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설체의 탄생 배경과 송설체가 중국 서예사에 미친 영향
송설체는 중국 원나라의 서예가인 조맹부(1254~1322)의 글씨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의 호인 誦說道人(송설도인)을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趙體(조체)라고도 한다.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개성을 중시하던 송대의 서풍과는 달리 조맹부는 전통, 즉 晉唐(진당) 이전으로의 복고를 주장하여 王羲之(왕희지)의 글씨를 바탕으로 필법이 굳세고 결구가 정밀하면서도 유려한 서체를 완성했다. 그의 행서는 실용적이면서도 軟美(연미)하고 정돈된 것이 특징이다.
그는 해서․행서는 물론 당시에는 잘 쓰이지 않던 초서․전서․예서까지도 연구했다. 송설체는 중국에서 翰林院體(한림원체)라 하여 板本(판본)에도 널리 사용되었고 청나라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조맹부는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활약을 했으며, 元代(원대)의 書壇(서단)을 風靡(풍미: 어떤 현상이나 사조가 널리 사회에 퍼짐.)한 서예가일 뿐 아니라 중국 역대를 통한 대가이다. 그가 망국의 한을 가지고 원나라에 들어가 송설체를 탄생시키기까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처했던 시대적인 상황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는 宋(송)나라 황실의 후예였다. 이 점이 그의 글씨를 보는 데에 중요한 조건이 된다.
북송시대는 태조의 아우인 태종의 계통에서 역대 황제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맹부가 속하는 태조의 직계는 오히려 불우한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태종의 혈통은 南宋(남송)초기 고종에서 끊어지고 맹부의 家系(가계)에서 들어간 양자가 제2대 효종이 되었으므로 남송에 와서는 뚜렷한 황족이었다.
그러나 조맹부가 태어난 시절에는 남송도 그 말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몽고정권인 元(원)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한 것은 맹부 나이 26세 때이었다.
송 황실은 이민족인 몽고족에게 비참하게 망한 상태에서 황실의 후예인 그가 한문화에 대해 상당히 심취하였고 유가와 전통 사대부 문인들을 퍽 우대하기도 했던 원 세조(쿠빌라이)의 명을 받고 남방으로 인재를 구하러 내려온 정거부에게 33세 때 발탁되었다. 그리고 자국을 멸망시킨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벼슬을 하게 되니 동족과 원나라 사람 그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하고 멸시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로부터 35년간 , 세조, 성종, 무종, 인종, 영종 五代(오대)에 벼슬을 하였다. 다재다능하고 고아한 인품으로 관운이 형통하여 翰林學士承旨(한림학사승지)가 되고 魏國公(위국공)에 봉해졌다. 시호는 文敏(문민)이며, 세상에서는 ‘趙松雪(조송설)’ 또는 ‘조문민(趙文敏)’, ‘趙子昻(조자앙)’이라고도 하고 吳興(오흥:절강성 호주)이 고향이므로趙吳興(조오흥)이라고도 불렀다.
몽고족에 의한 정복왕조인 元(원)나라에서는 중국의 전통문화가 그다지 존중을 받지 못했다. 몽고족은 중원을 차지한 이후에 한족을 무시하는 정책을 폈다.
元人(원인) 도종의는 ‘철경록’에서 ‘元代(원대)에는 인종을 4종으로 나누어 차별대우 하였는데, 1등급은 몽고인, 2등급은 색목인, 3등급은 한인, 4등급은 남인이라’고 하였다. 도종의가 말한 한인이란 원래의 남송유민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고, 몽고인이 중원에 들어오기 전인 남송시절에 북방에서 요와 금의 통치하에 있었던 한인들을 말하며, 남인이 바로 양자강 이남의 남송 유민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남송 유민인 순수 한인이 제4등급으로 최하위의 대우를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최상의 신분으로 대접받던 儒家(유가)들도 원대에는 형편없는 지위로 전락하였다.
원대는 직업을 등급에 따라서 10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전통적 교양을 지닌 학자의 사회적 지위가 최하위인 거지의 하나 위인 제9위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학문․문화․예술이 충분히 존중되었을 리 없다. 지배족인 몽고인 지상주의 밑에서 지식인의 官界(관계) 등용문인 과거도 경시되고 있었으므로 한인, 특히 문화의 담당자인 지식인들이 생기를 잃은 것도 부득이한 사정이었다.
그런 時世(시세)에 있어서는, 中國(중국) 전통문화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거나, 新生面(신생면)을 개척하거나 하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거기에서 한 가지 남겨진 길은 舊來(구래)의 것을 소중하게 지켜나가는 일 밖에 없었다.
조맹부는 元朝(원조)에 발탁되어 출사함으로써 오히려 이 사정을 통감했다. 元朝(원조)의 중국 문화에 대한 태도는 하나 둘 이해있는 황제가 나온다고 해서 쉽게 달라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민족의 무단과 횡포아래 한족의 전통문화가 말살되고, 동족들이 도륙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나머지, 한족과 한문화를 구하는 길은 바로 자신 같은 사람이 元朝(원조)에 과감히 뛰어들어 황제를 설득하고 몽고인들을 漢化(한화)시키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비굴감과 수모를 무릅쓰고 원조에 출사하였지만 천부적 재능과 경세제민하려는 포부를 갖고서도 그 이상를 펼칠 수 없었다. 이렇게 보통과 다른 환경 속에서 그의 글씨는 형성되어 성장을 수행한 것이었다.
그는 송말에 태어나 송말서단의 병폐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그 병폐를 씻고자 晉唐書風(진당서풍)으로의 복고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소위 晉唐書風(진당서풍)이라 함은 王羲之(왕희지) 부자와 歐陽詢(구양순), 우세남, 저수량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과 법도를 중시하는 서풍을 말한다.
宋代(송대) 서예는 본래 법을 숭상한 당대 서예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개성과 창신을 중시하는 尙意書風(상의서풍)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나 그 상의는 어디까지나 學古(학고)를 전제로 하는 상의였다. 그러나 송대 말기에 이르러서 法古(법고)는 아예 무시한 채 상의만을 내세우는 조류가 크게 성행하면서 서단이 일대 혼란기를 맞이하였다. 이것을 중국서예사가들은 상의서풍의 末弊(말폐)현상이라고 일컬었으며 조맹부는 바로 이러한 병폐 현상을 바로잡고자 진당서풍을 위주로 한 복고주의를 제창하였던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왕희지의 귀족적인 글씨를 최고로 생각하여 그 전통을 지키려 했다. 이것을 차대에 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책임이고, 또 자신이야말로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다고 자부하기에 이르렀다고 생각되어진다.
조맹부가 표방한 복고주의는 간단한 개인의 레벨을 넘어, 동시대의 서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므로 또한 그의 눈에는 북송 이후 일반에 흔히 유포되고 있었던 蘇(소), 黃(황),米(미) 이하의 개성적인 글씨는 오히려 옛 법을 황폐로 이끌어가는 것으로 밖에는 비치지 않았다.
조맹부의 글씨가 복고주의로 나아간 것은 그의 좋아하고 숭상함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 그 반생의 체험이 그것을 조장했다고도 보겠다.
조맹부가 蘭亭序(난정서)에 몰두하게 된 것은 그 글씨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인종의 명으로 오흥(조맹부의 고향)에서 대도로 가다가 獨孤長老(독고장로)로부터 定武本蘭亭序(정무본난정서)를 선물로 얻었다. 그는 이것이 왕희지의 風神(풍신:그 사람의 참모습)을 전하고 있는 것을 기뻐하여 잠시도 신변에서 떼어놓지 않고, 운하를 북상하는 배 안에서 13跋(발)을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蘭亭序(난정서)에 몰입함으로써 조맹부의 書格(서격)이 더욱 향상되었다. 그 후로 왕희지 계통의 글씨를 많이 연습하여, 中峯明本(중봉명본)에 보낸 尺牘(척독)같은 작품에서 보는 아름답고 윤택한 행초서나, 漢汲黯傳(한급암전)에서 보는 격조높은 細楷(세해)가 여기에서 나왔다. 특히 그 尺牘(척독)은 문자도 문장도 대단히 훌륭하여 역대의 尺牘(척독) 중에서도 제일급에 드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그는 행초에 있어서는 왕희지를 열심히 연습했으나, 碑版書(비판서)로는 당나라 중기 이후의 글씨를 연습했다. 그 까닭은 碑版(비판)의 글씨, 특히 그 문자는 왕희지의 글씨로는 만족되지 않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 점을 가지고 그의 복고주의의 불철저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원대에 있어 조맹부가 쓴 碑(비)의 수효는 다른 서예가들을 압도하고 있다.
조맹부는 진행초에 모두 뛰어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篆書(전서)에도 자신이 있었다. 玄 妙觀重脩三門記(현묘관중수삼문기)는 매우 의젓하고 아름다우며, 말로서 다하지 못할 운치가 있다.
명말의 동기창은 書道(서도)에 있어서도 비판정신이 왕성한 감상가이었으며, 그 자신이 뛰어난 서예가이기도 했다. 그가 조맹부의 글씨에 대해서 기탄없이 혹평을 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거니와, 다만 조맹부가 난정서에 몰두한 사실에 대해서만은 존경을 표시하고 있다. 즉, 그 ‘畵禪室隨筆(화선실수필)’에 ‘조문민은 난정서를 많이 써서 일정 경지에 들어갔다.’라고 하며 자신이 조맹부보다 끈기가 없음을 인정했다.
조맹부는 결국 진단서풍을 위주로 한 복고주의 제창에 성공하였으며 元代(원대)이후 명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추종자을 얻었다. 이후에 청나라 초기까지의 中國書壇(중국서단)이 대부분 조맹부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조맹부의 글씨가 이렇게 환영을 받은 것은 그 글씨가 平明(평명: 바르고 밝음)하여 萬人(만인: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 쉽고, 美麗(미려:아름답고 고움)하며 고아한 기품을 지닌 때문이다. 그의 글씨는 정말 아름답고 풍격이 높고 귀족적인 향기를 발산시키고 있다.
왕희지에 의해서 대표되는 진, 당의 書(서)는 아무리 마음이 끌리더라도 직접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조맹부라는 매개자에 의해서 훨씬 접근하기가 쉬워졌다. 그에 의해서 진, 당의 글씨가 소화․재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시도에 의해서 진, 당의 글씨에 접근하는 방법이 예시되기도 했다. 왕희지를 배우는데 직접으로 하지 않고 조맹부를 통해서 배우려고 하는 서예가가 속출한 까닭이 여기 있다.
이처럼 조맹부는 中國 書藝史(중국 서예사)에 하나의 轉機(전기)를 마련한 대서예가였으며, 또 한편으로는 황공망, 오진, 예찬, 왕몽으로 이어지는 소위 文人 山水畵(문인 산수화)의 元四大家(원사대가)를 탄생시키는데 산파적 역할을 한 대 화가이자 元代 詩壇(원대 시단)을 대표하는 대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淸代(청대) 사람들은 조맹부의 인품이 비속하다 하여(송 황실의 후예로서 원에 出仕(출사)하였다는 이유로) 조맹부 대신, 인품이 고아했던 예찬을 원사대가에 포함시켰다. 그러므로 명대까지의 기록에는 조맹부가 元四大家(원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 점에서 조맹부는 원이라는 이민족의 정복왕조 밑에서 전통문화를 지킨 비극적 인물로 그에 대한 평가마저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역사상 손꼽을 만한 시․서․화 삼절인 것이다. 시인으로서, 서예가로서, 화가로서의 그의 인생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도서
서예란 어떠한 예술인가, 김병기, 미술문화원, 1992, p414.
중국서예미학, 대구서학회 역, 중문출판사, 1995, p222.
중국법서선49(원 조맹부집), 동경, 이현사, 1996, p85.
서예대전집 제7권, 갑인출판사, 1981, p214.
야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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