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서체 명칭 제안서
권상호(문학박사, 칼럼니스트, 서예가)
한글 서체 명칭은 한글이 쉽듯이 쉽게 정해야 한다. 한글은 척 보면 알 수 있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한자 서체도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의 5체로 뚜렷이 나누고 있는데, 한글 서체 명칭이 이보다 더 어려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안자의 소신이다.
물론 한글 창제 이후 500여 년간 한자 권력에 눌려서 한글에 대한 명칭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해방 후부터 본격적인 한글 서예가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서체 명칭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 결과 지금까지 백가쟁명(百家爭鳴) 식으로 40여 가지의 명칭이 난립해 있었던 게 사실이다. 물론 오랜 세월이 지나면 저절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의 과정을 거치면서 통폐합 되겠지만 나날이 높아가는 한글 위상과 이에 걸맞은 한글 서예교육 및 한글 서예사를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한글 서체 명칭은 통일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국어국문학 전공을 바탕으로 하고, 50여 년간 붓을 잡아 온 서예가로서 감히 간단명료한 3분류안을 제시해 본다.
⑴ 고전체(古篆體) :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제자원리를 풀이하면서 ‘자방고전(字倣古篆- 한글의 글자체는 고전을 본받는다)’이라고 한 데에서 따온 명칭이다. 기존의 ‘판본체, 정음고체, 훈민정음 해례본체, 곧은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명칭에 뚜렷한 근거가 있고, 부르기 쉽지 않은가?
⑵ 정자체(正字體) : 한자와 어울리고, 활자로 새기기에도 비교적 쉬우며, 무엇보다 실생활에서 읽고 쓰기에 편리한 서체로 기존의 ‘조화체, 효빈체, 민체, 훈민정음 언해본체, 궁체 정자, 바른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⑶ 흘림체 : 여기에는 궁체 중의 ‘반흘림, 진흘림’ 등이 포함됨은 물론이고, 궁체 외에도 ‘훈민정음 언해본’ 형태의 글씨를 흘려 쓴 듯한 양반들의 한글 서간도 여기에 속한다. ‘추사 간찰’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문제가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서체 용어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국한문 혼용체’라는 말은 국한문 혼용이 서체가 아니라 방법이기 때문에 ‘-체’자를 붙여서는 곤란하고, 그냥 ‘국한문 혼용’이라 해야 한다.
‘궁체’도 궁중의 서사 상궁들에 의해 창작된 서체로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아 왔지만 상위 서체 분류 명칭으로는 곤란하다. 출처에 따른 하위 특징의 하나로 봐야 한다. 따라서 ‘궁체정자’니 ‘궁체흘림’과 같은 명칭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굳이 명명하려면 ‘정자체 궁서’, ‘흘림체 궁서’라고 불러야 한다.
단아한 숙종의 한글 서간 등도 그냥 정자체로 보면 된다. 그리고 양반들의 한글 서간도 따로 명명하면 곤란하다. 그냥 ‘흘림체 서간’으로 부르면 되겠다.
‘옛체’, ‘옛글씨체’ 등은 명칭 음절수가 다른 3음절 명칭에 어울리지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체’, ‘훈민정음 언해본체’ 등은 ‘해례본체’, ‘언해본체’처럼 줄여 명명하더라도 무슨 뜻일까 하고 한참 고민해야 할 정도로 너무 어렵다.
‘정자체’를 ‘곧은체’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굳이 이 말을 사용하려면 ‘곧음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우리말에서 ‘디딤돌, 걸림돌, 비빔밥, 다람쥐, 흘림체’ 등과 같이 ‘-ㅁ’이 관형사형의 역할을 하는 용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곧음체’를 주장했을 때 ‘ㆆ, ㅎ, ㅇ, ㆁ’ 등의 자음을 과연 곧다고 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발생한다.
‘정자체’를 ‘바른체’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곧은체’와 ‘바른체’의 의미 구분이 쉽지 않음에 문제가 있다. 국어사전에는 모두 ‘곧다’를 풀이하면서 ‘바르다’를 사용하고, ‘바르다’를 풀이하면서 ‘곧다’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글전서’, ‘한글해서’, ‘한글행서’ ‘한글초서’라고 부르면 편리할 듯하지만, 한글만의 특징을 살리지 못한 절름발이 명칭이다.
쉬운 한글, 편리한 한글, 과학적인 한글이다. 한글 서체 명칭도 척 보면 알 수 있듯이 쉽게 부를 수 있고, 외국인에게도 쉽게 설명할 수 있는 한글 서체 명칭이어야 하겠다.
‘고전체, 정자체, 흘림체’라.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