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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 전시된다.
첫 번째는 ‘수용과 모색’으로 1922년 김규진 문하에서부터 일본유학 후인 1945년 해방전후시기까지 작가로서의 성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응노가 정식 그림수업을 시작하던 때는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1922년부터 1944년까지, 이하 조선미전)가 일제시대 우리 미술계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시기로, 미술의 입문자에게는 조선미전을 통한 입선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일 수 있는 등용문이였다.
이응노는 당대 서화가였던 김규진 문하에서 사군자를 익히면서 필력을 함양한다. 그러나 조선미전에서 사군자부가 폐지되고 동양화부로 합류되는 변화를 겪으면서 이응노는 1935년경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의 작품은 철저한 사생을 통해 사실주의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전통화를 현대화시키는 일본화단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화풍은 당시 유행하던 사조의 습득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새로운 동양화를 그리고자하는 작가의 노력과 일치한다. 해방이후 이응노는 일본미술의 잔재를 극복하고 전통의 재창조를 목적으로 새로운 화풍을 진작시켜 나간다.
두 번째는 사실적인 특성에서 벗어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여백을 살린 ‘운필의 확장’으로 해방이후(1945년)부터 도불(1958년) 이전까지 전개된 작품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양에서 유행했던 추상표현주의, 앵포르멜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상화의 경향은 초창기 화업에서부터 쌓아온 문인화의 선과 사의(寫意)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어 당시의 현대적인 표현의식을 체득하고 자기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생맥(生脈)>은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의 작품과도 비교된다. 율동적이고 분방한 선이 표현주의에서의 행위적인 운동감과 연결된다. 하지만 순수 추상이 아니라 나무덩쿨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으로 자연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이응노는 운필의 가능성을 확대시켜 추상화시키고 있다.
인물화의 경우에도 인물들이 간략화되고 함축적으로 표현되며 점차 배경이 생략된다. 굵직굵직한 먹선으로 대상을 요약하고 배경을 배제함으로써 인물의 동작 자체의 역동성이 부각시키고 있다. 이 시기의 인물화는 전쟁을 겪으면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대담한 필치로 담아내고 있다.
세 번째는 ‘새로운 재료의 탐색, 동양성의 구현’으로 1960-70년대인 도불 이후의 꼴라주부터 문자추상까지의 작품들이다. 이응노는 한국에서 가져간 수묵화들로 1959년 독일에서 개인전을 갖고 호평을 받는다. 그러면서 본격적인 추상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60년대 초에는 잡지를 찢어 색채별로 모아두거나 한지를 찢어 콜라주를 제작한다.
이것은 서양의 콜라주기법과는 다르게 붙였다 떼어내기도 하고 다시 겹겹이 붙이고 색을 가함으로써 고암은 화면의 전체적인 조화를 꾀하고 있다. 이러한 꼴라주의 질감은 오랜세월 감내해온 고목을 연상시킨다.
1963년부터는 한자의 획을 연상시키는 형태들이 화면에 나타난다. 획은 선명하지 않으면서 형상이 나타날 듯 감춰진 듯 모습을 드러내다가 60년대 후반에는 점차 뚜렷한 형상이 등장한다. 한글, 한자, 아랍문자 등의 문자와 기호들이 자유롭게 해체되고 조형적으로 재구성되면서 새로운 추상적 이미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면과 각이 두드러지고 의도적인 배치와 조형이 이루어진다.
재료 또한 다양해서 작가는 한지 외에도 나무, 타피스트리(tapestry), 도자기, 담요, 천 등의 실험을 끊이지 않고 한다. 그는 형식에 얽매임 없이 모든 재료를 넘나들었다. 꼴라주라는 서양의 기법에 동양의 자연주의적 정신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문인화적 특성 즉 서체를 바탕으로 한 드로잉적 성향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림과 글씨가 일치한다는 동양권의 서화일치사상(書畵一致思想)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네 번째는 ‘자유, 염원, 통일’로 80년대를 위주로 한 군상(群像)작들이다. 이응노화백은 광주민주항쟁을 시발로 군상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하나 보는 입장에 따라 광주를 연상하기도 하고 또는 서울의 학생데모로, 또는 유럽의 반핵운동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이 작품은 어떤 특정한 사건이기 보다는 익명의 다수가 공감하는 자유에 대한 희구이며 작가가 화두로 삼았던 통일 조국에 대한 염원 및 환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암이 이렇듯 특정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추상에서 구상으로 복귀했지만, 민중미술에서 보이는 직접적인 상황의 묘사가 아닌 함축적인 필묵의 세계로 회귀하고 있다.
이러한 군상연작은 1920, 30년대부터 제작해온 묵죽의 필획을 연상시킨다. 묵죽의 댓잎이 사람의 팔과 다리로 화(化)한 것이다. 획과 획이 군상으로 나타나나 한 가지도 동일하지 않으며, 그 움직임에는 작가의 호흡이 느껴진다. 그 필은 정확하고 대담하다. 고암의 생애 후반기에 제작된 군상연작은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담은 기록인 동시에 평생동안 익혀온 직관력이 응축되어 나타난 동양화의 또다른 모습이다.
* 대표 작품
<농가> 1930년대 105x120cm 한지에 수묵담채 부산 진화랑소장
<총석정> 1941년 76x144cm 한지에 수묵담채 부산 진화랑소장
<거리풍경-양색시> 1946년 50x66cm 한지에 수묵담채 개인소장
<생맥(生脈)>, 1950년대, 133x68cm 한지에 수묵담채, 이응노미술관소장
<꼴라주-작품> 1960년대, 72x90cm 캔버스에 종이꼴라주, 담채 국립현대미술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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