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등선(登善). 항저우[杭州] 첸탕[錢塘] 출생. 우세남(虞世南)·구양순(歐陽詢)과 아울러 초당(初唐) 3대가로 불린다. 아버지 양(亮)은 학문과 서도(書道)에 뛰어나 태종(太宗)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저수량도 조정의 부름으로 시서(侍書)가 된 뒤 충절과 엄정으로 역시 신임이 두터웠다.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수집사업에서는 태종의 측근으로 그 감정을 맡아 보면서 그 진위(眞僞)를 판별하는 데 착오가 없었다고 한다. 고종(高宗) 때 하남군공(河南郡公)에 봉해졌으나, 만년에 황제에게 직간(直諫)한 것이 노여움을 사 좌천된 지 3년 후 불우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글씨는 처음에 우세남의 서풍(書風)을 배웠으나, 뒤에 왕희지의 서풍을 터득하여 마침내 대성하였다. 아름답고 화려한 가운데에도 용필(用筆)에 힘찬 기세와 변화를 간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맹법사비(孟法師碑)》 《이궐불감비(伊闕佛龕碑)》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