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청년 석천(石泉) 선생님
고령(高靈) 후인(候人) 석천(石泉) 신희재(申熙宰) 선생님께서는 1927년 정묘(丁卯)생이시니 금년으로 여든아홉의 고령(高齡)이시지만 마음은 여전히 온유(溫柔)한 청년(靑年)이시다. 일제 중엽에 태어나시어 19세에 해방을 맞이하시고 24세에 6·25를 겪으셨으니 누구보다 뼈아픈 역사의 질곡(桎梏) 속에서 인고(忍苦)의 젊음을 보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위대한 대한민국의 성장과 더불어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시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마디로 석천(石泉)선생님께서는 시련(試鍊)을 단련(鍛鍊)의 기회로 생각하고 난관(難關)을 기꺼이 초극(超克)해 나가는 것을 인생철학으로 실천해 오신 의연한 선비이시다.
위기 때마다 아픔을 의연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위로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인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선조에 대한 숭조(崇祖) 의식과, 가까이는 어린 시절 조부와 엄친의 가르침 덕분이라 생각한다. 조부님으로부터는 경서(經書)를 공부하고 엄부자모(嚴父慈母)로부터는 겸손과 성실을 배웠다. 어릴 때 천자문을 외우지 못해 목침 위에 올라가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으면서 공부하고, 종이를 아끼기 위해 흑판에 맹물로 붓글씨를 연습했던 추억담을 꺼내놓으시는 걸 보면, 오늘의 한국서가협회 초대작가라는 프로필과 평생직장이었던 KT&G의 사내 클럽인 동우서회(同友書會) 회장이라는 명함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선생님께서는 고령(高齡)임에도 아호 석천(石泉)의 뜻이 말해주는 것처럼, 배움에 대한 의지는 돌처럼 굳건하고, 생각과 말씀은 샘물처럼 맑으시어서 언제나 청신(淸新)하고 단아(端雅)한 작품을 일궈내신다.
석천 선생님은 복을 받는 분이 아니라 복을 짓는 분이시다. 선생님의 부지런하심과 겸손에는 아무도 당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학문과 서예에 대한 열정은 영원한 청년이시다.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은 서울 노원구에서 서예 활동을 함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나의 나이를 탓하지 않으시고 서예의 도반(道伴)으로서 나를 챙겨주셨으며, 변하지 않는 먹빛처럼 오늘날까지 망년지우(忘年之友)로 서로 가까이 지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서문집(書文集)을 발간하시겠다며 나를 찾아 오셨다. 연만(年晩)하심에도 불구하고 일궈내신 대단한 작업량에 놀라고, 며칠에 걸쳐 작품을 다 읽고 나서는 선생의 예술적 업적에 감동했다. ‘말글 따로 언행 따로’인 사람이 많은 세상에, 선생의 서예집(書藝集)은 자신을 꼭 빼닮은 언서행(言書行) 삼위일체(三位一體)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천자문(千字文)과 명심보감(明心寶鑑)에서부터 당시(唐詩)와 채근담(菜根譚)은 물론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이르기까지 실로 풍부한 글감을 오체(五體)로 소화해 냄은 물론, 나이를 잊어버린 청년 정신으로 한글과 사군자(四君子) 및 도서(陶書)는 물론 숭조(崇祖) 고령신씨(高靈申氏) 선조의 문집(文集)에 이르기까지 천착(穿鑿)하고 계셨다. 풍부한 내용을 다양한 서체로 창조해 내신 많은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나, 감히 나의 소견으로 말한다면, 다양한 서체 중에 행초(行草)가 각별히 뛰어나서 일가(一家)를 이루셨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글보다 사람이 앞선다고 생각한다. 석천(石泉) 선생님께서는 한 마디로 세속적인 성공보다 가치 있는 삶을 더 중시하신다. 입보다 귀를 더 소중히 여기시어 후학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말씀보다 듣는 데에 열중하시며 웃음을 잃지 않으신다. 후배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으시며 귀감이 되어 주시는 석천(石泉) 선생님, 더욱 강건하시고 좋은 작품 많이 남기시길 충심으로 기원(祈願)합니다.
2015년 11월 일
문학박사 도정(塗丁) 권상호(權相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