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라피의 정체성과 미래
도정 권상호(문학박사, 문예평론가)
글쓰기는 참으로 어렵다. 어렵기 때문에 글이 인류 역사상 가장 늦게 태어났다. 오감에서 가장 쉬운 것은 무엇일까? 보는 것이다.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어렵고, 듣는 것보다 읽는 것이 어려우며, 읽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어렵고, 말하기보다 쓰기가 어렵다. 어려운 글쓰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글쓰는 근육을 길러야 한다. 글쓰는 근육을 기르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밥 먹고 30분은 산책하고 돌아와 30분은 붓글씨를 쓰겠다는 식의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야 한다. 작심삼일과 같은 '요요현상'은 피해야 한다.
*calligraphy를 잘 하기 위한 5C
첫째, chance를 살려라. 찍고 메모하고 생각하며 쓰자.
둘째, choice를 잘해라. 스승, 글귀, 도구 등을 잘 선택하자.
셋째, challenge하라. 예술은 도전과 몰입이다.
넷째, change하라. 끝없는 변화를 도모하라.
다섯째, champion이 되라. 정상에 설 때 사방이 보인다.
1. 새로운 조형세계의 탄생
인간은 표현의 동물이다. 손으로 표현하는 일 중에 그림과 글씨가 있고,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글씨의 하나로 출발하여 디자인의 옷을 입고 그림과 더불어 미래를 향해 새 길을 펼쳐가고 있다. 흔히 슬로우 아트 전통서예에 대한 반발에서 캘리그라피가 탄생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오히려 전통서예의 모든 장점을 수용 또는 존중하면서 급변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 가는 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했다고 본다. 어쨌든 캘리그라피의 탄생은 이전의 문자 생활, 예술 활동과는 확실히 다른 새로운 조형세계를 열어주었다.
전체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변함에 따라 글씨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규정화된 서체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 개인마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묻어나는 개성적 필체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자면 서법이란 구속을 받으며 오랜 기간의 강도 높은 수련 끝에 나오는 난해한 전통서예보다, 내용을 쉽게 읽을 수 있고, 호흡도 비교적 짧으며, 순간순간의 감성이 묻어나는 시각 예술로 즐길 수 있는 캘리그라피를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더러는 컴퓨터 출현과 더불어 다양한 폰트가 나타나자 손으로 쓰는 글씨는 끝났다고 했지만, 그러한 염려는 감성 글씨 캘리그라피의 출현과 더불어 완전히 빗나갔다. 전통서예마저 캘리그라피의 확장이 새로운 자극제가 되어 현대서예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다.
AI 시대의 도래로 인간의 노동 시간은 줄어들고 대신 재미있게 놀아야 할 시간은 늘어났다. 예술 활동도 재미있게 놀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놀이뿐만 아니라 예술 활동에도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없으면 안 된다. 게임은 물론이지만 공부조차도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없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놀이 문화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유쾌한 캘리그라피는 점잖은 전통서예보다 접근하기가 쉽다. 게다가 학습 과정도 비교적 자유롭고, 주제나 소재 선택에서도 현실적이고 즉발적인 편이어서 경계가 없다. 캘리그라피는 그림과 색깔까지도 수용함은 물론 주인공으로서의 자기의 자리를 양보하기도 한다.
이제 캘리그라피는 산업, 상업 분야는 물론 일상생활의 모든 공간에서 접할 수 있는 실용적 시각 예술로 각인되었다. 실용 예술로서 많은 주목을 받다가 보니 순수예술과 전통서예의 질투와 홀대를 받기도 했다.
캘리그라피의 탄생 이후 전시장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이전의 전통서예전에서는 전, 예, 해, 행, 초서로 쓴 액자나 족자가 대종을 이루고 병풍도 한두 틀 끼어있었다. 그러나 캘리그라피 전시회에서는 병풍과 액자는 찾아보기 힘들고 패널(panel)이나 작은 족자, 또는 의상, 블라인드, 쿠션 등의 생필품이 사벽을 채우고 있다.
한편 캘리그라피의 탄생은 넓게 보면 인터넷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좁게 보면 스마트폰의 출현과 궤를 같이한다. 산업화시대를 거처 정보화시대가 오면서 기록에 의한 의사 전달 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지난 100여 년간 초서로 쓴 한문 간찰(簡札)에서 한글 편지로, 한글 편지에서 엽서(葉書)로의 변화 과정을 겪었다. 개인 컴퓨터 시대가 도래하자 손으로 쓴 종이 편지는 사라지고, 대신 키보드로 친 이메일(email, 전자 우편)이 등장했다. 20여 년 전 내 손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의 탄생으로 지금은 이메일마저 줄어들고, 대신 엄지족에 의한 키패드 문자(文字)가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이제는 음성 인식기를 통한 문자 변환도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근년에는 문자와 기호, 숫자 등을 조합하여 만든 이모티콘(emoticon), 그림만으로 감정과 의사를 전달하는 아이콘(icon)이 출현하고, 마침내는 육필(肉筆)과 그림을 조합해 주는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도 출현하여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상과 같은 문자 소통 방식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탄생한 예술 장르가 캘리그라피이다. 호흡이 긴 편지와 엽서의 관계는 전통서예와 캘리그라피의 관계와 흡사하다. 그림엽서의 출현은 캘리그라피가 배경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즘은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이 어색하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메시지도 긴 것은 읽지 않는다.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디지털화된 삶 속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손글씨를 쓰는 일은 이제 특별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디지털시대일수록 아날로그적 감성이 필요함을 깨달았나 보다. 이런 와중에 전통서예는 여전히 필묵과 법첩을 중시하면서 현대서예라는 이름으로 암중모색 중이다.
2. 캘리그라피의 개념과 명칭
‘캘리그라피(calligraphy)’가 ‘서예(書藝)’에 대한 단순한 영어 번역으로 사용되다가, ‘새로운 예술 장르’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의 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캘리그라피라 하면 좌우명이나 명언명구를 간단히 써서 벽에 붙이는 생활 서예이거나 행사 현장에서 시연하는 라이브서예 정도의 뜻으로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순수서예가 아닌 상업 서예로 상표나 광고에 쓰는 것을 캘리그라피가 아닐까 하는 다소 막연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하여 남산한옥마을에서는 참가국 32개국을 대표하여 32명의 서예가들이 모여 월드컵맞이 ‘서예한마당’(서예 퍼포먼스)을 펼치고, 예술의전당에서는 2002 동아시아 필묵정신전을 개최하였는데 말하자면 캘리그라피가 태동하는 형태의 작품들이었다. 전통서예와는 사뭇 다른 창의적인 서체에 그림을 곁들인 작품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디자이너 이상봉은 서예를 디자인에 활용하여 패션쇼를 펼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캘리그라피의 성장 동력은 TV 타이틀과 광고와 같은 영상매체를 통해서였고, 캘리그라피의 일상화는 스마트폰의 탄생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에서의 스마트폰 바람은 2009년 11월부터 불기 시작했다.
한국어판 위키백과에서는 표제어를 ‘캘리그래피’로 적고, 영어로는 ‘calligraphy’, 그리스어로는 ‘κάλλος(kallos, 아름다움) + γραφή(graphẽ, 쓰기)’의 합성어로, 손으로 그린 그림 문자라는 뜻으로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로 풀이하고 있다.
네이버사전에서는 ‘캘리그라피’를 표제어로 하고, 글씨나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로 정의하고, 좁게는 서예(書藝), 넓게는 활자 이외의 모든 서체(書體)라고 풀이하고 있다. 다음사전에서는 한 글자가 다른 ‘캘리그래피’를 표제어로 하고, 손 글씨를 이용하여 구현하는 시각 예술로 정의하고, ‘내용을 읽을 수 있으면서 일반 글씨와 달리 상징적인 의미, 글씨의 크기ㆍ모양ㆍ색상ㆍ입체감으로 미적 가치를 높인다.’라고 상술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다음사전의 정의가 가장 상세하다고 볼 수 있는데, 특징은 ‘가독성’에 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서예 관련 단어가 가장 푸대접을 받고 있다. 캘리그라피도 아직 등재되지 않은 상태이다. 위키피디아와 비슷한 성격의 사전으로, 누구든지 참여하여 함께 만드는 <우리말샘>의 풀이는 다음사전과 똑같다.
이상으로 본다면 캘리그라피는 ‘아름답게 쓰는 기술’로 예술적 측면과 기술적 측면 두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Baihu(百度)에서는 calligraphy를 书法, 书法艺术로 번역하고, Baihu百科에서는 calligraphy를 书法이나 笔迹으로 번역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캘리그라피의 개념을 인정하고 있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는 법을 중시하는 전통서예를 일러 서법(书法)이라 한다. 하지만 네이버중국어사전에 의하면 캘리그라피를 艺术字(体), 美术字(体)로 번역하고 있다. 예술이나 미술이란 말이 앞에 붙은 것으로 볼 때, 우리가 만약 서예(書藝)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에서 캘리그라피의 번역어로 书艺를 사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편 외래어 사용을 즐겨하는 일본에서는 우리처럼 원음을 살려서 カリグラフィー로 적고 있다.
다음은 용어의 표기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외래어 표기법상으로 보면 ‘컬리그러피’라고 표기해야 맞지만 영어 calligraphy와 차별화하려는 뜻에서인지 컬리그러피라고 사용하는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아나 [kəˈlɪɡrəfi]란 발음이 어려워서거나, 말맛이 ‘캘리그라피’만큼 살아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 제1장, 표기의 원칙, 제5항에 따르면 ‘이미 굳어진 외래어는 관용을 존중하되, 그 범위와 용례는 따로 정한다.’라는 항목이 있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캘리그라피’는 이제 관용에 의해 굳어진 명사로 본다. 게다가 줄임말이 일반화 되어가는 추세이다 보니 대화중에서는 간단히 ‘캘리(calli)’라고 부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표제어 표기에 따른 혼란을 줄이기 위해 이후에는 ‘캘리’로 줄여서 사용하고자 한다. 서예에 대한 동양 3국의 표기가 ‘書藝·书法·書道처럼 서로 달라서 공통분모인 ‘書’ 한 자로 줄여서 표현하자는 의견과 같은 맥락이다. 이를테면 한류에 따른 한국의 캘리는 ‘케이 캘리(K-calli)’라 명명하고자 한다.
구글 검색 결과(2021. 8. 25)에 의하면 '캘리그라피'는 약 10,800,000개, '캘리그래피'는 약 3,990,000개, '컬리그러피'는 아예 수정된 검색어 ‘캘리그라피’로 나온다. 이것이 캘리그래피를 표제어로 삼은 사전도 있기는 하지만 용어 사용에서 오는 혼동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캘리그라피로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한편 캘리그라피가 외래어이므로 손글씨, 손멋글씨, 손맛글씨, 멋글씨, 맛글씨, 감성글씨 등 순우리말로 바꾸자는 주장이 줄곧 제기되어 왔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고 부정도 없는 게 현실이다. 사실 캘리그라피라는 용어는 우리의 서예문화에 대한 고유한 정체성이 담겨있지 않고, 외래어 사용 규칙에도 어긋난 점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 현실에서는 캘리그라피보다 캘리라는 줄임말을 더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언어 대중의 관습에 의한 캘리라는 줄임말도 이젠 배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언어는 언제 어디서나 그 언어를 사용하는 대중의 몫이다. 캘리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지금부터 캘리라는 발음경제상의 줄임말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캘리와 관련하여 더불어 참고해야 할 용어들이 있다.
첫째, ‘일러스트레이션(illustration, 삽화)’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은 어떤 의미나 내용을 시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곁들이는 삽화·사진·도안 등의 총칭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캘리는 어떤 내용만을 아름답게 써서 소통하고자 하는 단순한 손글씨에서 벗어나 이제는 삽화나 사진 등을 곁들이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따라서 캘리는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공생을 위해서라도 동행해야하는 상보적 관계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캘리와 일러스트를 합친 장르 캘리일러스트(calli-illust)가 나왔다.
둘째, ‘그래픽 아트(graphic art)’이다. 그래픽 아트는 평면 위에 도형을 만드는 기술의 총칭’으로 회화·글씨·판화·인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캘리는 평면 위에 실현되기 때문에 그래픽 아트에 든다. 그렇지만 재료와 표현방법에 제한이 없는 캘리의 특성상 때로는 평면을 뛰어넘어 부조적 효과를 살리기도 한다. 그래픽 아트로서의 캘리는 조형성과 활용성 두 측면에서 끊임없는 창의적 발상이 뒤따라야 한다.
셋째,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이다. 타이포그래피는 편집 디자인에서, 활자의 서체나 글자를 새롭게 배치하고 구성하여 어떤 이미지를 표현하는 일을 뜻한다. 타이포그래피는 상품에 대하여 소비자에게 짧은 시간에 각인시키는 주요한 디자인 요소이기도 하다. 캘리는 순간적이고 즉발적인 성격이 강하여서 글자 배치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타이포그래피에서는 깊은 탐색을 통하여 완성도를 높여 나간다.
넷째, ‘캘리 추상회화’이다. 캘리를 이용한 현대추상회화가 탄생하여 현대인의 시각 환경을 새롭게 해 주고 있다.
다섯째, ‘팝아트 캘리(pop art calligraphy)’이다. 엄연히 붓글씨라는 공통분모 속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서예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줌에서 생긴 말이다.
3. 캘리그라피와 전통서예
흔히 서예라 하면 전통서예를 가리킨다. 전통서예는 오랜 기간 검증된 동양의 대표적인 예술이자 전통문화이기도 하다. 전통서예라 하면, 필법(筆法)을 중시하고 임서(臨書)라는 학습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다. 전통서예는 수천 년을 거치며 연구 수련해 오는 과정에서 뾰족한 붓을 통하여 표현해 낼 수 있는 극한의 경우의 수를 찾으며 동양의 심미안을 길러왔다. 그 사이에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전통서예만의 고유성과 체계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의 발현은 물론 글씨에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이 베어난다고 믿고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다.
전통서예와는 달리 캘리는 일상 속에서 누구나 다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예술, 아름다움의 맛과 실용적인 멋을 금세 느낄 수 대중적 예술이다.
그런데 문자 디자인이란 옷을 입고 어느 순간 갑자기 탄생한 캘리를 두고 전통서예는 낯선 이방인 정도로 생각하고 수수방관하고 있다가 갑작스런 캘리의 그룹형성과 인기몰이에 놀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애매한 관계가 형성되었었다. 따라서 캘리와 전통서예는 한 마디로 애증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전통서예를 하다가 현대서예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암중모색을 하거나, 아예 캘리로 갈아타면서 사제 간 또는 동료 간에 약간의 반목과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캘리 지망생이 많이 생기고, 경향 각지에서 캘리 작가들의 그룹이 탄생하자, 공모전 행사를 치르는 각 단체에서는 캘리분과를 추가로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지금은 전통서예와 캘리가 대동소이(大同小異),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를 취하며 공존공영(共存共榮)을 꿈꾸고 있는 형편이다. 캘리는 전통서예보다 젊은 층에서 많이 선호하고 있다. 하지만 서예는 점점 고령화하고 있어서 캘리 인구와 전통서예 인구가 역전된 상황으로 보인다.
이런 와중에 전통서예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현대서예가 있다. 이보다 앞서 서예로부터 분리 독립한 문인화도 현대문인화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장을 열어 오고 있었다. 현대서예 또는 현대문인화를 표방하는 작가들은 전통적인 문방사우(文房四友)의 굴레에서 벗어나 붓 대신 다양한 자연물 또는 생활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고, 먹과 화선지에서 벗어나 물감이나 패널을 사용하기도 하며, 다양한 실험과 파격으로 창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대서예는 가독성(可讀性)보다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나 일본의 묵영이나 전위서예처럼 이미지에 집중함으로써 순수예술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캘리와 현대서예는 감성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며 서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의 충돌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둘 다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지만, 현대서예는 읽는 서예가 아닌 ‘보는 서예’로서의 가치를, 캘리는 메시지 전달이라는 실질적 목적 때문에 ‘가독성’의 가치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서예든 캘리든, 현대서예든 현대문인화든, 음악에서 클래식과 재즈가 공존하듯, 오페라와 뮤지컬이 공생하듯, 모두 유기적인 맥락 속에서 시각예술의 숲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4. 캘리그라피로 맞이하는 드림 소사이어티
현대인은 빠른 경제 발전과 기술 혁신으로 물질적 풍요와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고,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보 사회 뒤에 올 미래 사회는 꿈과 이야기와 같은 감정적인 요소와 상상력이 중요시되는 사회 곧,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가 도래한다고 한다. 덴마크 미래학자 롤프 옌센(Rolf Jenssen)은 미래 사회는 이성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감성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접어들 것이라면서, 이러한 미래 사회를 드림 소사이어티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상품 자체의 기능이나 효용은 부수적인 것이 되고, 오히려 상품에 담긴 이야기가 고객들의 감성을 사로잡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캘리가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는 캘리가 바로 감성적인 요소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각예술이기 때문이다.
드림 소사이어티에서는 디지털화된 정보가 범람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날로그적 감성이 묻어나는 캘리가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감성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다양한 분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아니면 훌륭한 스토리텔러를 만나 상상력을 동원한 발칙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 수도 있다. 캘리에게는 이야기가 밥이고 자양분이다.
소비자의 감성적 동인을 자극해 판매를 촉진시키는 마케팅 방식을 감성 마케팅(emotional marketing)이라 한다. 캘리의 경우 색깔, 디자인, 이미지 등을 활용하여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감성 마케팅을 통해 기업은 브랜드 이미지를 홍보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캘리 형식과 내용 간에 이미지 연상이 잘 되도록 써야한다. 이를테면 통닭은 통닭처럼, 국수는 국수처럼 써야 한다는 말이다.
감성 캘리를 위해서는 표정 있는 글씨만으로는 부족하다. 캐릭터(character) 제작이나 배경 사진은 물론 웹툰과의 콜라보도 생각해야 한다. 캘리 색과 배경 색 선택도 중요하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감성 캘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장치들이다. 88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인 호돌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로고 글씨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과 같이 캘리도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이미지 글씨여야 한다.
전통서예에서 유명 작품은 단조로운 흑백의 앙상블이지만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 글을 쓴 사람의 감성이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고난도의 감성은 그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과 통찰이 필요하다.
브랜드(brand)는 ‘상표’를 뜻한다. 여기에는 상품의 개성이 드러나야 한다. 브랜드는 상품의 얼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품의 사활과 직결되기도 한다. 브랜드 이름(brand naming)을 캘리로 표현하면 상품의 품격과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를 더 높일 수 있다. 브랜드 이미지(brand image)를 살리기 위해서는 브랜드의 성분이나 효과, 기능과 기대치도 중요하지만, 캘리 브랜드 마케팅도 필요하다. 손맛이 담긴 붓질 캘리 통하여 브랜드 특징이 소비자에게 잘 전달될 때, 소비자의 선한 감성 자극을 불러올 수 있고 또 구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브랜드 작명도 중요하지만 브랜드의 격에 맞는 로고도 중요하다. 브랜드의 심벌과 로고(simbol, logo) 제작에서 차가운 폰트보다 감성 글씨인 캘리와 함께하면 기업 이미지는 물론 소비자의 격까지 올라간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캘리의 특성을 말하자면 감성적인 시각예술, 디자인을 입은 서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캘리의 특성을 살려서 잘 쓰고 싶은데, 첩경은 없을까. 캘리그라피스트로서 수시로 작업과 더불어 염두에 둬야 할 조목을 순서 없이 적어본다.
평소 글감을 짓거나 독서 등을 통하여 모으는 습관을 기른다.
(지혜와 창의력이 동시에 길러진다.)
각종 대회나 회사 등의 로고를 모아본다.
(엄청난 상상력과 창의력이 결집된 작품들이다.)
주제에 어울리는 서체를 상상한다.
(다양한 서체의 활용을 꾀한다.)
내용 선정과 함께 전체적인 디자인을 해 본다.
(정형화된 틀을 깬다.)
서체 구상 및 글자 표정 만들기를 해 본다.
(자음과 모음을 해체해 보기도 한다.)
모필 외에 다른 도구를 고려해 본다.
(붓이 아니라 브러시(brush)나 칫솔 등을 사용할 필요성이 있으면 적극 활용한다.)
내용에 잘 어울리는 배경과 색깔을 탐색한다.
잠시 눈을 감고 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를 한다.
막춤을 추거나 캘리 체조를 통하여 몸을 푼다.
일단 쓰는 사람 자신이 즐거워야 한다.
가독성 정도를 염두에 두고 쓴다.
디지털 서체와 아날로그 서체(캘리)와의 조화를 생각한다.
장식성, 먹의 농담, 윤갈 등을 생각한다.
필압과 속도의 변화를 준다.
표현의 극대화를 위한 붓놀림은.
(붓을 때릴 것인가, 굴릴 것인가.)
그림 또는 사진과의 상호관계를 고려한다.
점과 선, 자간의 조화를 생각하며 쓴다.
가로쓰기의 특징을 살핀다.
한자와 영어의 경우 전체적 어울림을 생각하고 쓴다.
최종적으로 설치될 공간을 염두에 두고 구상한다.
문화 행사, 축제의 장, 전시장 등에서는 행사의 성격에 어울리는 필체를 구상한다.
번뜩이는 창작 지혜를 발휘한다.
완성된 캘리에 스토리텔링을 입힌다.
5. 캘리그라피를 통한 공유의 길
학문과 예술은 소통과 공유를 할 때 그 존재 의의가 크다. 캘리도 소통과 공유의 과정을 거칠 때 그 가치가 사뭇 높아진다. 캘리를 단순한 예술작품으로 보고, 집안에 걸어놓고 개인적 감상의 대상으로 즐길 수도 있지만 SNS를 통하여 대중과 공유할 때 의의가 더 커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감성 글씨인 캘리를 공유의 대상으로 보고, 그 공유 영역으로 어떠한 곳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우선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캘리를 활용한 각종 로고(logo) 개발이다. 로고란 회사 이름, 상품 이름, 타이틀 따위의 글자를 말한다. 로고는 독특한 글자체를 이용하여 개성적으로 디자인된 글자이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몰개성적인 차가운 폰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앞으로는 감성과 표정이 배어나는 캘리 로고를 추천하고자 한다.
다가올 대선 및 각종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 이름 및 격문 로고도 캘리의 영역이다. 문제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변화의 속도는 느리다. 수동적으로 기다릴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작가 스스로 온라인, 오프라인을 통하여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협업이나 단체를 조직하여 분업을 해도 좋겠다.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다가올 다양한 여행 상품, 각종 공연 등의 문화행사명도 캘리에게 무한히 펼쳐진 시장이다.
이 외에도 각종 유튜브 타이틀(title), 신문 방송 광고 및 자막, TV 프로그램, 영화 타이틀, 패션(fashion) 디자인, 패키지(package, 포장) 디자인 및 글씨, 옥외 간판 글씨, 각종 포스터(poster) 타이틀, 책표지 제자, 기업 브랜드(brand) 글씨, 회사명 글씨, 지자체 홍보 이미지 글씨, 프랜차이즈체인의 브랜드 로고, 백화점이나 마트 등에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의 브랜드 네임, 이모티콘과 말풍선 글씨, 고객이나 행인들에게 나눠주는 각종 팸플릿(pamphlet, 작은 책자, brochure라고도 한다), 리플릿(leaflet, 신문에 끼워넣는 광고지, handbill이라고도 한다), 컵이나 도자기 글씨, 화장품, 장난감, 문구, 아동 의류 디자인 글씨, 각종 제품명 디자인 글씨, 술맛 나게 쓴 각종 주류 레이블(label, 라벨, 레테르, 딱지라고도 한다) 등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캘리를 상업적인 수단으로만 생각하기 쉬우나 감상용 순수캘리 영역도 있다. 일상에서 순수캘리로서 가장 많이 활용하는 예는 가훈이나 좌우명, 명언이나 경구 쓰기이다. 문제는 내용이나 성격에 맞게 써야 한다. 나아가 패션쇼나 공연 타이틀은 물론 바디페인팅도 캘리의 예외일 수 없다. 최근 들어 젊은이들로부터 곽광을 받고 있는 타투(tattoo)에도 캘리를 적용할 수 있다.
6. 캘리그라피가 건강에 도움을 주는가
질병은 천 개이나 건강은 하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취미나 직업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다.
‘서예를 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한다.’라는 명제(命題)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운필(運筆)은 운신(運身)의 변용으로,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정신 운동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막상 붓을 잡고 휘두르는 과정은 다양한 몸놀림이 보여주는 육신 운동이자 호흡 수련이다.
상해의 서예가 소국선(蘇局仙, 1882~1991)이 110세, 북경의 서예가 손묵불(孫墨佛, 1884~1987)이 104세를 살았다. 이를 두고 중국에서는 남선북불(南仙北佛)이라는 말이 생기고 서예가 장수에 도움을 준다는 증거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 서예가 중에도 수전증(手顫症)을 악필(握筆)로 극복한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은 96세, 소지도인(昭志道人) 강창원(姜昌元, 1918~2019)은 102세로 장수했다.
영자팔법(永字八法)은 점획의 모양이 아니라 다양한 표현을 위한 동작에 대한 설명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요즈음 인기 있는 스쾃(squat) 운동은 붓털의 굴신(屈伸)을 표방하고 있고, 두 발로 걷기는 노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룻배처럼 행필(行筆)의 묘를 담고 있다.
점을 잘 찍기 위해서는 때론 풀잎 끝에 맺힌 이슬처럼 가볍지만 신중해야 하고, 때론 무거운 바위를 들어 언덕 위에 올려놓듯이 급하면서도 집중해야 하는 동작 훈련이 필요하다.
선을 그을 때는 참으로 다양한 동작이 요구된다.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는 동작, 달리다가 낭떠러지를 만나 급정거하거나 허공에 떨어지다가 나뭇가지를 잡는 동작, 살얼음판을 걷는 동작, 양궁이나 사격에서 정확한 목표 조준을 위하여 숨을 멈추고 활과 총을 신중히 내리는 동작, 높이뛰기 멀리뛰기 창던지기 선수가 뛰거나 던지는 힘을 높이기 위하여 구름판까지 도움닫기 하는 동작, 스키를 타고 슬로프(slope)를 내려오며 균형을 잡는 동작,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가되 쓰러지지 않으려는 동작, 말몰이 회초리를 딱 하고 휘두르는 갑작스러운 동작, 사랑하는 연인에게 다가가 설렘으로 몰래 껴안는 동작, 호수 위의 새가 물을 박차고 비상하는 동작, 독수리처럼 허공을 날며 관조하다가 먹이를 발견하고 내리꽂히듯 몸을 던져 착지하는 동작, 비상하는 새가 날아가는 곤충을 낚아채는 동작, 새가 모이를 쪼는 동작, 축구 야구 배구에서처럼 다가오는 공에 임팩트(impact)를 가하는 동작, 농구선수처럼 바스켓까지의 거리 조준하여 던지는 동작, 그네뛰기나 스케이트보드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스윙하며 차고 오르는 동작, 날다람쥐 같은 적확한 비상 동작을 익혀야 한다.
파임과 같은 선에서는 언덕에서 돌 굴리기, 나뭇등걸 굴리기, 미끄럼틀 타기 등과 같은 동작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액티브한 캘리는 근대5종 이상의 다양한 인간 동작의 종합이자 자연의 모든 현상을 표현해야 하는 액션 아트(action art)이다. 그래서 필로(筆路)는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전하고 즐길 가치가 있다고 본다. 더구나 건강에 좋고, 장수에 도움이 된다면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붓을 잡을 일이다.
무엇보다 전통서예든 캘리는 정신운동과 육체운동이 가장 이상적으로 혼효(混淆)된 예술이다. 생각의 근육과 육신의 근육을 동시에 강인하게 해 주는 최고의 건강 예술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가끔은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자연과 공존하는 지혜를 배우고 심신을 단련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다만 직업별 평균 수명에서 서예가가 가장 길다는 점은 흔감한 일이나, 단지 공모전 등을 통하여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스트레스만은 절대 사양해야 한다.
7. 캘리그라피가 다시 희망이다
캘리는 이제 우리의 일상은 물론 문화예술계에 두루 자리 잡고 있는 대중적인 예술로 성장하였다.
‘서예가 다시 희망이다’라고 할 때, 여기의 서예는 캘리를 두고 한 말이다. 늙어서 기식엄엄(氣息奄奄)하던 서예가 캘리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자 다시 인기몰이를 하며 바깥출입도 잦아졌다. 기가 죽어 있던 서예가 이제 캘리란 이름으로 환생한 샘이다. 캘리는 미래의 글씨, 희망의 글씨로 다가왔다.
만약 전통서예와 캘리를 세대 간의 대립적 관계로 본다면 전통서예는 구세대, 캘리는 신세대라 할 수 있다. 전통서예를 부모로 본다면 캘리는 자녀에 해당한다. 부모가 연만하여 기력이 떨어지자 캘리라는 자식이 금의환향(錦衣還鄕)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형국이다.
전통서예가 클래식이라면 캘리는 재즈라 할 수 있다. 클래식은 악보에 따라 악기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음색을 내야 한다. 그러나 재즈는 악보가 없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경쾌한 리듬의 대중음악이다. 캘리도 즉흥성이 강하고, 대중적이라는 점에서 비유해 본 말이다.
캘리를 시작할 때, 전통서예의 기초 위에 캘리라는 집을 짓는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전통서예는 어렵고 많은 세월이 요구되기 때문에 곧바로 캘리의 집을 짓는 경우가 많다. 캘리 집도 튼실하게 지으려면 어느 정도 기초 공사를 잘 해야 한다. 그래서 기초를 배울 때는 반드시 스승을 찾아 기본 설계를 하고, 도구 사용법 정도는 익혀야 한다. 오래 전통서예를 해온 사람에게야 캘리는 세컨하우스쯤 되겠다.
캘리도 실용 목적의 상업캘리와 목적 없이 순수한 예술캘리가 있다. 디자인 개념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소비하고 응용을 꽤하는 상업캘리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선택은 늘 본인의 몫이다. 어느 쪽이든 독서로 기본 소양을 쌓고 상상력을 기르며, 시나브로 모필 연주 능력을 길러야 한다. 사랑해서 쓰는 게 아니다. 쓰다가 보면 사랑하게 된다. 캘리의 미래는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