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서예평론가이며 서예사가인 張懷瓘(生卒年度? )의 생애, 저술활동, 사상 그리고 서예발전을 위해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논하였다. 기록으로 보면 張懷瓘은 서법을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가문에서 태어났고, 성장했다. 張懷瓘은 스스로 자신의 글씨를 자랑 할 만큼 眞書, 草書, 行書, 小篆, 八分書에 능통하였다. 그는 開元年間(713~741년)에 鄂州司馬, 昇州司馬, 右率府兵曹參軍 등을 거쳐 翰林供奉에 이르는 벼슬을 하였다. 이 시기에 翰林供奉을 지내면서 궐내에 소장되어 있던 서적들을 감상하며 그로인하여 많은 서론들을 남긴 것으로 본다. 張懷瓘의 생존시기이던 唐代(618~906)에는 정치 · 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이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문화 전반의 發展을 가져다주는 기틀이 되었다. 특히 書藝를 애호하였던 唐玄宗은 서예를 크게 육성시킨 皇帝이면서 서예가이다. 이러한 唐玄宗의 문화정책에 힘입어 書藝는 황금기를 형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시기에는 도교가 크게 성행하여 많은 詩人이나 學者들이 도교를 신봉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서예 분야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으며, 사람들은 自然의 道와 陰陽의 이치를 생각하게 되었고, 또한 書法의 이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張懷瓘은 儒家보다 道家를 더 숭상하였는데, 그에 관한 사실은 그가 저술한『書斷』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天賦的인 資質을 중시하여 결코 사물의 외형을 모방하지 않았으며 서예의 玄妙라는 것은 자연현상의 이면에 있는 규율과 결합하는 것이라 여겼다. 따라서 張懷瓘의 思想은 儒道相補하면서 고도의 철학 경지를 이루게 되었다. 張懷瓘의 서론 저술을 분류해보면 평론을 다룬 저술은『古賢能書錄』,『文字論』,『書估』,『書斷』,『書議』,『六體書論』등이 있고, 서예기법을 다룬 저술은『論用筆十法』,『玉堂禁經』등이 있으며, 서체를 다룬 저술은『書斷』과『六體書論』이 있고 서예가를 다룬 저술에는『書斷』과『書議』가 있다. 그리고『二王書錄』은 六朝이래 二王법서의 收集과 聚散의 정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評書藥石論』은 張懷瓘이 황제에게 바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서예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사례가 실려 있는 책이다. 위의 저술 중에 張懷瓘의 대표작으로『書斷』을 꼽을 수 있다. 開元 甲子年(724년)에 쓰기 시작하여 丁卯年(727년)에 완성하였으며, 그 내용은 上 · 中 · 下 세 권으로 나뉘었고 대략 3만여 字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古文, 大篆, 小篆, 籒文, 八分, 隸書, 章草, 行書, 草書 등의 書體 원류를 밝혀내었고, 神品, 妙品, 能品의 三品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또한 神品을 최고의 위치에 놓았으며, 서예가 174명을 대상으로 서예술의 현상과 서예미학원리에 입각하여 품평하였다. 또한 張懷瓘은 시대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書體의 탄생과 발전하는 과정을 긍정하였으며 전통적인 서예관을 탈피한 뛰어난 창조성을 지닌 法古創新의 정신을 심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본 논문은『書斷』을 중점적으로 고찰하면서 기타 서론들을 참고하여 연구하였다. 그의 서예이론은 서체의 생성 및 변천, 서예평론, 기법, 인물 등 서예의 모든 분야에 영향이 미치지 않음이 없으며, 서예사에 한 획을 그어 놓은 큰 공헌을 했다. 이렇게 張懷瓘의 서예이론은 서예의 지위를 끌어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당대에는 물론이고 후대의 서예이론가와 서예가들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