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수도 청주(淸州)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 충청도는 중심 고을인 '충주(忠州)'와 '청주(淸州)'의 이름을 합성하여 '충청도'라 하면서 지명이 고착되었고 전라도, 경상도와 함께 삼남(三南) 지방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지명의 변화가 심하여 '충공도(忠公道)', '청공도(淸公道)', '공청도(公淸道)', '공홍도(公洪道)', '홍충도(洪忠道)', '충홍도(忠洪道)', '공충도(公忠道)' 등 다양하게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 충청도는 대체로 금강을 기준으로 좌도와 우도로 구분되었다. 1896년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충청우도 일대는 충청남도, 좌도 일대는 충청북도가 되었다.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후에 광역시)로 승격하면서 충청남도에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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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忠淸北道)는 서북으로 차령산맥(車嶺山脈)과 동남으로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중간에 자리 잡은 충북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고, 삼국시대 들어 중부는 백제, 남부지역은 신라, 북부지역은 고구려가 점유해 삼국 세력 다툼의 각축장이 됐다.
고려 성종 때(995)중원도에서 예종 원년(1106)처음으로 충청도로 정해진 뒤 명종 2년(1171)양광도로 개칭되었다가 공민왕 5년(1356)다시 충청도로 불렸으며 조선 고종 33년(1896)8월4일 13도제를 실시하게 되면서 충청북도가 설치되었고, 충주(忠州)에 도청(道廳)을 두었다가 1908년 청주(淸州)로 이전했다.
청주(淸州)는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시대인 685년(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조선 세종(世宗)은 한때 관찰사를 두었으나 세조는 진(鎭)으로 격을 낮추어 도호부를 설치하였고 선조가 청주목으로 승격시켜 2군 9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를 개정하고 전국을 8도로 개편함에 따라 공주가 충청도의 수부(首府)가 되자 청주목을 폐지하고 군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충청도가 남북으로 분리되어 충주에 관찰사를 두면서 청주는 소속 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비로소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지방관제를 개편할 때 청주면(淸州面)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 4월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邑)으로, 1946년 6월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청주고인쇄박물관(淸州故印刷博物館)은 고인쇄문화전문박물관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할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드문 특별한 박물관이다. 『直指(직지)』는 금속활자로 찍은 책 가운데 현재 남아있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독일의 금속인쇄본인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2년 앞선 것으로 1377년 펴낸 불교 서적이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세계도 직지의 가치를 인정했다.
『直指(직지)』의 중심 주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구(名句)에서 비롯된 것으로 ‘참선(參禪)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라는 뜻이다.
‘무심천(無心川)’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무심하게 말없이 흐르는 내’라는 설, ‘무심하고 무정한 내’라는 설, ‘물이 없는 내’ 즉 ‘무수천(無水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수심이 없는 내’라는 의미의 ‘무심천(無深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무성(武城)뚝 안으로 흐르는 심천(沁川)’이라는 의미의 ‘무심천(武沁川)’이 변한 것이라는 설, 불교용어 ‘무심(無心)’에서 왔다는 설 등 아주 다양하다. 불교용어 ‘무심’에서 왔다는 설이 그런대로 무게를 싣고 있다.
또 청주공항은 비행장과 인접한 곳에 비상리(飛上里), 비하리(飛下里)라는 마을이 있다는 점도 지명 예언으로 보인다.
Good 충주(忠州)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의 일부였으나, 후에 백제의 판도 확정으로 한때(근초고왕5년 A.D 350년경) 백제의 영역으로 낭자곡성(娘子谷城)으로 불리다가, 북방의 고구려 남진 정책으로 인해 장수왕 63년(A.D 475)에 고구려에 전속되어 국원성이라 불리다가, 그 후 신라의 북진 정책으로 진흥왕 14년(A.D 553) 신라에 편입되어 경주의 귀척자제와 6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하였고, 진흥왕 34년(A.D 573)에는 소경부(小京府) 또는 사천성(四川省)이라 칭하여 대번영을 이루었고, 신라 경덕왕 원년(A.D 742)에 중원경(中原京) 또는 태원(太原)이라 칭하여 신라의 중앙임을 표방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중원경을 충주(忠州)로 개칭(A.D 924)했고 고려 성종 14년(A.D 995)에는 중원도를 설치하고 절도사 및 창화군 300명을 배치(현 앙성면 용대리)하였으며, 고려 충렬왕 3년(A.D 1281) 충주성을 개축할 때 성벽에 연꽃을 조각하였으므로 예성(蘂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세종 31년(A.D 1449)에는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충청도(忠淸道)라 개칭하고 좌감사를 배치하였으며, (중략)선조 25년 임진왜란을 당하자 신입 장군은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8천의 군졸을 거느리고 왜적과 대적하였으나 애석하게도 패전하고, 고종 32년 충주는 도청소재지로 관찰사를 배치하여 충청도의 중심을 이루더니, 도청 소재지로 된지 14년 만에 교통의 불편을 이유로 순종 융희3년 5월에 도청을 청주로 이전하고, 충주는 군청 소재지로 군수를 배치하였다.
한일합병 이후 1913년 군면 폐합으로 충주는 1917년 충주면으로 개칭하고, 1931년 5월에 지방제도의 개정에 의하여 충주읍으로 승격한 후,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게 된다.
1956년 7월8일 충주읍은 충주시로 승격되고, 현재는 중원군(中原郡)이 충주시(忠州市)로 통합되었다.
중원 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국보 제205호로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