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동면 천전리와 언양읍 대곡리에 흐르는 대곡천은 경주로 해서 울산을 경유하여 양산으로 빠져나가는 경부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리다가 사연댐에 잠시 갇힌 뒤에 태화강에 물을 보태 동해로 빠져나간다. 댐이 생기기 전에는 물길이 수월하게 바다로 이어졌던 셈이다. 대곡천은 천전리와 대곡리를 흐르면서 여러 차례 곡류하여 곳곳이 아름다운 계곡 경치를 만들어내는데, 특히 천전리의 계곡 입구는 비교적 넓게 하늘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 계곡 안쪽으로 꺾어들어가면서는 마치 그윽한 굴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가 하면 계곡 한쪽에는 반석이 널찍하게 깔려 있어 가족 단위로 물놀이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천전리에서 발견되는 놀라움과 반가움의 원천이 물놀이하기 좋은 경치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때 지구 위를 주름잡았던 공룡이며, 흔히 우리가 원시인이라고 부르는 선사시대 인류가 남긴 바위그림이며, 신라 화랑이 남긴 자취이다.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길고 긴 세월 동안 오로지 살 만한 곳, 쉬어갈 만한 곳은 여기 천전리뿐이었다는 듯 이들 모두가 대곡천으로 모여든 것이다. 천전리 대곡천변에는 이처럼 공룡시대부터 문명시대까지의 인류사가 압축되어 있다.
공룡들이 발자국을 남긴 곳은 흐르는 내를 따라 계곡으로 들어가며 왼쪽으로 널찍널찍하게 깔려 있는 반석이다. 거뭇거뭇한 반석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듬성듬성 크고 작은 웅덩이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지난 1995년 처음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확인된 공룡의 발자국은 200여 개다. 이들 공룡은 1억 년 수천만년 전 살았던 대형 초식공룡인 울트라사우르스, 중형 초식공룡인 고성고사우르스, 육식공룡인 메갈로사우르스 등이다. 공룡이 걸어간 발자국이 길을 이루고는 있지만 대부분 일정한 방향을 향해 진행한 흔적이 아니라 이리저리로 배회한 흔적이다. 이와같이 여러 공룡의 발자국이 혼재된 상태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천재지변으로 지구가 발칵 뒤집히면서 우왕좌왕하던 공룡들의 흔적인지는 쉽게 가닥을 잡을 수 없다.
아무튼 공룡들이 한바탕 지나간 다음 천전리를 차지한 것은 선사시대 사람들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자취는 내 건너 바위에 있다. '천전리 각석' 또는 '서석'이라고 불리는 바위이다. 높은 철책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너비 9.5m, 높이 2.7m의 바위로 쉽게 눈에 띈다. 일부 균열이 있고 떨어져나간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누군가 그림을 그리고 위해 일부러 돌을 갈아낸 것처럼 바위 표면이 판판하다. 위쪽이 15도 정도 앞으로 튀어나온 채 비스듬히 기얼우져 있어 바위면서 비바람에 쉽게 노출되지도 않을 뿐더러 바위에 무엇을 새기기에도 유리했을 법하다.
바위 표면에 그려진 그림들은 대개 마름모나 동심원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사슴과 용 같은 동물, 물고기 같은 그림들이다. 누가, 언제, 왜 그린 바위그림들일까?
바위의 그림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새겨진 것이다. 바위 면을 쪼아 윤곽선을 만든 후 안쪽의 면을 넓게 쪼아낸 면 그림, 그리고 윤곽선만을 새긴 선 그림이다. 선 그림의 경우는 굵게 그린 것과 가늘게 새긴 것으로 더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들 그림의 기법과 그림을 그린 시기는 대체로 일치하는 경향을 보인다. 굵은 선 그림보다는 면 그림이 시기적으로 앞서고, 가는 선 그림보다는 굵은 선 그림이 앞선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진 면 그림은 바위의 중앙과 그 위쪽에 주로 분포한다. 후에 굵은 선 그림으로 된 기하학적 무늬가 덧 그러진 까닭에 남아 있는 것이 많지는 않다. 면 그림의 종류로는 사슴과 순록이 가장 많다. 사슴은 대개 암수 두 마리가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순록은 뿔이 매우 크고 가지가 무성한 모습으로 홀로 서 있다. 그밖에 홀로 있는 동물 가운데는 말이나 염소로 추정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왼편의 사슴 무리 사이에는 상어로 생각되는 물고기 두 마리와 붕어 같이 생긴 물고기가 한 마리 있는데, 많은 동물 그림 가운데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이들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육상동물인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사냥을 주로 하던 이들고 동물의 번식과 사냥의 성공을 빌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닐까?
그밖에 눈에 띄는 면 그림은 왼쪽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한 네 발 달린 동물이다. 표정이 마치 무엇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난감해하고 있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몸이 긴 짐승, 사람과 꽃 등도 보인다.
천전리 암각화에 그려진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바위의 중앙과 윗부분에 고루 분포하는 굵은 선 그림으로, 이들은 주로 동심원, 마름모꼴, 물결, 나선 같은 기하학적 무늬와 그리고 뱀 같은 그림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새겨진 것은 마름모꼴 무늬이다. 홑무늬와 겹무늬 외에 연속무늬가 있으며, 연속무늬는 가로와 세로로 겹쳐진 것과 한무늬 내부에 빗금이 있는 것도 있다. 기하학적 무늬는 세로로 겹쳐진 것과 한무늬 내부에 빗금이 있는 것도 있다. 기하학적 무늬는 세계 각처에서 등장하는데, 대개 동심원과 나선무늬는 태양 또는 강물이나 비를 상징한다. 또, 마름모꼴과 물결무늬는 생명력과 풍요로움 등을 나타내는 기호로 통한다. 뱀 역시 물과 비 등에 비유되며 풍요한 생산력을 나타내는 기호로서, 농경 사회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굵은 선으로 그려진 이 그림들은 면 그림을 그렸던 사람들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들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사냥을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 농사를 짓고 살았던 사람들이란 말은 아닐까. 그밖에 사슴뿔, 물고기, 사람 얼굴 모습 등도 굵은 선으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면 그림과 굵은 선 그림들이 새겨진 연대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대체로 후기 구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걸쳐 그려갔다는 것이 학계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천전리 암각화에 나타나는 또 한 부류의 그림은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삼국시대 신라 화랑이 그리거나 쓴 가는 선 그림과 글씨이다.
그림의 종류는 귀족 행렬도와 말을 탄 행렬과 배, 사람과 용과 새 등이며, 글씨는 이들 그림 사이에 새겨지거나 그림 위에 덧새겨져 있다. 이들 그림과 글씨는 신라 화랑들이 남긴 것이 분명하며, 당시의 생활 모습과 사회 변화 과정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확실히 앞에 살펴본 면 그림이나 굵은 선 그림과는 달리 기호나 상징 수준이 아닌 좀더 구체적인 회화로 존재한다.
가령, 바위의 맨 오른쪽 가장자리에 세로 방향으로 그려진 행렬도의 경우,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허리에 칼을 찬 것 같기도 하고 모자를 쓴 듯도 하다. 때문에 귀족 또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로 추정된다. 그런가 하면 왼쪽 아랫부분에 있는 또 다른 행렬도는 맨 앞에 사람이 서고 뒤에 네 발 달린 짐승과 말을 탄 사람이 그룹을 이루고 있으며, 뒤이어 맨 앞에 장막을 씌운 말을 타고 있는 사람과 그 일행이 또 한 그룹의 그림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들 바로 뒤에는 배 두 척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 세 그룹의 그림을 하나로 보기도 하지만 나누어 각기 다른 그림으로 보기도 한다. 혹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외국의 사신이 어디론가 안내되어 가는 행렬은 아닐는지.
바위의 가운데 아랫부분에는 명문으로 인해 상체가 깎여나가고 하체만 남은 사람의 그림이 있다. 바지는 아랫단에 사선무늬가 새겨져 있고, 두 발은 오른쪽으로 향하고 신발의 코가 날렵하게 선 모습이다. 명문의 위쪽에도 이 명문 때문에 아랫부분이 지워져나간 것이 분명한 말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사각의 테두리를 두른 이 명문은 '천전리 서석 원명과 추명'으로 불리는 글씨이다. 원명이니 추명이니 하는 것은 두 글을 쓴 주체가 같고, 또한 같은 일을 시차를 두고 회상하여 기록한 글이란 뜻이다. 원명은 법흥왕 12년(525)에 사탁부의 갈문왕이 이곳에 행차하여 그 기념으로 새긴 글이고, 추명은 14년 뒤인 법흥왕 26년(539)에 다시 이곳을 찾아와 과거에 다녀간 일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비 가운데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명문 주변에는 영랑, 금랑, 정광랑 등 쉽게 화랑임을 짐작할 만한 글씨들도 남아 있다. 당시 화랑들이 전국 곳곳의 명승지를 돌며 심신을 수련했던 일을 떠올리면, 이곳을 다녀간 화랑이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명문 오른쪽으로는 마치 솟대처럼 장대위에 올라앉은 새의 그림과 용 세 마리도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설명이나 안내 없이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이때는 현장에서 유적을 관리하고 있는 분의 설명에 귀기울이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바위 왼쪽 아랫부분의 그림이 가장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데, 관리하는 분의 말씀에 의하면 국보로 지정되기 바로 전까지 이곳은 마을의 화장터였다고 한다.
천전리 암각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조금 다르지만 보통 오전 10시에서 11시 무렵이라고 한다. 이 천전리 암각화가 발견된 것은 1970년이며 현재 국보 제147호이다.
한편, 공룡 발자국 화석을 만나기 직전 계곡 입구의 왼편 밭에는 석탑의 부재로 보이는 몸돌과 지붕돌 일부 등이 남아 있다. 옛 반고사의 흔적이다. 반고사는 <삼국유사> '낭지승운 보현수'조에 "원효가 반고사에 있을 때...."라는 구절에 나오는 그 반고사로 추정되는 절로서, 1970년에 천전리 암각화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인연이 있다. 동국대학교 박물관 문명대 교수팀이 반고사가 반구대 지역에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천전리에 방문했을 때, 마을 주민들에게서 "저 밑 암벽에 그림인지 무엇인지 희미한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반고사에서 발견된 불상은 부산대학교로 옮겨졌다고 한다.
권상호
영랑(永郎)
생몰년 미상. 신라 효소왕 때의 화랑.
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 등과 더불어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로 꼽혔으며, 금강산 방면의 유오(遊娛)로 이름났다.
그의 족적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 회자되어 ‘영랑도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 바위에 새겨진 삼일포(三日浦:지금의 강원도 고성군)방면을 답사, 기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금강산에는 실제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영랑재[永郎峴]’가 있었다고 한다.《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낭도 가운데는 진재(眞才)·번완(繁完)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고 한다.
최근 학계에 알려진 경상남도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서석(書石)의 명문에 ‘술년6월2일영랑성업(戌年六月二日永郎成業)’이라 한 것이 보이고 있어, 그가 화랑으로서의 수련기간을 마친 것을 기념한 각문(刻文)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영랑이 바로 효소왕 때의 영랑 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