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後期의 名筆
33기 박물관 특설강좌 화요반
2009. 10. 27(화) 15:00 - 16:50
李 完 雨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시대 필적은 이전의 고려시대에 비해 상당한 수량이 전하며 서예에 관련된 문헌도 풍부하여 당시의 유행 서풍이나 사람들의 書藝觀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 강연에서는 탁월한 솜씨와 특유의 풍격으로 우리의 서예문화를 풍성하게 만든 朝鮮後期 文人名筆의 글씨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17세기의 名筆
● 許穆, <陟州東海碑銘>, 1661년, 拓本, 개인소장.
허목(1595-1682)은 17세의 문신ㆍ유학자ㆍ명서가로 字는 문보(文父)ㆍ화보(和父), 號는 眉叟ㆍ臺嶺老人, 본관은 陽川이다. 현감 許喬의 아들로 鄭逑ㆍ張顯光의 문인이다. 50살이 넘도록 諸子百家와 經書에 전심하여 禮學에 일가의 경지를 이루었다. 慈懿大妃의 服喪問題로 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西人과의 禮訟에서 결국 승리하여 南人으로서 대사헌에 특진되었고, 송시열의 처벌에 대해 온건한 許積의 濁南에 반대 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9년 허적을 탄핵하다 파직되어 고향 孔岩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진력다. 漢 이전의 原儒學을 연구하여 古學이라 불렸고, 글씨도 三代文字를 목표로 古篆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 <척주동해비명>은 그가 三陟府使로 부임하여 海潮의 피해가 잦은 이곳을 위해 「東海頌」을 짓고 이를 써서 1661년 3월에 세운 것이다. 이 비는 뒤에 풍랑에 침몰되었는데 마침 副本으로 써둔 것이 있어 이것으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현존하는 竹串島 정상의 <척주동해비>는 숙종 35년(1709)에 이 두 가지 본을 참고하여 세웠다고 전한다. 허목 고전의 전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허목의 후손 댁에는 小字로 쓴 稿本이 전한다고 한다.
釋文:……壬戌三月下浣, 都護府使孔岩許穆書.
追記:顯宗二年, 先生來守是邦, 撰篆文東海碑, 立於汀羅島, 爲風浪激沈, 先生聞而改書. 今參考兩本, 大字用舊本, 小字用新本, 刻竪于竹串島. 時上之三十五年己丑春三月也.
● 許穆, <祭文>, 1682년, 紙本 26.5×15.2㎝, 九疇翁隸法 帖, 개인소장.
이 제문은 “孝友 顯卿”이란 친우를 위해 쓴 것이다. 허목의 글씨에 대하여 故 임창순 선생은 “허목은 전서를 쓸 때 행초의 필법으로 쓰고, 행초를 쓸 때 전서의 필법으로 썼다.”고 했는데, 이 말은 그 요체를 잘 지적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즉, 전서를 쓸 때에는 偏筆로 써서 한 쪽은 붓끝이 지나가 매끈한 반면, 한 쪽은 붓허리가 지나가 톱니처럼 된다. 이에 비하여 행초를 쓸 때에는 오히려 전서에서처럼 方正한 자형에 교묘한 減筆을 사용하여 독특한 풍격을 이루었다.
釋文:……壬戌三月下浣, 孔岩許穆眉叟拜哭.
● 宋時烈, <朱子格言>, 紙本 139×52㎝×(8) 屛風,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송시열(1607-89)은 17세기를 대표하는 문신ㆍ유학자이다. 兒名은 성뢰(聖賚), 字는 英甫, 號는 尤庵․華陽洞主, 본관은 恩津이다. 宋甲祚의 아들로 金長生ㆍ金集 부자의 문인이다. 李珥ㆍ金長生의 학통을 계승하여 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다. 禮論에 밝았으며, 효종과 함께 北伐을 계획하였다. 西人 內의 정권다툼으로 金自點의 功西派와 대립, 服喪問題로 인한 남인들과 대립, 尹拯과의 학문적 대립 등 老少分黨을 일으켜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성격이 과격하여 政敵이 많았으나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文廟와 孝廟에 配享을 비롯하여 많은 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 宋子大全이 있다. 시호는 文正.
이 10곡 병풍은 南宋의 유학자 朱熹의 글인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함에 오로지 一直이란 글자 뿐이다.”를 쓴 것이다. 조선말기의 유학자 鼓山 任憲晦(1811-76)에 의해 「尤庵先生筆」이란 서첩으로 전하던 것을 뒤에 10폭의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마지막 2폭에는 임헌회와 그의 제자 艮齋 田愚(1842~1922)의 발문이 쓰여 있다. 필획이 좀 살찌고 거친데, 이는 아마 그가 안진경체 내지 朱子의 서풍을 수용했음에 기인할 것이다.
釋文:天地生萬物, 聖人應萬事, 惟一直字而已.
● 金壽增, <五言絶句>, 絹本 26.5㎝×19.5㎝ 海東筆藪 帖, 경남대박물관 테라우찌文庫.
김수증(1624-1701)은 17세기의 문신ㆍ학자로 字는 延之, 號는 谷雲, 본관은 安東. 金尙憲의 손자로 金光鉉의 조카, 金壽興ㆍ金壽恒의 형이다. 효종년간에 관직에 있다가 1675년(숙종 1) 김수항ㆍ송시열이 유배되자 화천의 谷雲山에 은거했다. 1689년 己巳換局으로 仁顯王后가 폐위되고 김수항이 賜死되고 김수흥도 配所에서 사망하자 淮陽府使를 사직하였다. 甲戌獄事로 다시 임용되나 나아가지 않았다. 篆書와 八分에 뛰어나 당시의 많은 비명을 썼다. 아들 金昌肅(1651-73)과 함께 신라ㆍ고려의 金石拓本을 널리 수집하기도 했다.
김수증은 예서로 많은 비문이 전하는데, 이들을 보면 別字ㆍ俗字ㆍ古字 등의 異字體가 많고 마치 해서를 쓰는 듯한 필획을 보인다. 당시에는 漢代隸碑의 拓本을 보고 예서를 배우기보다 예를 들어 宋 劉球가 편찬한 隸韻 등의 字書類를 주로 참고한 듯하다. 김수증의 이러한 예서풍은 許穆의 古篆風과 함께 17세기 서예사에 있어 흥미로운 현상의 하나이다.
釋文:萬里長城境 巟營野草秋 秣陵多士女 猶唱白符鳩.
* 宋 劉球, 隸韻, 板本.
* 18세기의 名筆
● 尹淳, <行書 七言律詩>, 1732년, 絹本 33㎝×53.5㎝, 白下尹淳眞蹟 帖, 개인소장.
윤순(1680-1741)은 숙종ㆍ영조년간의 문신ㆍ서화가로 字는 仲和, 號는 白下ㆍ鶴陰ㆍ讓叟, 본관은 海平이다. 尹斗壽의 후손으로 지평 尹世喜의 아들이요 晩霞 尹游의 동생이다. 1712년 진사시에 장원,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 부수찬을 거쳐 1723년 應敎로서 사은사 서장관이 되어 淸에 다녀왔다. 1727년 이조참판으로 대제학을 겸직, 이듬해 이인좌의 난 때에 감호제군사를 지냈고, 1729년 공조판서에 올랐다. 예조판서를 거쳐 1735년 원자보양관, 173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평안도관찰로 전직하여 관내를 순찰하던 중 압록강변의 碧潼에서 객사하였다. 霞谷 鄭齊斗의 문인이다. 尹根壽ㆍ尹暉ㆍ尹新之 등의 많은 명서가를 배출한 명가의 후손으로 필법의 목표를 왕희지에 두면서도 唐ㆍ宋ㆍ明의 후대 글씨를 두루 배웠는데, 특히 宋 미불(米芾)과 明 文徵明ㆍ董其昌 등의 글씨를 매우 잘 구사했다. 그 중에서도 미불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진다. 문하에서 李匡師ㆍ徐懋修 등의 명서가가 배출되었고, 姜世晃ㆍ曹允亨 등 후대 서예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칠언율시>는 唐 許渾의 詩 「咸陽城東樓」를 쓴 것이다. 백하 서예의 典型性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첩의 마지막 면에 “壬子菊秋書贈”이란 연대가 적혀 있다.
釋文:一上高樓萬里愁 蒹葭楊柳似汀洲 溪雲初起日沈夕 山雨欲來風滿樓
鳥下綠蕪秦苑夕 蟬鳴黃葉漢宮秋 行人莫問當年事 故國東來渭水流 白下翁
* 尹淳, <李昌發墓碣銘>, 1728年書, 拓帖 세로33㎝, 개인소장.
* 北宋 米芾, <蜀素帖>, 1088년, 絹本 27.8×270.8㎝ 卷, 타이베이 國立故宮博物院.
● 尹淳, <五言古詩>, 1737년, 紙本墨書 縱45㎝ 卷, 국립중앙박물관.
이 長卷의 필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1737년의 기년작이다. 여기에는 文選에 나오는 古詩를 大中小의 楷行草로 쓴 것인데, 앞에는 李德壽의 題記(1737년)가 있고 뒤에는 洪良浩 題後(1785년)와 姜世晃의 跋文 및 曹允亨의 觀記가 덧붙여 있다. 미불과 동기창의 서풍이 강하게 나타나는 필적이다. 특히 말미에 쓴 小字는 지름 2㎝가 채 안 되는 작은 크기로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勁健한 필력을 보여준다.
* 明 董其昌, <豳風圖詩(부분)>, 1621년, 紙本 40.5×234㎝ 卷, 日本 개인소장.
* 明 董其昌, <放歌行(부분)>, 1630년경, 絹本 32×645.2㎝ 卷, 中國 上海博物館.
● 李匡師, <鸞翥鳳翔 鼎躍龍騰>, 絹本ㆍ麻本 17×12㎝ 帖, 개인소장.
이광사(1705-77)는 조선후기 18세기를 대표하는 양명학자ㆍ명서가이다. 字는 道甫, 號는 員嶠ㆍ壽北, 본관은 全州. 전주이씨 德泉君派의 인물 李景稷ㆍ李正英의 후손으로 角里 李眞儉의 아들이다. 少論이던 집안의 몰락으로 출세길을 버리고 翰墨으로 일생을 보냈다. 특히 1755년 羅州掛書事件에 연루되어 함경도 富寧으로 유배되었고, 뒤에 전라도 薪智島로 옮겨져 귀양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霞谷 鄭齊斗에게 양명학을 배웠다. 20살쯤에 당대 최고의 명필 白下 尹淳에게 글씨를 배웠고 30대에는 魏ㆍ晉의 필법을 독학했으며, 40대에는 중국 고대의 篆隸 衆碑로 관심을 넓혀갔다. 활달하고 변화로운 글씨로 대중의 인기를 널리 받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역대 서론을 참고하여 書訣 전ㆍ후편을 지었다. 특히 친우였던 尙古子 金光遂(1699-?)가 소장했던 秦漢時代 이래의 중국 古代碑拓을 두루 열람하고 篆隸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서결에서 魏ㆍ晉 시대의 楷行草와 함께 周ㆍ秦ㆍ漢 시대의 篆隸를 兼修할 것을 주장하여 당시로서는 진보된 서론을 제시했다.
이 필적은 唐 韓愈가 지은 「石鼓歌」의 “鸞翶鳳翥”, “古鼎躍水龍騰” 구절을 취한 것이다. 서체는 古篆의 하나인 懸針篆으로 起筆에서부터 收筆에 이르기까지 필력을 잃지 않았다. 그가 서결에서 고전의 일종인 현침전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했던 것을 이해할 만하다. 이 전서가 실린 서첩에는 앞쪽에 예서로 “草學張芝 楷法鍾繇”가 대자 예서로 쓰여 있고, 이어 중자 해서ㆍ행서로 쓴 오언율시가 있으며, 마지막에 “鴻鵠群遊”라고 쓴 대자 행서가 있다. 이처럼 이광사는 서첩을 만들 때 서예학습의 요체를 간략한 구절로 표현하곤 하였다.
● 李匡師, <五言詩 屛風>, 紙本墨書 72×38㎝×(8폭) 屛風, 화정박물관.
전체 구성과 글자마다의 짜임이 매우 변화로워 動勢가 강하다. 획에 있어서도 中鋒勢가 강하고 운필이 빨라 경쾌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데, 당시 대중적 인기를 받은 서풍이었을 것이다. 짝수 폭 말미에 「朝鮮國完山李匡師字道甫員嶠老者印」이란 印文이 찍혀 있다.
釋文:제8폭- 萬葉風聲利 一山秋氣寒 曉霜浮碧瓦 落日度朱欄
● 宋文欽, <敬齋箴>, 紙本 26.2×451.5㎝ 卷, 개인소장.
송문흠(1710-52)은 18세기의 문인ㆍ명서가로 字는 士行, 號는 閒靜堂, 본관은 恩津이다. 송준길의 후손으로 宋堯佐의 아들, 李縡의 문인. 1733년 사마시에 급제, 1739년 음보로 長陵參奉이 되고, 이어 侍直ㆍ副率ㆍ종부시 主簿ㆍ형조좌랑 등을 거쳐 文義縣令에 이르렀다. 문장과 시에도 뛰어났고 글씨에도 뛰어나 篆隸를 많이 썼는데 특히 八分에 뛰어나 一代를 獨步했다고 한다.
이 예서 필적은 南宋의 유학자 朱熹가 지은 「경재잠」을 쓴 것이다. 漢나라 隸書의 풍격이 잘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도 <曺全碑>의 流媚한 필치가 담겨져 있다.
釋文: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足容必重…
● 宋文欽, <行弗愧影 寢不愧衾>, 紙本 31.8㎝×36.1㎝ 八分八字 帖, 개인소장.
송문흠의 隸書 필적으로 보기 드문 大字이다. 내용은 “다닐 때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잠잘 때 이불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필적이 실린 서첩의 말미에는 송문흠의 후손 宋鍾秀(동춘당 宋浚吉의 玄孫)의 발문이 실려 있다. 발문을 보면 先君께서 송문흠에게 八分 글씨를 청하여 이를 枕屛으로 사용해 왔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낡아져 훼손될까 걱정스러워 첩으로 개장한다는 내용이다. 大字이기 때문인지 위 <경재잠>의 필치와 달리 장중한 획법을 보여준다.
* 19세기의 名筆
● 丁若鏞, <贈元弼>, 1814년, 絹本墨書 14×7.1ㆍ6.3㎝ 帖, 개인소장.
정약용(1762-1836)은 정조ㆍ순조년간의 대학자로 字는 美鏞ㆍ頌甫, 號는 茶山ㆍ三眉ㆍ洌水ㆍ與猶堂ㆍ鐵馬山樵ㆍ俟菴이며, 본관은 羅州이다. 廣州 출신으로 진주목사 丁載遠의 아들이며 李承勳의 처남이기도 하다. 천주교 세례명은 요안. 어려서 부친에게 經史를 배웠고, 1776년 상경하여 이듬해 李瀷의 遺稿를 보고 民生을 위한 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었으며 李蘗에게 西學을 배웠다. 1789년 식년문과에 급제, 이듬해 檢閱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해서 탄핵을 받고 海美로 유배되었다. 십일 만에 풀려난 뒤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형조참의에 이르렀다. 1799년 西學 문제로 탄핵을 받자 사직, 1801년 신유박해 때 장기로 유배된 뒤 黃嗣永帛書事件으로 康津으로 移配되고 이후 강진의 茶山 기슭에 있는 尹博의 山亭에서 19년간 經學에 전념하였다. 1818년 풀려 나와 고향에서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文度.
이 글씨는 丁氏의 내력에 대한 傳言을 적고, 이를 찬미하는 四言ㆍ七言의 구절을 앞뒤로 쓴 것이다. 내용을 보면, 羅州 押海島에 귀양 온 唐朝의 大臣 丁政丞이란 이의 무덤이 전하며, 丁氏의 宗家가 있었던 靑山島에는 예로부터 매우 오래된 족보가 石函 속에 숨겨져 있다 하여 정약용이 이를 찾아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노인이 어린 손자를 데리고 족보를 들고 찾아와 말하길 “본래 뿌리가 같으니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선조의 業에서 떨쿠지 마십시오. 이 녀석이 바로 내 손자이니 이름은 元弼이라 합니다.”라고 하자 정약용이 원필을 머물게 하여 교육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을 記文으로 적어 원필에게 증여한 것이다.
釋文:羅州押海島, 有昔日□卿相墓, 相傳見丁政丞所葬, 譜冊謂政丞本唐朝大臣, 謫居是島. 我先祖兵曹參議公, 爲昇平都護時, 身入押海, 修其壽焉. 吾宗有流落在靑山島者, 舊稱島中有千年古譜, 藏之石函, 余爲徵之, 盖今年內所刊也. 老人持譜冊, 竝率其幼孫而至曰, “本是同根, 豈可相舍. 願授一經, 俾毋墜先業. 是唯我孫, 名曰元弼.” 余留一而敎之, 復以月軒集一部遺之, 庶幾地僻, 書貴得以壽傳也. 嗟乎, 可愛哉. 嘉慶甲戌至月幾望, 茶山樵夫丁翁, 書于松風菴中, 贈元弼.
/ 押海遺宗, 耽津富土, 佩玞唐朝, 受鉞麗代, 本是同根, 云胡獨瘁.
/ 紫瀾風外靑山島, 紅稻香中白髮松.
● 金正喜, <黙笑居士自讚>, 紙本墨書 30.2×128.1㎝ 卷, 국립중앙박물관.
김정희(1786-1856)는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유명한 문신ㆍ학자ㆍ서화가. 字 元春, 號 秋史ㆍ阮堂 등, 본관 慶州. 판서 金魯敬의 아들. 1809년 생원, 1819년 식년문과 급제, 1823년 규장각 待敎, 충청우도 암행어사ㆍ檢詳을 거쳐 1836년 大司成, 그 뒤 이조참판에 이음. 일찍이 사신으로 淸에 가는 부친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 당시의 巨儒에 翁方綱과 중년학자 阮元을 만나 師弟之義를 맺음. 1840년 尹尙度의 獄事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고, 1848년 석방되나 1851년 헌종의 廟薦問題 때 그 주창자로 北靑에 유배되어 이듬해 풀려났다. 학문에 있어 實事求是를 목표로 하여 考證的 태도를 견지하였다. 서화에 두루 뛰어났으며 신라 진흥왕의 <北漢山巡狩碑>를 발견ㆍ고증하는 등 금석학에도 뛰어났다. 저작으로 禮堂金石過眼錄 등이 전함.
글씨에 있어 그는 隸書와 楷行을 많이 썼다. 해서는 <化度寺碑>를 비롯한 구양순의 필법을 기반으로 하여 저수량ㆍ안진경 등을 가미하여 특유의 서풍을 이루었다. 행서에 있어서는 轉折 표현이 강렬하고 渴筆이 많은 서풍을 보였다. 또 예서에서는 특히 전서의 필의가 남은 古隸를 중시하여 이를 바탕으로 뛰어난 造形性의 글씨를 구사하였다.
이 필적은 그의 해서풍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내용은 침묵을 지켜야 할 때에는 잠자코 있고 웃어야 할 때에는 웃는다는 뜻으로 黙笑居士라는 金逌根(1785-1850)의 雅號의 의미를 쓴 것이다. 김정희 楷書의 규범이 되는 작품으로 구양순의 골격에 안진경의 획법을 가미하여 굳셈과 넉넉함을 함께 지녔다.
釋文:當黙而黙,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黙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黙,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况而知其免夫矣. 黙笑居士自讚.
● 金正喜, <好古硏經>, 紙本 124.7×28.5㎝ 對聯, 삼성미술관.
釋文: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
竹琬雅鑒, 幷請削定. 近日隸法, 皆宗鄧完白, 然其長在於篆, 篆固直溯泰山琅邪, 有變現不測, 隸尙屬第二, 呂伊墨卿, 頗奇古, 亦有泥古之意, 只當從五鳳黃龍字, 參之蜀碑, 似得門經. 阮堂.
* 五鳳 ․ 黃龍:西漢(前漢) 宣帝의 연호(B.C. 174-149).
* 金正喜, <明月梅花>, 紙本 135.7×30.3㎝ 對聯, 간송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