
일본 응신왕의 초빙으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태자의 스승이 된 백제의 왕인 박사는 한류스타의 원조다.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한 조선 도공이나 통신사는 한류의 선배다. 그렇다면 SNS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문화로 무장해야 한다. 한류 문화는 칼날 없는 무기이다. 문화무기는 국력이나 인구수, 경제 수준과 무관하므로 잘만 무장하면 칼 한 자루 없이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대필(代筆) 대신에 대필(大筆)을 잡자. 올여름에는 한류 열풍을 일으키며 문화 대장정에 나서자. 한류 열풍은 지구온난화와 무관하다. 한류(韓流)를 넘어 한해(韓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