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비:장수왕 3년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능과 함께 국내성 동쪽 언덕(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세운 사면비석이다. 비석은 이수가 없이 대석과 비신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5m이고 비신은 너비 1.35m. 높이 6.39m에 이르는 동양최대의 비석이다. 비신의 4면에는 44행 1,775자의 문자를 10에서 15cm 정도의 크기로 음각하였는데, 글씨의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모눈종이처럼 칸을 나누어 놓았다. 이 비석은 조형적 아름다움은 없으나 고구려사 및 동아시아교섭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비석이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는 고구려의 멸망과 만주의 상실로 잊혀져 있다가 조선 세종조에 편찬된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조선초에 알려지게 된다. 그 후 비석은 1880년경 청나라 농부에 의해서 재발견되어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다. 자연풍화에 의한 마모와 1882년 경 만주를 정탐여행중이던 일본군 중위 사까와 카게노부에 의한 악의적인 비문의 변조. 무분별한 탁본. 보호관리의 잘못으로 훼손이 많이 되어 과학적인 보호대책이 시급하다. 능비의 발견으로 한.중.일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으나, 고구려사나 동아시의 교섭사 연구보다는 일본측이 식민사관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비문을 조작. 오독하여 "일본이 369년 가야를 정복하고 200여년 동안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함으로 그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주로 이루어 졌다.

 

동북공정(東北工程)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중국의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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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우리 나라가 고구려와 발해를 우리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구려와 발해의 구성원들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국이 고구려와 발해를 자신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고구려와 발해가 지금의 중국땅에 있기때문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입니다. 현재와 이어진 과거의 일들이 바로 역사, 지금과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이어져있는 민족사라는 것이죠.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동북공정을 왜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첫째는 지금 중국이라는 나라는 우리 민족처럼 공통된 조상이 없어 구심점이 없습니다. 사회주의경제가 붕괴되고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민족보다는 당장의 경제적 이득을 최우선시하는 풍조가 생기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공산당이 아닌 공통된 구심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파룬궁 탄압도 같은 맥락이랍니다. 이것은 지난 40년동안 눌러져왔던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등 사회갈등이 구체화되어 실현되었을 경우 구심점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약점을 만들어냅니다. 서로가 남인데 한 국가로 존재할 필요가 있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족사를 강조하는 역사관점을 채택한다면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분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옛부터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면 자유와 같은 가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경제적인 부가 갖추어진다면 더 이상 다른 민족과 공유할 필요없이 독립하려고 하는 게 가장 인간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적 진실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소수민족으로 탄압받고 있었던 과거의 극복은 그 사람들의 소망과도 같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네덜란드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후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미국도 영국의 식민지의 역사에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후 영국으로 부터 독립전쟁을 일으킵니다.

두번째 이유는 민족이란 구심점으로 뭉쳤을 경우에 그 여파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18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300여개의 연방국가로 조깨어져 있어 유럽의 3류 국가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독일연방의 결합이란 가치를 걸어 독일통일전쟁에 착수합니다. 독일연방이란 구심점과 보다 중요한 게르만족이란 구심점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대단했습니다.독일은 통일이후에 세계대전을 2번 일으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은 두 번의 세계대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구심점은 민족이라는 가치였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계에 대해 그 힘을 과시한 것 또한 민족이라는 구심점이었습니다. 핏줄, 민족이라는 가치는 또한 역사로써 가치를 증명하였습니다. 민족이라는 구심점이 가지는 힘입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세번째 이유는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의 붕괴입니다.역사적으로 살펴본다면 소련의 붕괴가 대표적이죠.소련은 중국과 유사점이 많습니다. 소련 역시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였습니다.- 중국도 다민족국가입니다. 구심점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중국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역시 공산주의입니다.

이제 이러한 소련의 붕괴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개방정책과 자본주의 경제가 발달하면서 이데올로기이란 구심점이 사라지게되고 소련도 붕괴되어 15개의 국가로 갈라졌습니다 또한 연방의 붕괴와 함께 소련힘도 대단히 약해졌습니다. 예전의 미,소 냉전시대에 보여준 소련의 국력에 비하면 지금의 러시아의 힘은 미약하기만 합니다. 중국 또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개연성이 보다 높을 것입니다. 현재 중국은 각종의 사회갈등으로 몸살을 앓고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 역시 개혁과 개방정책 이후의 일이랍니다. 중국은 마땅히 대비책을 생각해야합니다. 타산지석이라는 교훈을 알고있기때문입니다. 그 대비책의 하나로 저는 동북공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는 이쯤되면 명확하리라 생각됩니다. 러시아의 전철을 밟지않고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강국을 이룩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의 공동체가 가지는 힘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분열된 국가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합점을 중국은 중국 영토와 중국이라는 국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심점이 가지는 무시무시함을 중국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합니다. 하나의 가치아래 살아온 사람들에게 다시 하나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떠나 같은 중국땅에서 살고있고 있으니 서로 뭉쳐야한다는 것이 중국의 속셈이겠죠. 사회갈등의 본격적인 표출에 대한 대비와 사회갈등의 피해의 마지노선을 그어놓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현재 중국은 자신의 조상을 세명으로 늘렸답니다. 민족이 많은 만큼 같은 조상일 수 없고 하나의 핏줄에서 출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중국은 자신은 황제의 조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한족의 구심점을 만들 수는 있으나 다른 소수민족의 구심점은 사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여기에 두 명을 더해 어떻게든 중국이라는 공동체의 가치아래 여러 민족들의 같은 구심점을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고구려에 대해서 중국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라는 무리한 수단을 쓰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치우도 자기의 조상이고 우기면서 말이죠.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겠죠?

고구려가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부여도 발해도 또한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역사유물로도 증명이 되고 있지만 그것보다도 우리의 머리 속에서 확고하게 자리잡아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사로써는 상대가 안되니까 중국이라는 지역을 강조해 승부를 볼려고 하는 것이랍니다.

역사를 떠올린다면 어떤 것이 가장 먼저 떠올려집니까? 그것은 바로 민족사입니다. 민족사가 뿌리라면 중국이 노력하고 있는 가치는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어떻게하더라도 고구려가 우리 조상이라는 진실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 근거는 이미 밝혀진 것과 같구요. 때문에 중국영토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중국사라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민족사로써 고구려와 발해가 우리역사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기자 조선은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적 존재이고 고고학적으로도 중국의 청동기 문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 존재한다.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가 존재하였다.

2.고구려 적성층 문화와 홍산문화는 3000년 가량 연대 차이가 있음 고구려를 건국한 주민 집단은 중국에서 이주한것이 아니라 본래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농경을 하던 예맥족 의 일원이다. 중국의 구성민족은 서화족으로 민족이 다르다.

3.조공과 책봉은 당시 고구려와 중국의 외교 형식의 하나였을 뿐 고구려는 독자적으로 자신의 세력권 안에 여러 국가나 세력을 포용하고있었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자신을 천손이라고 칭하고 있다. 천자를 칭하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관이 전제되어있기때문이므로 지방정권은 성립하지 않는다.

4.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은 국익을 추구하는 고구려의 대륙정책과 수,당의 세계정책이 충돌하여 빚어진 동아시아의 국제전 전쟁규모가 백만이 넘고 수나라의 경우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삼국사기 본문에서 당나라 또한 고구려에 보내는 국서를 보면 "고구려의 영토는 본래 자신들이 땅이었으므로 다시 찾아야한다"라고 하여 자신과 고구려를 구분하여 생각하고 있다.즉 다른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5.상당수의 유민이 중국으로 간것은 사실이지만 신라로 내려와 한국사의 흐름 속에 융화된 수많은 사람도 있었다 중요한것은 망국인인 그들이 자의식으로 택한 길이 무엇이었냐와 고구려인으로의 자의식이 있었는 하는 문제이다.

6.발해는 황제를 지칭하고 독자적으로 연호사용 고구려와 비슷한 풍속과 주거문화 등을 유지 계승하였다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이고 건국한 사람도 고구려의 장수인 대조영이다. 일본에 대한 국서에도 발해황제는 자신을 고려국왕으로 칭하고 있다.

7.왕건은 선대가 고구려 혹은 발해의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국호를 고려라 한것도 고구려 계승 의식에 의한 것이다 고려의 북벌정책도 여기에 의한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본래 이름은 고려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高를 붙인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과 조선의 구분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이것은 역사의 상식이기도 하다.



이상 7가지 근거를 보면 역시 상대가 안되고 있습니다. 이 7가지 근거는 바로 중국이 주장하고 있는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반반근거이기도 합니다. 민족사로써는 중국은 반드시 한계가 다다르게 됩니다. 앞으로는 역사의 관점을 달리하여 동북공정을 할 지도 모릅니다. 바로 "중국영토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중국사이다"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이것은 역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얘기랍니다. 전문가가 아닌 한 그것은 역사로서의 가치도 민족의 구심점이 될 수도 없습니다.동북공정을 하려한 이유와도 점점 멀어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국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하나의 해프닝이 될 지도 모릅니다. 말그대도 자멸입니다. 통일한국에 대한 만주영향력약화, 동북아시아 불록의 경제가 뿐만이 아닌 제2의 미국이라는 중국의 또 다른 목적이 멀어지고있습니다. 여기는 역사의 정통성이나 조상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아시아라는 사실을 망각하여 자가당착적인 짓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동북공정의 대응방안! 그것은 민족사로써의 강도높게 대응하는 것 입니다.


한국 고대 사학회 보고서
권상호
고구려의 벽화그리는 기술과 그림솜씨를보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고 극찬하는 고구려사람들이 초상화를 안그려놨을리가 없죠. 그게 없어졌거나 어딘가에 있겠죠.

참 광개토대왕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광개토호태왕이라는 표현이 옳을듯합니다.
태왕이란 위대해서 태왕이 아니고 중국에서 "황제"이러는 것처럼 하나의 명사입니다. 그러나 호태왕비에서 시조 추모성왕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태왕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는 알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호태왕에서 호는 광개토대왕할 때처럼 앞에다 대자 붙여주는 것 하고 같은 것이죠.
그래서 광개토호태왕이라고 불러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왕들도 장수태왕 이런 식으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고구려사람들이 새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와 모두루묘지명 등에 나와 있습니다. 그냥 광개토왕도 아니고 대왕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두루묘지명에서 광개토호태성왕이라는 표현을 볼 때 성 또한 호처럼 높여주는 말로 보입니다.
권상호
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 : 광개토호태왕비 연구의 쟁점 : 제작자 이기동, 이근우, 김태식, 박승범, 여호규, 전촌황일 (저작시기: 1996.01)
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 : 발간사. 서길수 (저작시기: 1996.01)
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 : 광개토호태왕비 탁본과 비문에 관한 연구. 박승범, 서영수, 박진석, 김양동, 이희덕, 조을녀아박 (저작시기: 1996.01)
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 : 광개토호태왕 시기의 고구려 사회 ; "광개토호태왕" 왕호와 세계관 : 논문. 박성봉 (저작시기: 1996.01)
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 : 광개토호태왕 시기의 고구려 사회. 김현숙, 박승범, 서영대, 공석귀, 조인성, 신형식 (저작시기: 1996.01)
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 고구려연구회 지음  | 학연문화사

廣開土太皇陵碑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 浮龜. 應聲卽爲連 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 , 履龍頁昇天.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창조하시었다.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녀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시니, 나면서부터 성스러운□□□□□. □ 명으로 수레를 타고 남으로 순행하다가, 길에서 부여의 엄리대수에 이르렀다. 왕이 나루에 이르러 말하길,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녀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은 떠 올라라." 하니 소리에 응하여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 떠 올랐다. 그러한 연후에 건너가 되고, 비류곡의 홀본 서쪽의 성위에서 도읍을 정하였다. 세상에서의 위치를 즐기지 않아, 황룡을 아래로 보내어 왕을 영접하니, 왕이 홀본동쪽에서 용의 머리에 올라 타고, 하늘로 승천하였다.


顧命世子儒留王, 爾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 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于皇天, 武威被四海. 掃除□□,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昊天不弔, 有九, 寔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示後世焉.

고명을 세자 유류왕이 받들어, 도로써 다스림이 일어나고, 대주류왕이 나라의 기업을 받들어 이었다.
전하여 십칠대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섰다. 18세에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영락대왕이라고 불렀다. 그 은혜로움이 황천과 같고, 무와 위엄은 사해에 떨치었다. □□를 제거하여 여러백성이 그 업에 종사할 수가 있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성하여, 오곡이 풍성하였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삼십구세에 승하하시니, 깁인년 구월 29일 을유에 안장하였다. 비석을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새기니, 후세에 보이는 것이다.

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於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 遊觀土境, 田獵而還.
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말씀하기를, 영락 오년 을미년에 왕이 비려가 □사람을 □하지 않자, 몸소 이끌고 가서 정벌하였다. 부산을 지나, 산을 지고, 염수위에 이르러, 그 삼부락 육칠백령을 깨뜨려, 소,말, 양을 수 없이 얻었다. 돌아 오는 길에 양평도를 지나 동으로, □성, 역성, 북풍에 와서, 왕이 □을 준비 시키고, 경치를 즐기며, 사냥하며, 돌아왔다. 백제와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써 조공을 하여왔는데, 왜가 신묘년이래로, □을 건너 왔기 때문에 백제를 파하고, (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以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軍□□首, 攻取寧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 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 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 □□城, □而耶羅城, 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 □□□,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 □其國城.

육년 병신에 왕이 몸소 □군을 이끌고, 잔국(백제)을 쳤다. 군이 □□하여, 영팔성, 구모노성, 각모노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노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막야라성, 혈□□, □□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 □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림성, □□□, □□□,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를 공취하고, 나라의 국성을 □하였다.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잔이 의로써 복종을 하지 않고, 감히 나와서 전투를 할려고 하니, 왕이 위엄과 노여움으로 아리수를 건너, 자박성에 파견하였다. □□□□ 성을 둘러 싸자, 잔주가 괴롭고 핍박을 받아 남녀 일천명과, 세포천필을 받치며, 무릅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길 이제부터 따르겠습니다 하니 영원히 노비나 손님으로 간주하였다.
태왕께서 은혜로써 □하고 미혹한 허물을 용서하니, 그 후로 정성으로 따름을 기록한다. 오십팔성과 칠백촌을 얻고, 백제왕의 아우와 대신 열명과 함께 서울로 돌아 왔다.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帛1)愼土谷, 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5)遣使還告以□計.

팔년 무술에 편사를 파견하여 백신토곡을 살피게 하여, 막□라성과 가태라곡을 노략질 하여, 남녀 팔백여명을 얻었다. 스스로 이에 와서 조공하고, 일을 묻게 되었다. 구년 을해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통한후 한 무리가 되자, 왕이 하평양으로 순수하였다. 신라가 사신 백왕을 보내어 말하길, "왜인이 나라의 지경에 가득하여 성과 못이 부셔지고, 깨져 백성이 노비로 되니, 왕께서 돌아와 목숨을 구해주십시오."하였다. 태왕이 은혜롭고 자애로와 그 충성스런 정성을 불쌍히 여기어, 사신을 파견하여 □□로써 돌아올 것을 알렸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2)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新羅城□城, 倭寇大潰. 城□□□□□□□□□□□□□□□□□□盡□□□安羅人戍兵新□□□□其□□□□□□□言□□□□□□□□□□□□□□□□□□□□□□□□□□辭□□□□□□□□□□□□□潰□□□□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 □國 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朝貢.

십년 경자에 보병과 기병 오만을 파견하여, 가서 신라를 구하였다. 남거성에서 나아가 신라성에 이르렀는데, 왜인이 그 가운데 가득하였다. 관군이 이르자 왜적은 물러갔다. □□□□□□□□□ 급히 뒤쫓아 임나가라에 이르러 발성까지 쫓으니, 성이 곧 복속하자 돌아왔다. 안라인으로 □와 신라성, □성을 병사로 지키게 하자,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 옛날 신라 매륵이 직접와서 나라의 일을 보고하지 않았는데, 국강상광개토태왕이 매금에게 □□□□□□□□조공하였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 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住城, □城, □□□□□□城.

십사년 갑진에 왜가 법을 어기고, 대방의 경계에 침입하였다. □□□□□□□□□, 왕이 몸소 이끌고, □□하여, 평양에서 나와 □□□하니 서로 만났다. 왕이 길을 끊고 찌르자, 왜구가 무너지고 패하니, 베고 죽인자가 수도 없었다.
십팔년 정미에 보병과 기병 오만을 파견하여, □□□□□□□□□하고, 전쟁을 하니, 베고 죽이어 싹 쓸었다. 갑옷 일만여개를 얻고, 군장비는 셀수 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 누성, □주성, □성, □□□□□□성을 깨뜨렸다.


卄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往討. 軍到餘城, 而餘□國駭□□□□□□□□□王恩普覆. 於是旋還. 又其慕化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社4)婁鴨盧, 肅斯舍[鴨盧 ],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이십년 경술,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때에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왕이 몸소 이끌고 가서 치니, 군사가 여성에 이르르자, 부여가 놀라, □□□□□□□□□하니 왕의 은혜가 널리 미치자, 이에 돌아 왔다. 또한 그 모화되어 관을 따라온 자가 있으니,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이다. 무릇 육십사개성과 일천사백부락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守墓人烟戶. 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連二家爲看烟, 俳婁人國烟一看烟 三, 梁谷二家爲看烟, 梁城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爲看烟, 新城三家爲看烟, 南蘇城一家爲國烟. 新來韓穢, 沙水城國烟一看烟一, 牟婁城二家爲看烟, 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 勾牟客頭二家爲看烟, 求底韓一家爲看烟, 舍 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 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 客賢韓一家爲看烟, 阿旦城, 雜珍城合十家爲看烟, 巴奴城韓九家爲看烟, 臼模盧城四家爲看烟, 各模盧城二家爲看烟, 牟水城三家爲看烟, 幹 利城國烟一看烟三, 彌鄒城國烟一看烟, □□□□七, 也利城三家爲看烟, 豆奴城國烟一看烟二, 奧利城國烟一看烟八, 須鄒城國烟二看烟五, 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 太山韓城六家爲看烟, 農賣城國烟一看烟七, 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 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 城國烟一看烟八, 味城六家爲看烟, 就咨城五家爲看烟, 穰城卄四家爲看烟, 散那城一家爲國烟, 那旦城一家爲看烟, 勾牟城一家爲看烟, 於利城八家爲看烟, 比利城三家爲看烟, 細城三家爲看烟.

수묘인(무덤지키는 사람) 연호. 매구여 백성은 국연 2, 간연 3, 동해가는 국연 3, 간연 5, 돈성은 4집을 간연으로 하고, 우성은 1집을 간연으로 하고, 비리성은 2 집을 국연으로하고, 평양성은 국연 1, 간연 10, 자련 2 집은 간연, 배루인은 국연 1, 간연 43, 양곡은 2집을 간연, 양성은 2집을 간연, 안부련은 22 집을 간연, 개곡은 3 집을 간연, 신성은 3 집을 간연, 남소성은 1 집을 국연으로 한다.
새로 들어온 한예는, 사수성에서 국연 1, 간연 1, 모루성 2 집을 간연, 두비압잡한 5 집을 간연, 구모객두 2 집을 간연, 구저한 1 집을 간연, 사조성한예는 국연 3, 간연 21, 고모야라성 1집을 간연, 경고성은 국연 1, 간연 3, 객현한은 1 집을 간연, 아단성, 잡진성을 합쳐서 10 집이 간연, 파노성한 9 집을 간연, 구모노성 4 집을 간연, 각모노성 2 집을 간연, 모수성 3 집을 간연, 간저리성은 국연 1, 간연 3, 미추성은 국연 1, 간연 □, 야리성 3 집을 간연, 두노성은 국연 1, 간연 2, 오리성은 국연 1, 간연 8, 수추성은 국연 2, 간연 5, 백잔남거한은 국연 1, 간연 5, 태산한성 6 집을 간연, 농매성은 국연 1, 간연 7, 윤노성은 국연 2, 간연 22, 고모누성은 국연 2, 간연 8, 전성은 국연 1, 간연 8, 미성은 6 집을 간연, 취자성은 5 집을 간연, 삼양성은 24 집을 간연, 산나성은 1 집을 군연, 나단성 1집을 간연, 구모성 1 집을 간연, 어리성 8 집을 간연, 비리성 3 집을 간연, 세성 3 집을 간연으로 삼았다.


國 上廣開土境好太王, 存時敎言, 祖王先王, 但敎取遠近舊民, 守墓 掃, 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 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 國烟 看烟三百, 都合三百 家.

국강상광개토경호태황이 이 때에 말씀을 하여 가르치기를 "단지 멀거나 가까운 백성들은 이 가르침을 취하여, 묘를 지키며, 관리하도록 하라. 내가 생각하기에 백성들이 전하여 마땅히 쇠하여 지니, 만일 만년 후에도 편안히 묘를 지키는 자가 있으면, 내가 몸소 한예의 땅에 내려와 순수하여 취할것이니, 명령에 준비하여, 관리하라."말의 가르침이 이와 같으니, 이로써 명령과 같아, 한예2백이십가를 취하였다. 생각하기에 그 법칙을 알지 못하니 다시 옛백성 일백십가를 취하였다. 새롭고 옛날의 수묘호를 합하여 국연이 30 이요, 간연이 삼백이니, 도합 3백 30가 이다.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 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스스로 선왕이래로, 묘위에 석비를 세우지 않아, 수묘인의 연호들이 서로 섞이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조상왕을 위하여 묘위에 비를 세워, 그 연호를 세기니, 령이 섞이지 않았다. 또한 제도로써 수묘인이 된 후에는 전하여 팔을 수가 없다. 비록 부유한자가 있어도, 역시 살수가 없다. 이 명을 어기는 자는 판자는 형벌에 처하고, 산자는 제도로 수묘의 하도록 하였다.

□는 알아보기 힘든 부분입니다.
권상호
(第一面)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郎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
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
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
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號爲永樂大王恩澤洽于皇天武威振被四海掃除□□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
弔卅有九寔駕棄國以甲寅年九月廿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
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五備□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
首攻取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
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
(第二面)
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
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
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
歸穴□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敎遣偏師觀」
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盡□□□安羅人戌兵新□□□□其□□□□□□□言」
(第三面)
□□□□□□□□□□□□□□□□□□□□□□□□□□辭□□□□□□□□□□□□□潰」
□□□□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
□□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
□城廿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國駭□□□□□□□」
□□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
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
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
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廿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
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
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
(第四面)
    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一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
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太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廿二古牟婁」
城國烟二看烟八瑑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彡穰城廿四家爲看烟散那」
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
家爲看烟國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廿家慮」
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卅看烟三百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
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
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해석문>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王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391년)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破)하고 (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首都)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帛愼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命)을 받았다.
영락(永樂) 9年(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 :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벌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4년(404년) 갑진(甲辰)에 왜(倭)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 : 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그 出身地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民은 4가(家)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家). 자련(訾連)의 2가(家)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무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家)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家)이고 간연(看烟)이 300가(家)로서, 도합(都合) 330가(家)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떄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 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 비신(碑身)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上古史),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우리는 '광개토왕릉비'에 대하여 잘 알고는 있으나

그 해석문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내 자신도 비문을 임서하면서

내용보다 글자 한 자 한 자에 치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 '문자향'이니 '서권기'를 예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라도 차근차근 읽고 되새겨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자랑스럽게 여겨야겠다.

 

* 자료 정리에 애쓰신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