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서예 작가노트]
▶ 김범수
▶ 문정숙
▶ 손호근
▶ 신진기
▶ 오주남
▶ 유경식
▶ 윤영석
▶ 이명식
1. 드러냄에 대한 변명 김범수
작품을 한다는 것은 매우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 때문에 작품을 해내고 또 그것을 내보인다는 것은 부끄럽기도 하고 때로는
당당해하기도 한다. 나 자신의 본성을 찾아 헤매는 삶 속에서 작품은 그때 그때의
순간적 단상들을 영원 히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사진과도 같다.
순간을 무한화 하는 것이다. 작품은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 탐구와 존재의의를
통찰하는 삶의 여정 속에서 한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 바로 그것이다.
나에게 작품은 그 이상의 것도 이하의 것도 아니다. 한때는 작품이 인간의 삶에
절대적 가치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절대적 가치의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가장 큰 목적으로 여겨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실현에 대한 포기이며 자기 본성에 대한 성찰을 방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 라는 존재를 향해 참다운 질문을 조금도 할 수 없었다.
작품은 결국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삶,
그 속에서 찍혀지는 한 장의 사진 바로 그것이며, 나 자신을 당당하게 해주는 작품 또한
그렇게 태어난다. '나' 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마음'은 왜 자꾸만 몸뚱아리 속에만
쳐박혀 있게 된는 것일까. 붓이, 붓 위에, 붓으로, 붓을 쓰고 먹이 나를 갈아 종이 위에
나를 그어댈 수는 없는 것인가. 작품을 하는 공간 속에서 함께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나' 아닌 다른 것들로 느껴지기만 한다면 이는 매우 부끄러운 자기 드러냄의 행위가
될 것이며 나아가 그것은 자신에 대한 기만이고 남을 속이는 것이 될 수 있다.
언어와 문자는 때로는 거짓말을 매우 잘하는 친구와 같이 여겨진다.
모두 특정한 상황 속에서 토해내는 무수한 말(작가정신)의 연속,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다. 만약 그러한 언어를 그대로 문자화(작품)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공식적으로 선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참나(眞我)'의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과
탐구 속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의 진솔한 언어는 문자로 형상화되고 구체화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더욱 강렬하게 '마음을 전하는 것'이 된다.
작품은 작가의 참다운 정신세계의 나타남이며 그것은 매우 구체적인 조형어법을 통해
문자라는 미적 '현상체(現象體)'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게 설정되어 있던 심미적 경계와 거리는
없어지고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면 작품은 하나의 생명과 또 다른 생명들을
심정적으로 강하게 연계시켜주는 매우 소중한 사회적 산물 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예술품의 사회적 공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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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대서예 그 즐거움 - 문정숙
서예란 내게 먹과 붓을 가지고 하는 즐거운 작업행위다.
아름답고 멋진 내용의 글을 써내는 창작행위다. 이를 위해서 전통과 보수란 든든한
뿌리와 기둥이 필요하고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종종 난해한 법첩과 문구들을
써나가면서 주눅이 들고 답답해지기도 한다. 한 획, 한 점이 틀림없이 그어나갈 때
때론 숨통이 막힐 듯이 답답해지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그 난해함을 대하면서
'이것도 몰라'라고 스스로 자책하고 주눅이 들고 때론 처량해지기조차 한다.
그러나 다행이 우리의 위대하신 세종임금님 덕분에 우리만의 아름답고 훌륭한
한글이 있음에 얼마나 행복하고 고마운지 모른다.
모든 백성이 쉬 익히고 쓸 수 있는 내 나라의 독창적인 말과 글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누구든 쉽게 배우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을, 그러한 작업을
하고 싶다. 전시장에 와서 발길을 멈추고 '저런 것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
혹은 '저렇게 하면 참 재미가 있겠네' 하는 기분이 들도록 사람들과 편하게 만나고 싶다.
유식하고 세련된 문체와 내용으로 관객을 주눅들게 하고
'무식하게 이것도 몰라?' 하는 식으로 내쫓기보다는 누구든 '나도 한 번 해볼까?'
'아하 이렇게도 쓸 수도 있구나' 라고 속삭이도록 하고 싶다.
너무 빠르고 바쁘게 변해가는 세상에 누군들 어렵고 까다로운 것에 쉽게 다가설 것인가.
서예가 그렇게 엄숙하고 근엄한 얼굴로 대중에게 다가설 수 있을까?
'참 좋은 계절입니다' 좋은 만남, 함께 나누는 기쁨, 당신만을 위해서,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이런 정겹고 따뜻한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러분 함께 붓을 들고 속삭여 보세요. 우리의 아름답고 무궁한 언어의 바다에
노를 저어 항해를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새천년을 향해서 힘차고 새롭게 나아가 보세요.
여러분 모두를 최고의 승객으로 모십니다.
3. 법첩 속에 녹아있는 회화성을 찾아 - 손호근
서예는 선의 예술이다. 좋은 선을 표현하려면 전통서예의 기본을 충실히 해야 한다.
다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법첩 속의 보이지 않은 이면의 본질과 회화성을
찾아내야 한다. 전통이란 모방이 아니고, 정신을 이어받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법의 격식에 얽매어 일반화, 규격화된 속에서는 참된 예술이 나오질 않기 때문이다.
고전을 복고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지배하는 인식론으로부터
인류의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예술을 읽어 내고 끌어내며, 창조해 내야 하는 것이다.
정신이란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의미, 목적 또한 물질적인 것을 초월한 영적인
존재이듯이, 형상에서 출발한 한자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봄산은 봄산대로의, 겨울산은 겨울산 나름의 빛깔이 있듯이 그 내면의 세계를 눈으로
보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껍데기를 버리고 나 자신만의 빛깔을 찾아야 한다. 변화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다.
또한 예술은 시대적 감각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한자야말로 보는 글이요, 구경하면서 쓰는 글이다.
즉 한자야말로 동양인들의 영원한 봄의 예술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 모양들은 의미를 파생시킨다. 그리고 그 모양들이 조합되는데 따라
그 의미의 복합성은 증대된다. 그리고 그 조합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 백남준 - 형상을 축소하여 문자언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보면, 서예를 익히는
그 방법 자체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한자는 상형문자가 그 뿌리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인 것보다는 생략적이고 함축적이며, 간결한 느낌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미적 감수성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표현 양식을 확립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에 들어와 있는 형상을 그 내부에서 분열, 해체와 재구성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나타내는 것이다.
다름 아닌 관념의 세계에서 싹트는 자유스러움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창작성에
대한 이해의 눈이 열리게 될 것이다.
4. 필묘입신(筆妙入神)의 망망대해를 향해 - 신진기
내가 처음 붓을 잡은 것은 선비정신과 창조정신을 바탕으로 심신 수양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틀에 박힌 듯한 법첩에 의존한
활자체식의 서체만을 답습하다 보니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정신문화 발전에 버팀목이 되어야 할 서예를 다수의 선배님들 마저도
사대(事大)답습의 틀에 묶여 예술인의 생명인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래서 고정된 틀을 벗어나 보다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현대서예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먼저 현대서예는 전통서예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현대 서양화에서 그 기법과 표현방법을 흡수하여
축적된 전통 위에 새로운 장르를 정착, 나의 내면에 숨어 있는 예술성을 화선지에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다. 박토의 땅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고법의 묘리를
조형적으로 표현해 한국서단은 물론 세계 속의 예술문화로 꽃피워 보고자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현대서예를 마치 글씨예술의 이단인양 무조건적으로 배척하고 사대답습만 주장하던
이들도 최근에는 현대서예에 서서히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현대서예의 가치가 예술적으로 확인된 셈이다. 피카소가 비구상 작품을 처음
발표했을 때 비난과 질타를 수없이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구상에서 어떤 돌파구를 추구하던 작가들이 비구상에 관심을 가지면서
피카소의 예술성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 작품들은 오늘날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현대서예에 대한 관념도 바뀌어야 한다.
각자의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인데 한 사람이 쓴 듯한 서체들로
가득메운 전시장의 풍경.... 그 속에서 참된 예술의 혼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21세기 문턱에 선 지금. 한국의 서예가 사대답습만으로 세계 속의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을 까? 피카소가 비구상 작품에 자신의 사상과 철학적 정신을
표현했듯이 현대서예도 작가 자신의 예술세계로 자유롭게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의 서예가 세계 속의 예술로 우뚝 설 수 있는 길이 아닐까?
나는 앞으로 현대서예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선한 충격과 희망을 주기 위해
필묘입신 (筆妙入神)이란 망망대해를 향해 끝없이 항해할 생각이다.
전통서예(특히 갑골과 금문 그리고 초서 등)의 바탕 위에 서예의 기본인 일회성과
찰나성, 끝없이 뻗을 수 있는 무한성을 각양각색의 다양성으로 끊임없는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공간과 여백을 먹의 농담과 부재료를 곁들여 사상과 혼을 담아
작품을 완성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5.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누리는 자유 오주남
먼저 과거 지나친 보수와 답습의 성향에 깊은 반성이 필요할 것 같다.
몸은 21세기 사이버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의식은 진(晉)․당(唐)에 놓고 왔다면
그 사람은 분명 과거에서 온 귀신도 아닌 현재를 사는 정상인도 아닌 사람으로
이중고에 시달리는 사람일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과거의 유산인 전통이란
오늘을 사는 바탕이어야 하는 것이지 오늘을 사는 사람이 과거로 회귀해버린다면
역사의 발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비단 서예에서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의 서는 이미 실용성을 떠났다고 본다.
현재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의 사용 범위에서 추사체나 소전체를 모른다.
다만 안상수체나 윤체를 알고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서예는
실용이 아닌 정신성이 바탕되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정신성과 하나 되어야 할 것은
예술로서의 가치와 형식을 정립해 나아가는 일이다.
전통성의 흡수에서 현대성의 전개를 놓쳐버린다면 우리는 돌이킬수 없는 역사의
오류를 재현하게 될지 모른다. 많은 수련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표현을 위한 고뇌와
고독의 싸움으로 자신을 소진시켜 가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 아닌가.
철저한 구상에 대한 탐구 없이 추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서예또한 전통이
부재한 현대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리라 믿는다. 더 이상 모래 위에 집을
지으려는 망상은 집어치우고 든든한 대지 위에 탄탄한 기반을 다지자.
서예가 천년 이천년 무너지지 않은 성전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전통에 대한 철저한 본질규명이 없고서는 현대도 등을 돌릴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전통이라고 해서 그 비밀을 그리 쉽게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옛 글씨의 한 획 한점을 생명처럼 고귀하게 지켜왔으나 그것이 한가닥 고정된 시각으로
우리를 법이란 감옥 안에 가둬버린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강한 배신감을 느끼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전통을 보는 눈이 잠들어 있어선
안될 것이다. 천재는 전통에서 섬광같은 불빛에 불연 눈을 뜬다.
그는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것이다.
붓과 종이가 만나는 순간적 일회성에서 생기는 바람소리를 나는 즐기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산물들은 또 새로운 상상력으로 나를 자극한다.
그 조형을 보는 눈은 존재의 깊이를 보는 눈이다.
끝으로 지금의 나를 있도록 지도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을 올리고 싶다.
6. 대중성에 대한 사명 유경식
1. 현대서예라는 단어는 당연히 전통적 서예의 반대어가 아니다.
시간적 개념이므로 초학자들을 위하여 확실한 명칭의 정립이 필요하다.
조형서예 또는 추상서예라는 단어가 오히려 더 어울릴 듯 하지만 미술이 쓰다 남은
찌꺼기를 어찌 지고한 서예술이 주워 먹겠는가.
2. 橋流水不流(橋流水不流) -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는다.
흘러야 할 물은 흐르지 않고 정지해 있어야 할 다리는 흘러간다는 이 말은 일반적
사고로는 엉뚱하게 들리지만 해석하면 절대적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선가의 말씀이다.
이 말은 서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문자의 기능적인 면, 붓과 먹,
종이의 재료적인 면, 화면 안에서의 형태적인 면, 표현적인 면이 모든 것의 고정관념을
버릴 때 서예는 새로워진다. 또 그 새로워진 서예는 이 시대의 전통으로 남게 되며
다음 세대로 흘러간다.
3. 변화의 속성 - 모든 예술은 변화의 속성이 있으며 그 변화의 속성은 각 시대의
환경적 지배를 받는다. 예를 들면 100면 전에 서울서 부산까지 한달 만에 도착했지만
지금은 5시간이면 갈 수 있다. 우리의 주거문화도 100년전의 작은 초가집이 아니고
아파트문화로 바뀌었다.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병풍양식은 요즘 젊은이들은 별로
찾지 않는다. 칙칙한 밤색틀에 넣어진 액자보다는 아파트 주거공간에 맞는 밝고 심플한
액자틀을 선호한다. 갑골에서 죽간, 목편으로 또 거기 거 종이로
서예술은 옮겨져 왔는데 이것들은 애당초 서예술을 위하여 발명되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서예가 그 변화된 환경에 적응한 것이다. 즉 더 편리한 재료적 환경으로 옮겨온
것이다.
4. 기능과 형태 - 서예의 두 가지 속성 중 하나는 기능적인 면인데 서예는 문자를
표현하는 예술이고 문자는 인간 상호간의 약속된 부호이다. 세상 모든 전달수단은
언어이므로 과거 출판물이 발달하기전 자필 서예가 이 부분을 담당했었다.
지금도 서단의 원로 서예가들은 가독성을 많이 따지는데 이러한 속성의 산물이다.
서예의 또 하나의 속성은 형태이다. 과거의 서예에서는 자형, 또는 장법으로 발달해 왔다.
하지만 현재는 이 기능적인 면이 출판 의 발달과 매스미디어, 그리고 컴퓨터 등의
출현으로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사진기술의 출현으로 사실적
묘사의 의미가 없어졌고 그로 인하여 르네상스 미술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추상미술이 출현했다.
5. 당위성 - 이러한 환경변화는 당연히 형태미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재료개 념을 뛰어 넘은 다양한 표현수단 역시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는 수단이다.
6. 장식성 - 서품은 과거의 미술품이 그랬듯이 여염집 벽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장식적 속성이 있다.
서예술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는 이러한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더
표현확대가 필요하다.
7. 대중성 확보 - 과거 서가들은 대중성 확보의 문제를 작품의 내용이나 변화를 통해
모색해 왔다. 하지만 이 세상의 볼거리가 얼마나 많은가 모든 정보는 순식간에
소통되고 대중은 선택적으로 볼거리를 택하게 된다.
약간의 흥미만 떨어져도 가차 없이 채널은 돌려지게 된다.
이러한 현대의 자본주의적 문명에 대항하여 어떻게 서예술을 발전시키고
살아남게 하는가가 이 시대 서가들의 사명이요 고뇌인 것이다.
7. 태초문자들과의 즐거운 교감 - 윤영석
오늘도 나는 법첩을 펴놓고 임서를 한다.
'고전에 충실해야지, 법을 지켜야지' 그 옛날 고인들의 정신과 기질에 감동하면서
그 시대를 부러워 해보기도 하고 동경해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정작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보가 흘러 넘치고 구하고만 싶으면
어떠한 것도 구할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다. 아니 너무나 정보가 많아 무엇부터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선호하고
기호화 된 것을 좋아하게 됐다. 물론 나도 이 시대의 사람이니 단순하고 기호화된
것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옛날 태초의 문자들이 아주 단순한 기호였다.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고, 웃음이 절로 나오며,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면서
감탄할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태초의 문자들을 아끼고 즐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그런 교감을 사랑한다.
요즘 애들의 문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 이 생긴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럴 때면 나는 상상을 한다. 그 옛날의 기호와 이 시대의
아이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단순함. 이 두 가지가 내 머릿속에서 교차되는 찰나에
내 삶이 살아 있으며 힘차게 움직이는 짜릿함과 쾌감을 느낀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애 같다고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 좋다.
애들처럼 놀고, 즐기고 하는 것이 곧 나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8. 깊은 문화의 뿌리 위에 현대적 변용을 - 이명식
돌이켜 생각하면 그 해는 나에게는 정말 악몽의 해였다. 이미 예상은 했지만
그 악몽이 나에게 현실로 다가왔던 것이다. 상황을 밝히지 않을 수 없어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이렇게 붓을 들었다. 그 해 정월 초사흘, 아내가 지병으로 세상을 뜬 날.
지금도 생각하면 꿈만 같다. 너무도 오랫동안 아파서 사경을 헤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어진 운명인지, 옆에서 간호가 부족했는지 어쩔 수 없는 운명인 듯 했다.
그때부터였다. 날마다 오후만 되면 술에 만취가 되어 집에 찾아오지도 못할 정도가
수십 번 되는 것 같다. 방황을 한 것이다.
한 사 계월 동안 방황 끝에 마음의 각오를 하기까지 몸인들 오죽했을까.
그때 생각을 한 것이 서예를 하자는 것이었고, 찾은 곳이 예술의 전당이었다.
큰아들을 예술의 전당 야외 결혼식장에서 결혼시켰기에 인연이 된 것이다.
게시판에 서예강좌 회원모집 광고를 보고 입학을 하여 주간에는 일을 해야 하니
야간반에 입학을 해서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전서 석고문을 시작으로
좋으신 강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시작한 것이 오늘을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옆에 학우들한테도 도움을 받으면서 법첩에 의한 연습. 나날이 공을 들여 쓰는
모습이 그저 닮기 위한 과정이라고 해도 잘못된 얘기가 아니다.
그런 답답한 마음과 마음대로 획을 긋고 싶은 충동에
현대서예란 장르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 만나게 되었던 분이
포헌 황석봉 선생님이었다. 나름대로의 잠재력과 순발력으로 작업에 들어가면
손자와 손녀는 아예 멀리 피신을 한다. 먹물이 온 방에 튀기기 때문이다.
법첩의 문자 속에서 먼저 아주 먼 옛날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한국 아니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오는 유구한 역사와 더불어 우리 선조들의
글자예술과 문화예술은 이웃 어느 나라도 추구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하여 왔음을
세계인류가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를 숭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음을
우리 현학들은 잘 알고 있다. 새 시대의 과제로는 전통적 우리 문화와 자연에서
얻는 문자예술의 계승 발전을 위하여 조상들이 남긴 고자들의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맞이하는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때, 우리 서예인들이 현대적 인식 속에
신선한 생명으로 길이 길이 살아 있는 우리 고전이나 한자를 현대문화에 잘 접목시켜
계승 발전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예인들이나 문자예술을 하는 분들이 마음을 모아 서로 협의하고 연구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쉬울 뿐이다. 예를 들면 공모전 전시장에는 법첩에 의한 문자
즉 꼭 닮은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필자는 정말 아쉽게 느껴진다.
그것이 정도임에는 틀림없으나 멍에를 좀 풀고 잠깐만이라도 호흡조절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후학들도 머리를 맞대고 사방을 좀 바라보며
지혜롭게 걸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 고전이나 문화 예술이 더 깊게
뿌리를 내리도록 위로부터의 뒷받침이 필요할 것 같은 생각을 해본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요즈음 한정된 범위 내에서 한자가 사용된다는
얘기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필자도 깊이는 모르겠지만
그 동안 많으신 선배님들과 선생님들께서 많은 제자들에게 옳은 가르침을
해 주신 것을 높고 깊게 사야 현학들의 도리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