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11 문방사우에 대한 고찰

11. 文房四友에 대한 고찰

  붓 먹 종이 벼루 등 이른 바 文房四友는 선비정신의 상징이었다.  이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 일본 등 동양문화 혹은 漢字문화권의 바탕을 형성케한 매개체 역할도 해왔다.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는 書家의 필수적인 용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주역이었다.  특히 고려이후 과거시험이 선비의 등용문이었음을 감안하면 文房四友는 선비의 뜻을 밝혀주는 필수용구로 立身揚名의 도구였던 셈이다.


종이 

'紙千年 絹五百'  종이의 수명은 천년이요 비단은 오백년이라는 말이다.  다라니경문이 현존하는 것을 보면 종이의 생명은 천년이 넘는 셈이다.  이런 종이의 긴 생명이 書畵의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간직해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이의 기원은 약 4천년 전 이집트 나일강변에 무성하게 자랐던 파피루스(papyrus)라는 수초를 가늘게 쪼게 물에 불려서 가지런하게 펴고 돌로 눌로 말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종이는 서기 105년 중국의 後漢때 채륜(蔡倫)이 삼(大麻) 등 식물섬유를 원료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채륜의 종이 발명 연대는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 태조왕때이다.

  종이는 중국보다 우리나라가 먼저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상황적인 증거만 있지 결정적인 자료는 없는 형편이다.  상황적 증거는 기원전 37년 출범한 고구려가 건국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史書를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또한 낙랑의 고분에서도 닥(楮)종이가 나와 우리나라 종이의 역사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쇄물도 신라시대의 다라니경문(서기 751년 이전으로 추정)으로 일본의 백만다라니경(서기 770년)이나 중국의 돈황굴에서 발견된 금강경(서기 868년)보다 앞서고 있다.  어떻든 한국의 종이는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그 질도 우수했던 것 같다.  高麗圖經 考槃余事등 중국측의 기록을 보면 朝鮮紙 高麗紙의 우수성을 칭찬하는 기록이 많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楮종이가 질기고 광택이 있으나 섬유 배열이 투박하여 매끄럽지 않다는 흠이 있는 반면에 중국의 종이는 대나무를 사용하여 흡습성은 강하지만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품목의 종이를 만들었다.  고려이후 종이의 주산지는 전주등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이었다.  이 지방에서 생산된 종이의 종류를 보면 咨文紙(자문지), 副本單子紙(부본단자지), 奏本紙(주본지), 皮封紙(피봉지), 書契紙, 祝文紙, 常表紙, 甲衣紙, 眼紙, 歲畵紙, 白奏紙(백주지), 火藥紙, 狀紙(장지), 常奏紙 등 다양하다. 

  과거에는 이처럼 종이가 쓰이는 용도와 제조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을 썼지만 현재는 대체로 朝鮮紙와 洋紙로 구별한다.  手抄式(수초식)으로 뜬 재래식 종이를 조선지 기계로 뜬 것을 양지라고 한다.  양지의 원료로는 수입펄프가 주종을 이루고 있지만 조선지는 楮나무를 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를 만들던 기관인 造紙署가 있었으며 印書諸色紙를 생산했다.  畵宣紙(화선지)는 대체로 서화용 종이를 말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송기헌씨가 해방후 발명특허(250호)를 얻어 생산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붓 

  붓은 선비들의 필수용구였다.  고사에 따르면 秦(진)나라 사람 몽념이 맨처음 양털과 토끼털로 붓을 만들었다고 한다.  명나라때의 考槃余事(고반여사)에 보면 '조선에 狼尾筆(낭미필)이 좋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붓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신라때로 추정된다.  이 시대에 흙으로 빚은 벼루와 도자기로 만든 벼루가 출토되어 붓의 역사도 이미 그때부터 있어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붓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털이다.  여러 가지 문헌을 종합해 보면 붓에 사용된 털의 종류는 10여가지가 넘는다.  족제비 양 수달피 사슴 노루 다람쥐 호랑이 돼지 토끼 쥐 닭 여우 너구리 고양이 털을 비롯하여 人毛까지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선조들이 가장 많이 사용해온 것은 족제비털인 黃毛와 다람쥐털인 靑毛 노루겨드랑이 털인 獐腋(장액), 재래종 염소털인 羊毛이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豚毛筆(돈모필)과 鼠鬚筆(서수필)등이 있다.  우리나라 金石學과 서예의 대가인 秋史 김정희가 돼지털로 맨 돈모필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수필은 쥐 수염털(쥐한 마리에서 사용할 수 있는 털은 8개정도.  쥐 200마리 정도라야 붓한자루를 맬 수 있다.)로 맨 붓으로, 중국의 왕희지가 가끔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붓털의 종류못지 않게 붓의 종류역시 다양하다.  잔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가느다란 x筆, 편지쓰기에 알맞도록 맨 簡筆, 大筆을 비롯해 붓대에 문양을 새긴 花文筆, 서수필처럼 다른털로 속을 박은 有心筆, 無心筆, 斑竹筆, 대필보다 훨씬 큰 額子筆(액자필)이 있다.

  우리나라 붓의 명산지로는 경남 밀양과 전남 광주가 꼽힌다.  밀양에서는 황모와 장액을 가지고 작은붓을 많이 만들었고, 광주지방에서는 약 1백년전부터 양털을 가지고 주로 書畵用 붓을 제작 공급해 왔다.

  붓은 筆匠(필장)의 온 정성이 담긴 예술품이다.  붓을 맬 때 그 수많은 털 가운데 한 오라기라도 거꾸로 매면 실패작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붓은 종이와 함께 자체 생산의 오랜 역사를 지녔고 품질도 우수하나 그 기술의 보호에 소홀하여 전승상태가 좋지 않다.  때문에 외국산이 판치고 있는 것이다.  서화계는 필장의 전통기법의 보존과 보호를 촉구하고 있다.


벼루 

  벼루는 먹가는 돌을 말하는데 먹의 빛깔같이 검정색 돌의 장방형 벼루가 많아 부부처럼 相生相和하는 검은 돌판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오지그릇처럼 흙을 구워 만든 토기벼루도 있었으며 최근에는 전동기(motor)를 달아 자동으로 먹을 갈 수 있게 만들어진 道煙耕(도연경)도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옛 벼루로는 藥浪硯(약랑연)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벼루이다.  일제때 일인들이 낙랑고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장방형과 원형이 있다.  토기벼루는 지난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벼루를 비롯해 백제 지역에서도 뚜껑이 있는 벼루등 특이한 토기벼루들이 발굴되고 있다.  벼루가 언제부터 만들어 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같은 문방용구로 長沙筆이 중국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 교외의 고분에서 나와 벼루도 춘추전국시대(서기전 403~221년) 이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殷墟(은허)의 陶片墨書(도편묵서)나 玉器朱書가 있으니 그 때를 벼루의 기원으로 잡을 수도 있겠으나 유물이 없어 확정할 수가 없다.

  벼루에 관한 故事로는 중국의 書聖 왕희지가 벼루를 닦던 洗硯池(세연지)라는 연못이 있었다는 설은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명필 김생이 태백산 줄기인 文筆山 동굴에서 천여축의 불경을 쓸 때 바위의 뿌리에서 끊임없이 먹물이 흘러나와 벼루에 떨어졌다는 고사가 있다.

  이 이야기는 釋天因(석천인)이라는 승려가 <동문선>에 시로 남기고 있다.  문방사우중에서 玩賞物(완상물)로도 깊은 사랑을 받는 벼루는 명작의 경우 양반들처럼 족보도 있다.  硯譜(연보)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같이 출생지(産地)가 있어 本이 생긴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유명한 벼루로는 鐘城硯, 渭原硯(위원연), 海州硯, 平昌硯(평창연), 藍浦硯(남포연)이 꼽힌다.  함경북도 종성의 두만강에서 채취한 붉은돌과 烏硯石으로 만든 벼루가 <종성연>인데 오리알같이 백색이며 둥글둥글하게 생긴 아란석을 다듬어 만든 것을 최고품으로 친다.

  <위원연>은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위원강에서 채집한 돌로 만든 벼루이며, 청색과 붉은색의 아름다운 것들이다.  황해도 장산곶의 돌을 떠다 만든 <해주연>은 해주먹과 함께 유명하다.  경기도에서는 <파주연>, 강원도에서는 <평창연>, 충청도에서는 <남포연>과 <단양연>이 꼽힌다.  이들 벼루중 가장 많이 보급된 것이 <남포연>으로 충청남도 서해안에 있는 보령군 남포 聖住山에서 생산되는 검은돌을 다듬은 것이다.

  중국의 벼룻돌로는 천하일품으로 알려진 端石- 이 성행君의 호가 여기에서 나옴 -을 비롯하여溜州石(유주석), 福州石, 紅x石과 자색 녹색 담황색의 xxx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벼루의 색깔은 검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의 색깔에 따라 다양하다.  또한 채석된 연석재의 형태를 살려 예술적인 조각을 곁들이고 글을 새겨(銘文) 아름답게 꾸민 옛 벼루들도 많다.

  벼루는 문방사우중에서 가장 장수하는 문방구다.  주인보다도 오래사는 예술품일 것이다. 하지만 실용품이기도 하니 좋은 것을 고를줄 알아야 한다.  書家들은 돌로 만든 것으로 물을 찰해보아 잘 마르지 않으며 물 괴는 부분이 깊고 가는 부분이 넓은 벼루라고 말한다. 


  예부터 먹의 빛은 천년을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먹의 긴 생명을 이름이다.  또 秋史가 말하기를 文房四友 가운데 첫째는 먹이요, 둘째는 붓이라고 했다.  먹의 중요함을 이름이다.  인류가 물감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로 이를 입증하는 유적들이 현존하고 있다.  선사인들은 뼈나 나무에 칼로 형상을 새기고 그 형상이 잘 보이도록 검은색을 칠했던 것이다.  이 검은칠이 먹이며, 이를 원시묵이라고 이른다.  원시묵으로 쓴 글자의 흔적은 기원전 14~13세기 중국의 은하에서 발견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먹이 나온 것은 중국의 후한시대 (서기 25~220년)로, 그을음을 뭉친 원추형의 먹이 등장하게 되었다.  송나라의 墨xx에 따르면 漢代에는 扶風 終南山등의 소나무 먹을 많이 사용했다.  현재 남아있는 먹으로는 唐시대의 松x墨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낙랑시대의 고분에서 먹가루가 발견되었으며 고구려때의 먹글씨(墨書)로 된 xx가 있다.  고구려의 製墨術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고구려의 제묵 제지술을 배운 일본의 기록(日本書記)에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서기 610년에 전한 것으로 되어있다.  고구려의 먹은 일본만이 아니라 당나라에도 수출되었다.  중국 元나라말기 도종의(陶宗儀)가 쓴 철경록(輟耕錄)에는 고구려의 먹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먹은 신라에서도 생산되었다.  원시묵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 또는 자체 생산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의 제묵술도 고구려에서 전수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신라의 명묵으로 楊家 武家의 송연묵이 꼽혔다고 전한다.  이와같이 우리나라의 먹의 역사는 길며 명품도 많이 생산하여 중국과 일본에 그 이름을 떨쳤다. 

  중국의 문헌인 高麗圖經(고려도경)에는 고려孟州의 송연묵을 명품으로 꼽고 있다.  맹주는 평안도의 孟山.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도 이곳이 먹의 주요생산지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墨房을 설치하여 먹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조선실록에 나온다.  묵방은 세종때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의 명묵으로는 단양의 丹山烏玉과 해주묵이 꼽혔고, 松x의 주산지는 경상도 황해도 강원도로 되어있다.  먹은 송연묵과 油x墨의 두 종류로 나눈다.  송연은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옛날에는 송연 10근(斤)에 아교 4근과 물 10근을 반죽하여 송연묵을 만들었다고 한다.  먼저 소나무의 그을음을 체로쳐서 물과 아교로 개어 절굿공이로 다진후에 적당히 끓여 아름답게 조각한 本型에 넣어 압착하여 형태를 만들고 재속에 파묻어 건조시켰다.  다음에 먹에 광택이 나도록 칠을 하거나 금박을 입혀 장식했다. 

  유연묵은 기름을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먹이다.  기름은 동식물성 모두 사용되나 피마자 오동나무열매 돼지기름 고래기름등으로 만든 xx墨이 유명하다.  선비들의 사랑을 받던 먹은 향기가 높았다.  詩語로 자주 쓰이는 '그윽한 묵향'이 바로 먹의 신비로운 향내를 말하는 것이다.  특별히 향로를 첨가하지 않아도 송연묵은 소나무의 내음을 간직해 묵향이 짙다.

  먹은 생산지나 첨가한 향료에 따라 그 이름이 다양하여 수백가지나 된다.  朝鮮墨 唐墨 맹주묵 해주묵은 생산지의 이름을 딴 것이며 龍x墨 같은 것은 향료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단묵은 龍腦樹(용뇌수)라는 나무에서 채취한 용뇌향을 섞어 만든 먹이다. 

  좋은 먹은 갈아서 찌꺼기가 생기지 않으며 향기와 윤택이 난다.  숯검정(그을음)을 다스려 이같은 명품을 만들려면 그 정성이 말로 헤아리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墨匠(묵장)들은 그을음을 모아 아교와 물을 섞어 찧을 때 거울처럼 그 자신의 얼굴 모습이 비쳐야만 그쳤다고 한다.  이같은 정성이 있어야 명묵이 태어나므로 서예가들은 묵장의 노고를 기려 명품을 만든 묵장들을 기록했다.  중국에는 삼백명 이상의 역대 명묵장들의 이름이 남아있다.  먹은 또한 족보격인 墨譜(묵보)도 가지고 있다.  중국의 xxx는 6권에 385가지 형식의 먹을수록하고 있으며, 方千x, 方x樹등 대대로 그 기법을 잇고 있다.


인주 

  묵향 속에 장중한 검은 빛깔의 글씨로 사람의 마음과 뜻을 옮겨놓은 서예작품은 書家의 xx를 밝힌 붉은 落款(낙관)으로 그 극치를 이룬다.  서가가 그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한다는 낙관은 어두운 세계에 불을 밝히는 듯한 印朱의 빛깔로 하늘과 땅 그 속의 인류 즉 天地人의 우주를 포용하게 된다.  화선지가 하늘이라면 먹글씨는 사람과 땅이되며 낙관은 해와 달과 별이 되는 것이다.  인주의 역사도 먹처럼 길다.  먹과 같이 구석기 시대에 등장한다.  朱x을 한 나무조각이나 동물뼈의 색깔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 장례에서는 洗骨한 조상의 뼈에도 주칠을 했다고 한다.  인주는 光明朱x 가 원료이다.  다른 말로는 丹砂(단사) 또는 丹x라고도 한다.  단사는 수은과 유황의 화합물로 광택이 있는 붉은 색깔이다. 육방정계의 광석인 새빨간 주사를 정제하여 솜과 기름을 적당히 배합한 것이 인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솜대신 쑥의 섬유질을 넣어 인주의 질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인주의 질은 中國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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