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한국의 금석문

한국의 금석문

33기 박물관 특설강좌 화요반

2009. 10. 27(화) 13:00 - 14:50

河 日 植 (연세대 교수)

1. 의사 소통, 기록의 역사

말은 가장 기본적인 의사 전달 수단, 그 다음이 문자, 그림. 소리와 움직임을 기록한 것은 최근의 일. 옛날에는 문자・그림 등이 유일한 수단.

최초의 문자 - B.C.E. 3000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된 쐐기문자(楔形文字). 점토판을 이용, 세금을 걷기 위한 각종 장부. 중국의 상형문자는 B.C.E. 2000년경에 시작(기원은 더 오랠 것).

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 사용, 로마인들도 파피루스 사용. 양피지 등. 일상적인 필기판으로는 왁스판을 사용. 장기적인 보존을 위해서는 석판(石板, 碑)을 이용 - 돌을 이용한 것은 동서양 공통.

기록 수단 : 죽간(竹簡), 돌, 비단, 종이. 종이는 중국 4대 발명의 하나(종이, 인쇄술, 화약, 나침반). 후한의 채륜(蔡倫)이 C.E. 105년 발명?-그 이전부터 있던 기술을 획기적으로 개량한 것. 751년경 고구려 유민(遺民) 고선지(高仙芝)의 석국(石國:타쉬켄트) 원정 때 제지술이 서방 전파.

2. 금석문의 종류와 현황

금석문(金石文)이란 청동이나 철 등의 금속에 새긴 금문(金文)과, 비석 등의 돌에 새긴 석문(石文)을 합쳐 부르는 말. ‘金石之約’이란 말에서 보듯, 보존성이 뛰어나 지금까지도 애용하는 기록 수단.

그러나 범위를 넓혀서 토기나 칠기(漆器), 벽돌에 쓴 것과 고분의 벽에 먹으로 쓴 것, 직물에 쓴 것, 도장(印文), 목간(木簡)까지 포함하여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넓은 의미의 금석문).

비문(碑文)

돌을 다듬어 비석을 만들어 세운 것. 한국의 대표적 금석문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음. 특히 묘비(墓碑)가 많음.

비석의 형식 : 용의 머리에 거북 몸통을 한 귀부(龜趺), 몸돌인 비신(碑身), 이무기가 서려 있는 모양의 이수(螭首). 이수에는 제목을 새김. 조선시대 사대부의 경우, 귀부는 간단한 받침돌로, 이수는 지붕모양으로.

묘지(墓誌)

무덤 속에 넣는 것. 때로는 석관(石棺) 밖에 새기거나, 무덤방 벽면에 먹으로 쓴 경우도 있음(集安의 모두루묘지).

무녕왕릉 지석, 고려 귀족들의 묘지명 다수(300여 점), 조선시대 백자 묘지명 등.

불상명(佛像銘)

한국의 금문(金文) 중 제일 많이 남아 있음. 불상의 광배에 만들게 된 동기, 참여한 사람 이름을 새겨넣은 것. 때로는 불상의 등(도피안사 비로자나불), 어깨 뒤(보림사 비로자나불) 등에 새긴 경우도 있음.

* 감산사 아미타여래입상, 미륵보살입상(국립중앙박물관)

종명(鐘銘)

종을 만든 배경과 제작에 참여한 시주자, 기술자 등을 새긴 것. 제법 많이 남아 있음. 대표적인 것이 상원사종과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 771년(혜공왕 7) 완성. 당대 최고의 정계 실력자들을 비롯하여 종을 만든 배경을 돋을새김으로 자세히 기록.

목간(木簡)

종이가 없던 시대에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 나무를 다듬어서 먹글씨로 쓰거나, 때로는 칼로 깎아 새기기도. 대나무를 사용할 때도 있음(竹簡)-한국에서는 아직 나오지 않음.

목간은 중국과 일본에서 엄청난 양이 출토, 한국은 양이 적음(최근 400여 점 가까이 출토). 그러나 최근 새로운 자료로 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연구되고 있는 중. 일반 기록용, 문서로 쓰인 것, 물품을 운송할 때 내역을 기록하여 딸려 보낸 것, 제사나 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한 것, 글씨 연습용, 낙서 등.

그 밖의 것들

토기, 기와, 벽돌, 칼(칠지도), 칠기그릇(안압지) 등등에 새긴 글자들. 최근 성곽 발굴이 늘어나면서 건물터 등에서 명문 기와가 나오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음.

*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릉이 산처럼 편안하고 굳세기를 기원한다”)

바위벽에 글을 새긴 경우 - 울주 천전리서석

불탑 속에 넣은 사리구(舍利具)에 글을 새긴 경우 - 아주 많음, 최근 공개된 부여 왕흥사 사리함의 기록.

3. 금석문의 조사와 연구

금석문 연구・정리의 발자취

중국은 송나라 때부터 금석학이 발달. 청나라 때 고증학이 발달하면서 갑골문, 금석문에 대한 학자들의 전문 연구가 꽃핌. 한국은 상대적으로 미약하지만,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일부 실학자들이 관심.

추사 김정희가 대표적. 추사는 전국 여러 곳의 금석문을 직접 조사. 북한산 비봉을 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진흥왕순수비를 판독, 진흥왕비임을 밝혀냄(󰡔金石過眼錄󰡕, 󰡔阮堂尺牘󰡕). 오경석(吳慶錫)의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도 금석문을 수집하여 고증한 것으로 가치가 높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금석문을 조사하여 탁본 1천여 점을 제작,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간행(1919). 해방 후 황수영(黃壽永)의 󰡔한국금석유문(韓國金石遺文)󰡕, 이난영(李蘭暎)의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 등이 나옴. 그동안의 판독을 비교하여 󰡔역주한국고대금석문(Ⅰ~Ⅲ)󰡕(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4). 1990년대 이후 탁본전시회 등도 자주 열리고 있음.

*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금석문영상정보」 서비스(http://gsm.nricp.go.kr)

금석문 조사의 기초-탁본

비석에 종이를 대고 물을 적셔 凹凸에 따라 흡착시킨 뒤에 먹방망이로 먹을 묻히는 것(魚拓도 있음) -튀어나온 凸부분에만 먹이 묻어서 글자를 구분.

탁본은 서예가들이 서체를 배우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음(「인각사 보각국사비문」). 비석 표면이 상했을 때, 맨눈으로 보는 것보다 탁본을 만들면 내용을 읽어보기 편함. 그러나 비석 표면에 먹이 묻는 것을 완전히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삼가하는 것이 좋음.

* 탁본하는 순서와 방법

비석 표면이 심각하게 손상된 경우에는 탁본도 실효성이 낮음. 정밀한 촬영, 또는 특수재료로 틀을 떠서 凹凸을 바꾸어 관찰하는 방법도 있음.

목간의 경우에는 적외선 촬영을 활용하기도 함.

4. 금석문과 역사 - 기록으로서 갖는 가치

금석문이 갖고 있는 무엇보다 큰 가치는, 내용에 담겨 있는 역사적 사실. 특히 문헌기록의 대부분이 후대에 정리되어 해당 시기 사람들의 표현이나 감정을 여과하여 쓴 내용임에 비하여, 금석문은 당시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것. 생생하고 직접적인 내용.

그러면 금석문은 무조건 다 믿어도 되는가? 그렇지는 않음. 사람이 짓고 새겨 넣은 것. 만든 사람에 따라 과장과 왜곡, 착오가 있을 수 있음.

고려시대 고관대작들의 묘지명들 - 평생 역임한 벼슬을 연도별로 나열, 때로는 인품을 칭송. 그러나 나쁜 이야기는 전혀 들어 있지 않음(당연한 것). 따라서 이 내용을 갖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판단을 할 수는 없는 노릇.

광개토왕릉비문의 경우 : 왜(倭)의 활동이 부각되어 서술 - 과장된 측면이 있음.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작성한 결과. “동부여는 추모왕(주몽) 때부터 속민(屬民)이었다”는 구절 - 동부여 정벌의 명분을 과장한 것. “신라・백제는 예로부터 속민이었다”는 구절 - 고구려의 지위를 과시하고, 신라에 구원군을 보내고 백제를 공격하려는 명분을 내세우려는 과장.

이렇게 사료비판을 엄밀하게 하면서 금석문을 대한다면, 금석문 자체는 오히려 ‘솔직한’ 자료가 되는 셈. 특히 당대인의 논리적인 사상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생각’을 엿볼 수도 있음.

흔히 비석만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성벽의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줌(남산신성비, 신라 관문성, 해미읍성, 고창읍성, 서울도성 등, 공사실명제의 흔적).

「울주 천전리서석」은 법흥왕 때 왕실 가족들이 나들이 와서 기록한 사적(私的)인 기록. 원명(原銘)과 추명(追銘)이 함께 붙어 있음. “을사년(525)에 사훼부의 徙夫知 葛文王과 ” “정사년(537)에 왕은 죽은 왕비 只沒尸兮妃를 愛自思하여 …” - 개인의 감정까지 솔직하게 드러나고 있는 기록.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사회기풍을 알려주는 소중한 금석문 : “임신년(552, 612) 6월 16일에 두 사람이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서약하기를 금일부터 3년 이후에 忠道를 지키고 過失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를 잃으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얻을 것이라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해져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먼저 신미년(551, 611) 7월 22일에 詩, 尙書, 禮記, 春秋傳을 3년 안에 차례로 습득하기를 크게 맹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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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금석문에서 보이는 힘찬 기법을 원용하여 역동적이고 강렬하며 고졸(古拙)한 필법을 창조해나가자. 자신의 감정과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휑한 겨울바람이 느껴지는 글씨를 써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