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서예
고려는 초기에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製述과 明經의 두 과목을 두었다. 명경과는 신라시대의 讀書出身科와 비슷하지만 제술과는 詩와 賦 등의 문학작품을 가지고 시험을 보는 것으로 고사의 기준은 문학작품의 우열이 결정하는 것이나, 글씨도 심사에서는 제외될 수 없는 것이므로 서예의 수련에 힘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밖에 雜科라는 것이 있었는데, 잡과는 전문직을 위한 시험으로 이 잡과 가운데에 글씨 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書業이 있었다. 서업은 기본 과목인 <說文解字>와 <五經字樣> 이 외에 실기로 예서, 전서의 여러 서체를 써서 통과되어야 하였으므로, 이러한 제도의 출현은 서예의 隆興을 조장하여 실로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못지않게 서예문화가 찬란하게 발달하였다. 고려의 서적은 진적으로 몇 점의 고문서와 말기에 작성된 수십 점의 사경이 남아 있고, 그 밖에 진가가 확실하지 않은 명인의 글씨 몇 점이 남아 있을 뿐 서예 자료로 다루어야 할 것은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비석과 묘지 등의 금석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八萬大藏經을 비롯한 각종 목판서적의 글씨도 좋은 자료가 된다.
비석은 寺蹟碑와 僧塔, 塔碑 등을 들 수 있는데, 문장, 글씨, 모두 당시의 대가가 왕명에 의하여 성의를 다한 것이므로 우수한 필법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려 서예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여 당나라의 여러 대가들의 필법을 모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구양순의 필법은 자획과 짜임새가 모두 방정하고 근엄하여 한 점, 한 획을 긋는 데에도 정신이 이완되어서는 안 되는 서법이므로, 비를 세울 경우 정중하고 경건한 자세가 깃들어 있는 이 서체가 즐겨 사용되었다.
구양순의 대가로는 구족달(具足達), 한윤(韓允), 민상제(閔賞濟), 안민후(安民厚), 林顥(임호), 오언후(吳彦侯)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당, 송의 유명한 금석에 손색없는 작가들이 많다. 특히 이원부(李元符)와 장단열(張端說)은 우세남체(虞世南體)에도 능하였다. 이원부의 반야사원경대사비(槃若寺元景大師碑, 보물 제126호)는 우세남체로 썼고,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 보물 제488호)는 구양순체로 썼다. 장단열의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보물 제172호)는 우세남체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는 구양순체로 썼다. 이 밖에 김원(金薳)의 용두사철당간기(龍頭寺鐵幢竿記)는 훌륭한 유공권체로 썼으며, 현재는 없어진 승가굴비(僧伽窟碑)는 안진경의 서풍을 따랐음을 현전하는 탁본에서 볼 수 있다.
고려 중기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서예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대가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탄연(坦然)이다. 그는 왕사와 국사를 지낼 정도로 학문과 덕이 높은 고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불법보다는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 일색이던 당시의 전통을 깨트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글씨로 전하는 것은 문수원비(文殊院碑)인데, 이 비는 현재 없어졌으나 탁본이 전하여지고 있다. 그 글씨는 왕희지의 <집자성교서>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왕희지의 글씨에서 볼 수 있는 경직한 맛이 전혀 없고 운치가 넘치는 유려함에 강철과 같은 힘이 들어 보인다. 그의 영향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어 탄연의 문인 기준(機俊)은 탄연의 글씨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데, 단속사대감국사비(斷俗寺大監國師碑)가 바로 그의 글씨이다. 같은 탄연의 서법으로 쓴 것으로는 운문사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가 있으나 쓴 사람의 이름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다.
12세기에 이르러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문인들은 모두 활기를 잃어 문학, 예술 전반에 걸쳐 크게 쇠퇴하였는데, 서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종 말기에 최씨 정권을 몰아낼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동안 우수한 작가로는 유공권, 김효인(金孝印) 등이 있다. 유공권의 서봉사현오국사탑비(瑞峰寺玄悟國師塔碑, 보물 제9호)는 송나라 소식(蘇軾)의 서법을 띠고 있으며, 사경의 풍미가 풍기는 걸작이다. 김효인은 고종 때의 사람인데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보물 제252호)는 탄연의 서법을 계승한 명작이다.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으로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면서 고려의 국왕은 원나라 수도인 북경을 자주 왕래하였고, 또 오랫동안 체재하는 경우도 많았다. 관료는 사절로 또는 왕의 수행으로 북경 나들이가 빈번하였고, 그 가운데에는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명사도 많이 나왔다. 따라서 그들은 원나라 학자들과의 교유가 두터워졌고, 전에 없이 많은 문인과 학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충선왕은 1314년 왕위를 아들인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북경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이라는 서재를 지어놓고 당시 원나라 명사인 우집(虞集), 조맹부(趙孟頫), 구양현(歐陽玄) 등과 매일 교유하였다. 당시 조맹부는 원나라 일대를 대표하는 글씨의 명가로서 왕을 따라갔던 문신들 중에는 조맹부의 서법을 따른 사람들이 많았다. 이군해(李君侅), 이제현(李齊賢)이 그 대표적 명가이다. 이군해는 뒤에 이름을 암(嵓)으로 고치고 호를 행촌(杏村)이라 하였는데, 그의 글씨로는 문수사장경각비(文殊寺藏經閣碑)가 남아 있다. 이 비는 조맹부의 서체로 쓴 걸작으로 현재 탁본만이 전한다. 이 비의 두전(頭篆)인 ‘文殊寺藏經碑’라는 6자 역시 이군해의 글씨인데, 진전(秦篆)의 법을 제대로 터득한 명품이다. 고려의 비로 많은 두전이 있으나 대개는 보잘것없고, 이 전서만이 뚜렷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29호)를 쓴 한수(韓修)와 회암사선각왕사비(檜巖寺禪覺王師碑, 보물 제387호)를 예서로 쓴 권주(權鑄)는 모두 말기의 대가들이다.
끝으로 고려시대의 서예자료로 묘지를 들 수 있다. 현재까지 출토된 묘지는 200여점에 달하며, 시대로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400년에 가까운 연대에 걸쳐 있다. 비같이 우리나라 서법의 정수임에는 틀림없으나 묘지는 또다른 면에서 주목된다. 비는 지상에 세우는 것이므로 쓰는 사람이 심력을 쏟아서 쓴 작품인 데 반하여, 묘지는 땅속에 묻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대개는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운필하여 극히 자연스러운 자세로 썼기 때문에 비갈과는 다른 친근감을 가질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각기 그 시대의 일반적인 서법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좋은 서예사의 자료가 된다. 서체가 다양하여 교졸의 차가 많고 또 필자를 밝힌 것은 몇 점에 불과하지만, 모두 정확한 연대가 새겨져 있어 각 시대 서법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으며, 서예사의 연보를 편찬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묘지는 고려시대 서예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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