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용재총화> 속의 서예와 음악

 #3 서예

  우리나라에 글씨 잘 쓰는 이가 많으나 모범될 만한 사람은 적다.

  金生은 글씨를 잘 써서 細字와 草書와 隸書 모두 뛰어났다. (원문에는 細而毫忽皆精이라고 했다.)

  杏村은 子昂(元, 趙孟頫)과 같은 때의 사람으로서 그 筆勢는 서로 匹敵하였다. 그러나 行書와 草書는 마땅히 양보해야 할 것이다.

  柳巷도 또한 유명하였으니 그의 글씨는 힘차서 晉나라 필법을 많이 체득하였다. 그가 쓴 ‘玄陵碑’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獨谷의 글씨는 다만 면밀할 뿐이다. 80세 때에 ‘健元陵碑文’을 썼는데 필력이 쇠약하지 않았다.

  安平의 글씨는 오로지 자앙을 모방하였는데, 그 글씨의 豪勢롭고 뛰어남이 서로 막상막하여서 늠름한 기상이 날아 움직일 뜻이 있는 것 같다. 중국의 倪侍講(예시강)이 奉命使臣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篇題(편제)’라는 두 글자를 보고 말하기를 “이 글씨는 범상한 솜씨가 아닙니다. 내 이 글씨 쓴 사람을 만나보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안평에게 명령하여 가 만나보게 하였더니 시강이 그의 글씨를 慕仰하여 말하기를 “지금 중국에서는 陳學士가 글씨를 잘 써서 온 중국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王子의 글씨에 비하면 따라가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더욱 禮貌를 갖추어 드디어 글씨를 받아 갔다. 그 뒤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글씨를 사 가지고 왔는데 바로 그 안평의 글씨였다. 안평이 크게 기뻐하고 스스로 만족해하였다.

  그때에 士人 崔興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庾翼(유익)의 필법을 배워 스스로 글씨를 잘 쓴다고 일컬었다. 항상 붓주머니를 갖고 여러 官司와 여러 사람들의 집을 차례로 돌면서 글씨를 써 주었으나 그 글씨체가 추하고 야비하였다. 안평 청하여 글씨를 쓰게 하고는 드디어 찢어서 벽을 발라 버렸다.

  나의 백씨는 姜仁齋(강인재), 鄭東萊와 함께 한때 글씨 잘 쓴다는 이름이 있었다. 강인재는 성품이 본래 글씨 쓰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에 그의 필적은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백씨는 병풍과 簇子를 쓴 것이 많다. 그가 쓴 ‘圓覺寺碑’는 더욱 뛰어났다. 성종이 그의 필적을 보고 “잘 썼구나. 그 이름이 헛되게 얻은 것이 아니로군.” 하였다. 남이 글씨를 구하는 이가 있으면 꺼리지 않고 써 주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流布된 것이 또한 많다. 그러나 글씨의 筆力이 무르고 약해서 볼 만한 것이 없다.

#5 음악

  음악은 여러 技藝 중에 가장 배우기 어려운 것이다. 하늘에서 타고난 소질이 있는 자가 아니면 그 참된 취미를 깨달아 얻을 수 없다.

  삼국시대에 삼국이 각각 음률과 악기가 있었다. 그러나 세대가 아득히 멀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오직 지금의 玄琴은 신라에서 나왔고, 伽倻琴은 金官에서 나왔다. 大笒은 唐笛을 모방한 것으로서 그 소리가 가장 웅장하여 음악의 근본이 되었다. 鄕琵琶도 또한 당나라의 비파를 모방한 것으로서 그 장치는 현금과 같다. 그 줄을 고르고 뜯고 퉁기는 것을 배우는 사람이 어렵게 여겨서 잘하고 고무 격려하지 않으면 견디어 내지 못한다. 典樂 宋太平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향비파를 잘 탔다. 그의 아들 田守가 그 아버지의 手法을 배워서 더욱 절묘하게 연주하였다. 내가 젊었을 때에 伯氏댁에서 그 소리를 들었는데 麻姑가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아서 상쾌하고, 마음이 쏠려서 싫지 않았다. 그러나 都善吉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전수 이후의 사람으로는 오직 도선길만이 서로 비슷하였을 뿐 다른 사람들은 전수를 따르지 못하였다. 지금은 잘하는 사람이 없다.

  당비파는 전수가 역시 제일 高手이고, 도선길도 그와 함께 명성이 높다. 지금의 광대[伶人]에는 당비파에 유능한 사람이 많다. 士庶人으로서 器樂을 배우는 경우와 같은 때에도 반드시 비파를 먼저 시작한다. 그러나 별로 뛰어난 사람은 없다. 오직 金臣番은 도선길의 솜씨를 다 배워서 호기스럽고 자유방종한 맛은 오히려 도선길보다 낫다. 역시 지금도 그가 제일 고수이다.

  현금은 기악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서 음악을 배우는 門戶와 같은 것이다. 盲人 李班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世宗이 그의 현금의 재능을 알아주어서 禁中에 드나들었다.

  金自麗라고 하는 사람도 또한 현금을 잘 탔다. 내가 젊었을 때에 그 현금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흠모하였으나 배우지 못했다.

  이제 만약 광대의 음악으로써 음악을 평론한다면 古態를 면치 못할 것이다. 광대 김대정, 이마지, 권미, 장춘은 다 한때의 사람들이다. 그때에 세상에서 논평하기를 “대정의 간엄함과 마지의 오묘함은 각기 극치에 도달하였다.”고 하였다. 대정은 일찍 베임을 당하였으므로 나는 그의 연주는 미처 듣지 못했다. 권미와 장춘은 다 凡庸한 솜씨였다. 오직 마지만은 士林의 소중히 여기는 바 되었으며 임금의 사랑을 입어 두 번이나 典樂이 되었다.

  나는 희량, 백인, 자안, 침진, 이의, 기채 주지와 함께 마지에게 가서 배웠는데 날마다 만났으며 어떤 때에는 함께 같이 자기도 하곤 하여 그 소리를 매우 익숙하게 들었다. 그 소리가 현금의 밑바닥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 같아서 뜯고 퉁기는 자취가 없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심신이 놀라고 두려워진다. 참으로 뛰어난 技藝였다.

  마지가 죽은 뒤에도 그 소리만은 세상에 널리 퍼졌다. 지금 사대부 집의 계집하인 중에도 또한 잘 타는 자가 있다. 다 마지가 남긴 법을 배운 것으로 맹인 악공들의 비야한 습성은 없다. 전악 김복과 악공 정옥경이 가장 잘 타서 당시의 제일가는 고수였고, 기녀 상림춘이란 자도 또한 이에 가까웠다.

  가야금은 황귀존이라는 사람이 잘 탔다고 하나 나는 듣지 못했다. 또 김복산이란 사람이 타는 것을 들었다. 그때에는 나는 그 타는 소리가 가슴에 파고들어서 잊을 수 없었으나 지금 보니 역시 또한 너무 질박하고 우직하다. 근래에는 늙은 召史 한 사람이 있는데 公侯의 집에서 쫓겨 나와서 그의 독특한 가야금의 음운을 비로소 세상에 퍼뜨렸다. 그 음률이 미묘해서 아무도 그에 필적한 사람이 없다. 마지도 옷깃을 바로잡으면서 스스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지금은 정범이라는 자가 있는데 맹인들 중에서는 가장 잘 타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세종조에 이승련, 서익성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승련은 세종에게 그 재주가 알려져서 군직을 받았으며 익성은 일본에 가서 죽었다.

  지금 김도치라는 사람이 있는데 나이 80세를 넘었으나 그 소리가 오히려 쇠약하지 않으므로 그를 絃樂의 巨擘으로 推重한다.

  옛날에는 김소재라는 사람이 있어서 가야금을 잘 탔는데 또한 일본에 가서 죽었다.

  그 뒤로는 폐지되어 끊어진지가 이미 오래되었더니 지금 임금께서 여기에 유의하여 가르치니 잘하는 자가 서로 이어 나오고 있다.

  대체로 말해서 음악을 하는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五音과 十二律의 근본을 알아서 이것을 활용하는 자가 있고, 節奏의 완급을 알아서 樂譜를 만드는 자가 있고, 솜씨가 뛰어나서 타고난 소질이 정묘한 자가 있다.

  황효성은 근본을 알아서 잘 활용하였으며 또 느리고 빠른 것을 알아서 악보를 만든 것이 많다. 세조에게 知遇를 얻어 벼슬이 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지금 박곤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錦川君의 서자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워 비록 광대는 아니나 음악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보는데 그의 재주가 황효성보다 낫다. 한때의 좋은 스승이 되니 배우는 사람들이 그 문하에 모여 들어 많은 名手들을 배출시키고 있다. 또한 지금의 第一級의 고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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