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울주 천전리각석(蔚州 川前里刻石)

바위에 새긴 고대인의 꿈을 찾아서

- 울주 천전리각석蔚州 川前里刻石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경주방면으로 달리다가 언양 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와 다시 경주 쪽으로 35번 국도를 따라 4km정도 가면 천전리각석의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오른쪽 샛길로 들어서면 천전리 마을이 있고, 마을을 지나 약 2km를 더 가면 대곡천이 굽이쳐 흐르는 곳이 나타난다. 울산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태화강의 상류지역에 자리잡은 대곡천의 중상류 물결이 구부러지며 휘돌아가는 곳에 장방형의 커다란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여기에 고대의 그림과 글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국보 147호 울주 천전리각석蔚州 川前里刻石이다. 혹은 천전리서석書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970년 12월 동국대학교 조사단이 그 부근의 대곡리 반구대 주변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중 발견한 이 각석은 그 중요성과 문화재적 가치로 말미암아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행정구역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07-3번지이다. 두동면과 두서면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이 이곳에서 모이면서 각석 앞을 지나 좁은 협곡을 따라 흐른다.

  암면의 너비는 9.5m, 높이는 2.7m이다. 암벽은 연한 갈색 켜바위로 직사각형의 편평한 바위가 지반에서 앞으로 15도∼20도 가량 비스듬하게 기울어져서 글자나 문양을 새기기가 편하고 암질도 적색 점토암으로써 조각하기에 쉬운 무른 재질이다. 암면 앞의 계곡은 맑고 깨끗한 물이 넘쳐흐르고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넓고 평평한 반석에는 중생대 공룡의 발자국도 생생하게 남아있으며, 동쪽으로 병풍처럼 산이 둘러쳐져 있어 한 여름에도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이런 까닭에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화랑들이 자주 찾아와 이곳의 암벽에 염원과 기원을 담았던 것이리라.

  바위면은 상하 2단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내용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바위면 상단에는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과 인물 동물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쳐 이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하단에는 가는 선각으로 기마행렬도와 인물상, 말 용 새 배 등과 모두 800여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대략 6세기부터 9세기 무렵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쳐 왕족이나 승려, 화랑 등 이곳을 다녀간 다양한 사람들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바위 상단의 기하학무늬는 쪼아낸 것이 아니라 여러번 반복하여 문지르고 갈아낸 수법이다.  상부 왼쪽에서 볼 수 있는 동물상들은 단단한 송곳으로 쪼아내면서 형상을 만들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을 정도로 그 깊이가 얕다. 기하학무늬는 마름모, 원, 우렁, 물결, 가자무늬 등으로 다양하며, 사슴 호랑이와 정확히 알 수 없는 동물들, 암수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서있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에 비해 하단의 글자와 기마행렬도는 단단한 철·송곳으로 선을 그어 흠집을 내었다.

  동심원과 소용돌이무늬는 태양을 상징하며, 마름모, 원, 우렁, 물결, 가자무늬 등 여러 기하학무늬는 청동기 시대 농경생활과 직결된 곡물의 성장과 숙성, 여성의 성기 등과 관련된다. 또한 물과 비를 상징하는 그림들도 있어서 이 바위조각은 농경생활과 풍요의 종교적 상징화로 해석되고 있다. 이 각화의 조성연대는 반구대의 암각화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후기 내지 원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각석의 중하부에는 300여자의 명문이 뚜렷하다. 역사가들의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사각형으로 책 모양의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는데 오른쪽과 왼쪽의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중 먼저 새겨진 오른쪽의 명문을 원명原銘이라고 하고 그 후에 새겨진 왼쪽의 것을 추명追銘이라고 부른다. 이 양자는 내용상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먼저 원명 가운데에서 수행인에 관한 부분은 생략하고 사건의 중심이 되는 내용만을 제시한다.


乙巳

沙喙部葛

文王覓遊來始得見谷

之古谷无名谷善石得造□□

以下爲名書石谷字作之

幷遊友妹聖□光妙於史

鄒女郞王之


  을사년에 사훼부의 갈문왕이 찾아 놀러왔다가 처음으로 이 골짜기를 보게 되었다. 오래된 골짜기이나 이름이 없는 골짜기이므로 좋은 돌을 얻어 (□□를) 만들고 서석곡이라 이름하고 글자를 적게 하였다. 함께 놀러온 벗인 누이는 성스럽고 (□하며) 빛처럼 오묘하신 어사추여랑님이다

  여기에서 을사년은 법흥왕 12년(525)년이며, 사훼부 혹은 사탁부는 신라 6부 중 하나로 탁부와 함께 김씨족이 장악하여 가장 세력이 컸다. 갈문왕葛文王은 왕에 버금가는 지위로 왕의 혈족이 차지하였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법흥왕 때의 갈문왕은 왕의 친동생인  입종立宗갈문왕이니 여기에서의 갈문왕이란 곧 입종인 것이다. 그 누이인 어사추여랑은 기존문헌에는 보이지 않으나 {화랑세기}에 지증왕과 연제부인 사이에는 법흥왕과 입종갈문왕 외에 보현普賢이라는 막내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렇다면 어사추는 바로 이 보현공주이다.

  이 두 사람은 법흥왕의 동생이다. 법흥왕과 형제인 두 사람은 어떤 이유로 서석곡에 왔던 것일까? 여기에서 '찾아 놀러 왔다'(覓遊來)고 하였고 어사추를 '함께 놀러온 벗'(幷遊友)이라고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심이 되는 글자는 유遊이다. 그런데 이 유遊는 흔히 '놀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그 의미는 단순히 오락이나 유희가 아니다. 화랑들이 국토를 찾아다니며 수련하는 것을 유遊라고 하였고, 성스런 장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할 때도 유遊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다음 추명의 기록을 보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1) 過去乙巳年六月十八日昧 沙喙部 徙夫知葛文王 妹於史鄒女郞王 共遊來以後□□八年□過

去 2) 妹王考 妹王過人 丁巳年 王過去 其王妃只沒尸兮妃愛自思 己未年七月三日 其王與妹共

見書石叱見來谷 3) 此時 共三來 무卽知太王妃 夫乞支妃 徙夫知王子郞 深□夫知共來


  역시 수행인의 기록을 생략한 추명의 중심 내용이다. 이두와 우리말 식 어순이 사용되기도 하여 해석이 쉽지 않고 학자들 사이에 의견도 분분하다. 해석상 과거過去는 '지나가다'의 의미에서 유추하여 '돌아가시다'로, 어사추여랑왕妹於史鄒女郞王, 매왕妹王 등의 왕王은 존칭어인 '님'으로 본 견해에 따르기로 하고 풀어보면 이런 내용으로 읽혀진다.


1) 지난 을사년 6월 18일 새벽에 사훼부 사부지갈문왕과 누이 어사추여랑님이 함께 놀러온 이후로 (□□八)년이 지났다. 2) 누이님을 생각하니 누이님은 돌아가신 사람이며 정사년에는 (갈문)왕도 돌아가시니, 그 왕비인 지몰시혜비는 애달피 그리워하다가 기미년 7월 3일에 그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고 글을 써놓았던 돌을 보러 골짜기에 왔다. 3) 이때 셋이 함께 왔으니 무즉지태왕의 비인 부걸지비와 사부지(갈문)왕의 아들인 심□부지도 같이 왔다.


  먼저 추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인물들인지 살펴보자.

1)에서 사부지갈문왕은 원명에서의 갈문왕, 즉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임을 알 수 있다. 사부지의 부인인 지몰시혜비는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지소부인(只召夫人)으로 나오고 있는데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이다. 사부지는 조카딸과 혼인한 것이다. 신라왕실의 근친혼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2)에서 무즉지태왕은 법흥왕이다. 법흥왕은 524년에 세워진 울진봉평신라비에서는 모즉지매금왕으로 나오고 있어서 무즉지태왕이 곧 법흥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무즉지태왕비인 부걸지비는 삼국사기에 법흥왕비로 나오는 보도부인保刀夫人인 것이다.


  사부지의 아들인 심□부지는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심맥부深麥夫 혹은 삼맥종 麥宗으로도 불리웠던 진흥왕임을 알 수 있다. 사부지갈문왕과 지몰시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심맥부지는 천전리에 왔던 바로 다음 해인 540년 7월, 법흥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진흥왕이 되었다.


  다음으로 추명에는 몇 개의 간지가 있어서 연대 추정이 가능하다. 1)의 을사년은 원명에서 나온 것처럼 법흥왕 12년인 525년이며 2)의 사부지가 죽은 해인 정사년은 법흥왕 24년인 537년, 지몰시혜비를 비롯하여 3명의 왕족이 다시 서석곡을 찾아온 기미년은 법흥왕 26년인 539년이다. 원명과 추명이 새겨진 사이에는 14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525년 사부지와 어사추가 천전리에 와서 글을 새기고 간 뒤 14년이 흘렀고, 그 동안 언제인가 어사추가 죽었고, 537년에는 사부지도 죽었는데, 그가 죽은 2년 후인 539년에 사부지의 부인 지몰시혜비와 그 아들인 심맥부지, 법흥왕의 왕비 부걸지비가 함께 찾아와 옛일을 회상하고 글을 써서 남겼던 것이다.


  천전리 서석의 금석문이 전하는 사실은 여기까지이다. 왜 그들이 이곳에 찾아와 글을 남겼는가에 대한 해석은 이제 역사가의 상상력에 맡길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 즉 사부지와 어사추가 새벽에 왔으며 이를 유遊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539년 3인이 찾아온 그 다음해에 법흥왕을 이어 진흥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7살이었고 아직 어리므로 왕태후가 섭정을 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먼저 이곳이 고대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성스러운 장소라는 점과 두 사람이 찾아온 시간이 대낮이 아니라 해뜨기 직전인 새벽이라는 점, 그리고 유遊의 의미를 통해 유추하면, 여랑 혹은 여랑왕의 직위를 가지고 聖□光妙라고 표현된 어사추는 제사를 관장하는 여사제女司祭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부지갈문왕은 여사제인 누이 어사추와 함께 천전리에서 무언가를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고 그 일을 암벽에 새겨 전하였던 것이리라.


  그가 제사를 올리며 기원한 내용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후 14년의 세월이 지나 두 사람은 이미 죽고 없지만, 사부지의 부인은 그의 아들인 6살난 어린 심맥부와 자신의 어머니인 법흥왕비를 대동하고 다시 이곳을 찾아왔음을 주목해야 하겠다. 그 다음해인 540년 법흥왕이 죽자 심맥부는 왕위를 물려받게 되며 법흥왕비는 섭정이 된다. 이때 이미 심맥부는 법흥왕에 의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계승자로 지명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시기에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사부지가 누이와 함께 제사를 지내며 소망했던 그 무엇인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몰시혜비는 죽은 남편을 지극히 생각하며 감사하고 다시 추모하는 제사를 올린 후 역시 그 일을 기록해서 기념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역사적 상상일 뿐이다. 역사가는 가장 그럴듯한 상상의 폭력을 역사에게 자행하는 사람이다. 그렇더라도 더 이상의 상상은 역사가의 몫이 아니다. 소설가의 영역에 넘겨줄 일이다.


  삼국과 신라 천년의 긴 기간 동안 우리가 그 시대의 역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야 편찬된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오직 두 권이 책이 남아있을 뿐이다. 두 책이 전하는 사실들 사이에는 무수한 공백이 존재한다.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그 사이를 메꾸어 줄 수 있는 것이 천전리서석과 같은 이러한 금석문이다.


  천전리에 가면 흐르는 물살에 시원하게 몸을 담그고 주변의 풍광에 취하거나 공룡의 발자국에 맨발을 대어보며 즐거워하기 바란다. 그러다가 잠시, 철책으로 엄중하게 둘러싸인 암벽이 보이거든 그 앞에 서서 동심원과 마름모꼴이 과연 무엇일까. 왜 고대인들이 이것을 새긴 것일까. 그리고 희미한 글자의 흔적들을 떠듬떠듬 짚어보면서 고대의 왕과 왕비들이 이곳에 와서 무엇을 간절히 빌었던 것일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돌칼을 든 고대의 사내들과, 역사책 속에서 잠들어 있던 왕들이 홀연 당신 앞에 나타나 미소를 지으며 아무도 듣지 못했던 옛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니.            -20050215 -


 표) 6세기 전반 신라왕실의 계보


                             지증왕 =======|======= 연제부인

                                             |

        무즉지태왕(법흥왕) ===============|================ 부걸지비(보도부인)

                                             |

                 사부지갈문왕(입종갈문왕) ===|=== 지몰시혜비(지소부인)

                                             |

                                 심맥부지(진흥왕)  어사추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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