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정동정

<국회도서관> 2015. 1, 2월호 원고 : '말맛 글맛' - '언어권력'

말맛 글멋

문자권력

권상호(문학박사, 서예가)

문화의 의미를 사전에서는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진보·향상하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 또는 그에 따른 정신적·물질적인 성과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文化(문화)’라는 한자어를 분석하면, ‘[]을 통한 인간[]의 변화[]’이다. 이로 보면 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 문자권력이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문자권력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우선 국회를 통한 문자특별법?이나 특별검사제?를 도입하여 문자권력의 뿌리인 의 밑바닥부터 조사해 봐야 한다.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가지밖에 없다. 말과 짓을 대개 언행(言行)이라 하는데 언행일치를 최고 덕목으로 삼는다. 말한 대로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직한 말과 성실한 실천이 요구된다. 예부터 인물을 뽑을 때 제시했던 신언서판(身言書判)에도 []’[]’이 들어 있는데, 이는 사람의 말글로도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음을 뜻한다.

말과 글이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말은 목구멍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나타나는 음성 기호의 집합이고, 글은 말을 적는 문자 기호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말 속에 말이 있고 글 속에 글이 있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는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고 글이라고 다 글이 아니라는 뜻과 함께 말글 안에는 무궁무진한 뜻이 담겨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인간은 말을 먼저 사용하고 글은 나중에 만들어 냈다. 처음 마주하는 사물을 일컫고, 겪은 일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만들었다.

그런데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이러한 말의 일회성· 소멸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글을 사용하기 이전에 일찍이 그림으로써 생각과 느낌을 표현했었다. 처음에는 비교적 자유롭고 직관적인 그림 그리기가 고도의 음성 상징 기호인 글자를 체계적으로 쓰기보다 수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간 발명의 최고 작품은 아마 글일 것이다. 글은 불변성과 영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하지만 말은 휘발성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일단 입 밖에 나오는 즉시 자취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어느 때 어떻게 변질할지도 모를 말을 오래 보존하고자 만든 발명품이 바로 글이다. 급기야 글로 쓰기조차 귀찮아서 녹음기와 음성 인식기까지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인간의 창조적 본능에는 끝이 없나 보다.

흔히 말하기는 쉬워도 글쓰기는 어렵다고들 한다. 쉬우면 잘못을 저지르기 쉽고, 어려우면 피하기에 십상이다. 말하기는 쉽지만 아껴가며 말하고 글쓰기는 어렵지만 되도록 많이 쓰라는 말씀이다. 모든 성공한 이들은 한결같이 적는 일에 골똘했단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적자생존론?’이 여기에서 탄생한다. 옳거니.

말과 글은 공기와 물과 같다. 공기나 물은 흔하지만 오염되면 우리는 금세 죽게 된다. 살기 위해서는 공기를 호흡하고 물을 마셔야 하듯이, 피할 수 없는 말과 글이라면 맑고 깨끗하게 사용하자. 그리고 평생 사용할 말과 글이라면 즐겁게 배우고 행복하게 사용하도록 하자. 이따금 말글의 바다인 도서관에 풍덩 빠져 보는 건 어떨까. 마을 도서관은 영혼의 수영장이다.

그리고 맛있게하고, ‘멋있게써야 한다. 맛있는 말은 명곡과 같고, 멋있는 글은 명화와 같다. 말에 맛이 없으면 귀가 더러워지고, 글에 멋이 없으면 눈이 피곤해 진다.

인간이라면 아무도 말과 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말을 못하면 벙어리로, 글을 모르면 문맹자로 취급된다. 말과 글을 모르면 서로 간에 진정한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사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미개인으로 낙인찍힌다. 미개인은 언제나 문명인의 부림을 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남으로부터 부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가 글을 익히고 책을 읽어야 한다.

한편 글은 민주주의와 상관관계가 높다. 글을 모르면 전제주의나 독제주의에 빠지게 되고, 온 국민이 글을 잘 사용하여 문맹자가 없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따지고 보면 글이 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소수의 권력자가 권력 유지 수단으로 말글을 악용해 왔다. 새로 권력을 잡은 자는 글을 만들어 소통불가 명목으로 이민족을 지배하거나 백성 위에 군림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문자권력이다.

갑골문은 제사와 수렵을 맡은 제왕의 문자권력이었다. 제왕을 비롯한 소수 특권층만이 사용한 문자였다. 백성들은 배울 수도 없었고, 또 알아서도 안 되는 금기의 글이었다.

진시황은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이사를 시켜 새로운 글자 소전(小篆)을 만들어 권력을 휘두르며 분서갱유로 잡음을 없앴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은 중국을 정복하고 파스파 문자를 만들어 자존심을 살렸고,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는 몽골문자를 개량한 만주문자를 만들어 문자권력을 휘둘렀다.

훈민정음 서문을 보면 세종대왕은 백성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창제한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문자권력의 누수를 염려한 최만리의 반대 상소는 당연한 처사였다. 다행히? 한글 아닌 한문으로 과거가 치러짐으로 그들의 권력은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사용된 이두(吏讀)벼슬아치 리()’자로 볼 때 아전들의 문자권력이었다. 고려 광종 때(958)부터 갑오개혁 때(1894)까지 실시해 온 과거제도 시기는 한문이 절대적 권력이었다. 양반은 문자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려운 한문도 초서로 갈겨써야 했다. 일제 치하에는 일본어가, 해방 후 지금까지는 영어가 지존의 문자권력이다. 그들은 도장 글씨도 사인도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고불구불 삐뚤빼뚤하게 써야 했다.

법률, 의학, 행정 용어 등은 아직도 그들만의 문자권력으로 버젓이 남아 있다. 감히 네깟 놈이 이 신성한 병명과 약명을 감히 알려고 하다니! 전문 직업인일수록 문자권력을 심하게 부린다. 흔히 언론을 가리켜 제4의 권력이라고 하나 내가 보기엔 입법·사법·행정 권력보다 언론 권력이 더 높아 보인다. 조폭 권력도 무섭지만 결정적 흠은 문자에 약하다는 점이다.

민간 신앙에서 재앙을 막고 악귀를 쫓기 위해 사용하는 부적이란 게 있다. 누구나 읽고 해석할 수 있으면 부적의 효력은 사라지고 만다.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부적은 힘이 있다.

오늘 밤에는 부적 둘을 만들어 하나는 몸에 지니고 다른 하나는 문 위에 붙여두어야겠다. 그러면 세월호 물귀신, 의정부 불귀신이 썩 물러나고 건강과 재물이 많이 들어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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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서예 원본 찾기
http://www.9610.com/qinhan/scb.htm

투우사의 노래 - 오페라 카르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