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程邈과 隸書
松民 李周炯
지금으로 부터 2천 2백여년전 찜통같이 무더운 여름날 운양(雲陽)의 옥중(獄中)은 사람들로 하여금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옥중 한편에는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한 칸의 방이 있는데 거기에는 괴이하게 생긴사람이 벽 쪽을 향하여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쑥댕이 처럼 헝클어진 머리에 구멍 뚫리고 헤어진 적삼, 양발에는 굵은 쇠사슬로 묶여져 있고 목에는 형틀이 조이고 있었다. 형상은 비록 이렇지만 그의 기세는 당당해 보였다. 마치 수도를 마친 신선같이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이는 누구인가? 그의 이름은 정막(程邈)이다. 그의 생졸년대는 알 수 없으며 이사(李斯)와 함께 진대(秦代)의 훌륭한 대 서예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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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역사에 관해서는 사적(史蹟)에 기재된 것이 많지 않은데 어떤 사람은 그의 자(字)가 원잠(元岑)이라고 하고 또 어떤사람은 원수(元秀)라고도 한다. 그는 진나라 하두(下杜)(지금의 섬서성서안남)라고도 하고 또 하규(下 )(지금의 섬서성위남동북)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는 원래 감옥에서 옥리(獄吏)도 지내고 일개 현(縣)에서 일하는 하급관리였었는데 대전을 매우 잘 썼으며 성품이 강직하고 언변이 좋았다.
이렇게 재주 많은 정막은 그의 상관(上官)과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 상관은 어떻게 하면 정막을 혼내줄 수 있을까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정막은 그에게 빌미를 잡히고 말았다. 그것은 우리가 일컫고 있는 고예(古隸)(민간서체)로써 공문을 작성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以秦小篆爲天下統一書體-진나라의 서체로써 천하의 통일서체로 삼는다"라고 하여 당시 승상이었던 이사가 정리한 小篆體(소전체)를 모두 사용하게 하였던 때라 만약 이를 어기면 엄한 벌을 받아야만 했다. 상관은 즉시 정막을 고소하였고 그 이유로 정막이 옥중에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당시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도를 정비하기 위해서 하급관리들은 이전보다 글씨 쓰는 양이 훨씬 많아졌으며 반드시 소전체로 공문서를 작성하여야 하였다. 사정이 이렇자 정막은 복잡한 전서는 사용하기에 불편하니 새로운 서체가 있어서 공문서를 작성하기에 용이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감옥에서도 이러한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에 여러 번 자신의 억울함을 상소하였지만 여지없이 상관에 의해 묵살되어버리고 이는 이렇게 10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정막이 있는 이 감옥은 이전에 대대적인 진나라의 토목공사 때 불만을 품고 있다가 잡혀 들어왔던 노예들이 썼던 방이기도 하였는데 정막은 여기에서 획기적인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감옥의 벽돌에 손톱과 깨어진 벽돌로 그들의 심정과 불만을 적었는데 직획과 방형의 획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정막은 대단한 각오를 했다. 여지껏 공문서에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한자 3천여자를 간편한 글씨로 정리하기로 말이다. <書史會要>에는"覃思十年, 變篆爲隸, 得三千字奏之- 십년을 깊이 생각하여 전서를 예서로 만들어 삼천자를 바쳤다"라고 하였고, <漢書. 藝文志>의 주(注)에는 "隸書亦程邈所獻- 예서는 또한 정막이 바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진시황은 크게 기뻐하면서 정막을 사면시켜주었고 또한 파격적으로 어사에 기용하였다. 이때는 범죄자의 신분을 "도예(徒隸)"라고 하였는데 정막도 도예의 신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글씨를 "예서(隸書)"라고도 하고 또 전서의 부족한 부분을 돕는 글씨라하여 "좌서(左書)"라고도 하였으며, "진예(秦隸)" "정예(程隸)"라고도 한다. 여기서 잠깐 이전의 글씨를 살펴보자. 진나라가 전국(全國)을 통일하기 전 전국시기(戰國時期)에는 전쟁이 치열해지고 순수무장들에 의한 전쟁의 이론과 작전을 연구하는 병법(兵法)이 성행하였는데, 오기(吳起)의 <吳子>, 손빈(孫 )의<孫子>, 양저(穰 )의<사마법(司馬法)>등은 이 시기의 산물이다. 이처럼 군영(軍營)및 민간인들에게는 죽간과 목간을 많이 사용하였고 이 때의 죽간과 목간에 쓴 글씨는 종정에 새겨진 대전과는 다른 형태로서 변화되어 갔고 이것을 우리는 고예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예는 결체(結體)가 방정하지 않고 글자의 형태는 상당부분이 여전히 전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처럼 주로 군영과 민간 또는 하급관리들이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발전시켜나갔는데 정막은 옥중에서 바로 이러한 서체를 정리한 것이다. 정막이 만들었다고 하는 진예(秦隸)도 비록 전서에 비하여 간첩(簡捷)하고 초솔(草率)하며 자유롭지만 이 또한 전의(篆意)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진예는 소전의 변법(變法)이고 그것의 출현은 문자의 서사가 기록보관의 차원에서 실용성을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며 쓰기 어려운 전서에 대한 일종의 해방이다. 진예가 예서로서 충분히 성숙되고 정형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확실히 한(漢), 당예서(唐隸書)를 잉태하고 있었으며 또한 해서(楷書) 출산의 계기가 되었다. 당대 이사진(李嗣眞)의 <書後品>에는 이 정막의 예서를 "상상품(上上品)"으로 서열(序列) 하였고 "정막은 예서의 법칙을 처음으로 만들었고 규범은 단청보다 빛난다"라고 하였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정막의 예서작품을 볼 수가 없다. <閣帖>권5에 실려있는 정막의 예서도 우리는 믿기가 어렵고 다만, 1975년에 호북 운몽수호지진묘(雲夢睡虎地秦墓)에서 출토한 1100여매의 진대 예서간편(隸書簡片)은 우리들에게 진예의 구체적인 예술형상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러한 간서의 중요한 특징은 방절(方折)의 필의로써 전서의 원전(圓轉)한 필의를 변화시켰다는 것이며 또 결체상에 있어서도 상형의 필획을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한 정취로 바꾸어 사람들의 이목을 일신시켰다는 것이다. 청대의 유희재(劉熙載)는 <藝槪>에서 "書當乎自然-서는 마땅히 자연스러워야 한다" 라고 하였는데 진예는 바로 자연스런 풍격을 가지고 있다. 수호지 진간의 출토는 우리들로 하여금 정막의 예서면모를 이해시켜주고 있다.
고대의 적잖은 서예인들은 진예의 출현에 있어서 정막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합당하지 않다. 일종의 신서체(新書體)가 만들어지고 발전되는 것은 모두 사회 발전의 객관적 수요에 의하여 오랜 세월을 거쳐 누적되어 응용되면서 창조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막의 공적은 이렇게 민간으로부터 누적되어 오던 것을 수집 정리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즐겁게 쓸 수 있도록 하였다는 데에 있다.
예서의 기원은 아주 이르며 거슬러 올라가면 전국시대에까지 이를 수 있다. 예서는 진대에 이미 보편적으로 민간에게서 유행했고 민간에서 부단한 가공으로 완미(完美)함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한대에 이르러서는 예서가 민간과 하급관리들이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발전시켜 더욱 꾸며져서 마침내 한대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완전한 팔분(八分)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서예사에서 보편적으로 예서를 고예와 한예의 두 종류로 나누고 있는데 이 두 종류의 발전단계는 서로 같지 않다. 한예의 전신은 바로 고예이다. 고예의 결체는 방정하지않고 글자의 형태는 상당부분이 여전히 전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적지않은 전서의 필법을 사용하고 있다. 한예는 결체가 방정하면서 필획이 명확한 파세(波勢)와 도법(挑法)의 예서를 통칭하고 있다. 한가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현재 감숙성(甘肅省)에서 출토된 돈황한간(敦煌漢簡)이나 거연한간(居延漢簡), 무위한간(武威漢簡), 감곡한간(甘谷漢簡)등의 방대하게 출토된 한대의 자료를 살펴보면 이 감숙한간(甘肅漢簡)이 존재한시기는 서한(西漢) 무제(武帝)에서무터 동한(東漢)의 건무년간(建武年間) 까지 죽(竹). 목간(木簡)에 고예및 장초가 성행하면서 발전하여 왔는데 이후 점차 종이의 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그러한 고예의 형태는 서예의 한 분야에서 소외되어가고 팔분서(八分書)의 유행으로 법도가 더욱 충실해져 간첩(簡捷), 초솔(草率)하고 자유분방한 고예는 아는 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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