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藝)
문자(文字)를 소재로 하는 조형예술(造形藝術). 점과 선․획(劃)의 태세(太細)․장단(長短), 필압(筆壓)의 강약(强弱)․경중(輕重), 운필의 지속(遲速)과 먹의 농담(濃淡),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묘한 조형미가 이루어진다.
【성질】 ① 문자성:먼저 글자를 쓰는 것으로써 서예술이 성립된다. ② 공간성:점과 선의 구성과 비례 균형에 따라 공간미(空間美)가 이루어진다. ③ 시간성:필순(筆順),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된다. ④ 율동성:필순에 따른 운필의 강약 등으로 율동미가 전개된다. ⑤ 추상성:자연의 구체적인 사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글자라는 추상적인 것을 소재로 한다. ⑥ 색채성:먹은 옛날부터 오채(五彩)를 겸하였다고 하며 검정색이지만 농담(濃淡)․윤갈(潤渴)․선염(渲染)․비백(飛白) 등이 운필에 따라 여러 색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영묘(靈妙)한 결과를 낳는다.
【발달】 서예는 고대 중국에서 발달하여 중국문자 즉,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한국․일본․베트남 등 여러 나라에 계승․발달하였다. 서양에서도 컬리그래피(calligraphy)라 하여 문자를 심미적인 대상으로 쓰는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오직 문자를 뚜렷하고 아름답게 형성하려는 것으로 중국을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의 서예에 비하면 그 의의와 중요성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의의】 서예는 중국문화권 안에 있는 여러 나라에서 특유의 예술이었으며, 중국에서 서예는 독립된 훌륭한 예술일 뿐만 아니라 문학․회화와 더불어, 또는 그들 예술과 서로 융합하면서 중국문화사상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다. 이것은 한자가 서양의 알파벳과 달리 원래 그림문자에서 발달하였다는 한자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물론 한자는 그림문자 그것은 아니다. 또 한자 가운데는 표음(表音)의 성질을 가진 문자가 많다. 그러나 원래 한자는 그림문자를 대담하게 추상화하면서 그러한 추상화된 기본문자를 여섯 방법에 의하여 조립한 것이다. 중국 상고 때 한자 형성의 과정에서 고도의 미적 직관과 구성상의 고심(苦心)과 미적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시각예술로서 심미적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문자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기는 하였으나 일면 민족성이 반영되어 각각 특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에서는 조선 세종 때 한글이 제정된 이후 한글 서예가 발달하였으며, 조선 말엽에는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이루어졌다. 궁체는 한자계가 아니므로 한자 필법이 원용(援用)되기는 하나 문자 구조상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발달에 한계가 있다. 일본에서는 ꡐ가나ꡑ라 하여 한자에서 탈화(脫化)된 문자가 생겼고 또 ꡐ변체(變體)가나ꡑ라 하여 한자의 초서(草書)를 본떠 독특하게 발달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는 전위서도(前衛書道) 또는 묵상(墨象)이라 하여 문자성이 없는 서예를 주장하는 일파가 일어났으나 문자성을 떠나서 서예가 성립한다는 것은 서예 본래의 성질(문자의 書寫)로 보아 긍정할 수 없다.
【중국】 중국의 연원(淵源)은 문자의 발명과 동시에 있었을 것이나 원초(原初)의 것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다만 BC 14~BC 12세기의 것인 은대(殷代)의 복문(卜文)을 새긴 갑골문(甲骨文)이 있고, 또 은(殷)시대의 금문(金文), 이른바 종정문(鐘鼎文) 즉 제기(祭器)․무기(武器)․악기(樂器) 기타에 새긴 명문(銘文)이 있어 알 수가 있다. 앞의 것은 귀갑(龜甲)․수골(獸骨)에 칼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직선(直線)과 절선(折線)이 많다. 뒤의 것은 틀[鑄型]에 글자를 써서 새기고 이 틀에 금속을 녹여 부어서 주조(鑄造)한 것이므로 필사체(筆寫體)이다. 이것이 주(周)나라에 계승되었다. 주나라는 서주(西周:BC 1122~BC 770)와 동주(東周:BC 770~BC 222)로 구분하고, 동주는 또 춘추시대(BC 770~BC 481)와 전국시대(BC 480~BC 222)로 구분한다. 서주시대는 전대의 것을 지켜왔으나,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는 자체(字體)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지방적 특색을 갖게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문(石文)으로 석고문(石鼓文)이 있으며, 북처럼 만든 10개의 돌에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 글 자체를 주문(Y?이라고 하며, 매우 정정(整正)하며 전아한 풍취가 있다. 진통일(秦統一) 이전 즉, 선진(先秦) 시대의 글자를 고문(古文)․ 고주(古?․대전(大篆) 등 여러 명칭으로 부르고 있으나 고전․대전으로 부르면 된다. 석고문의 제작시대에 관하여는 이설(異說)이 많아 단정하기 어려우나 출토(出土)된 지점으로 보아 진(秦)나라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진시대〉 시황제(始皇帝)가 천하를 통일(BC 221)한 후 그 이전의 복잡한 문자를 통일․간이화(簡易化)하기 위하여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었으며, 진대에 이루어졌다고 하여 진전(秦篆)이라고 하며 그 이전의 복잡한 대전에 비하여 소전(小篆)이라고도 한다.
〈전한시대〉 진(秦)나라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직선(直線) 위주의 예(隷)체가 이루어져 상용문자로서 사용되었고 점차 발전하여 말기에는 파책(波)이 생기고 후한에는 완성된 예서의 많은 비(碑)를 남겨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파세(波勢)가 없는 전한의 예를 고예(古隸)라 하고 파세가 있는 후한의 것을 팔분(八分)이라고도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천비(張遷碑)․예기비(禮器碑)․조전비(曹全碑)․공우비(孔宇碑) 등이 있다. 이밖에 간쑤성[甘肅省] 등 서방지역에서 육필(肉筆)의 목간(木簡)․죽간(竹簡) 등이 많이 출토되어 예(隸)․ 장초(章草) 등이 상용(常用)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초서의 명가인 장지(張芝)는 정사(正史)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인물이었다. 후한에 와서 채륜(蔡倫)에 의하여 종이가 발명되어(105) 문자의 표현이 자유롭게 된 것은 문화사상 큰 변혁이었고 서예 발달을 크게 촉진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 위․진시대는 전대를 계승한 예서와 해서에 볼 만한 것이 있으나 그 후의 해서로 옮아가는 과도기였다. 남북조시대에 진(晉)나라가 강남으로 천도(遷都)하여 동진(東晉)이 되고 강북은 혼란이 계속되다가 120년 뒤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었다. 남북조시대는 문화도 각각 특색 있는 것으로 형성되었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북비남첩(北碑南帖)이라 하여 북의 소박하고 힘찬 해서와 남의 전아 우미한 해(楷)․ 행(行)․초서(草書)가 특색이 있다. 동진시대에는 고래로 유명한 서성(書聖)이라 칭송되는 왕희지가 나와 귀족적이고 향기 높은 해서․행서․초서의 각체를 완성하여 예술로서 서예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이는 전대에서는 볼 수 없는 참신하고 완성된 서풍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법의 전형으로 거의 절대적인 것이 되어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악의론(樂毅論)》 《십칠첩(十七帖)》 《난정서(蘭亭序)》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등이 있다. 강남의 귀족적이고 전아한 서풍에 비하여 강북의 북위는 강건한 서풍이고 석문(石文)으로 많이 남아 있다.
〈수․당시대〉 수시대는 남북의 서풍이 혼연(渾然)융화되어 세련된 해서가 이루어져 당나라로 옮아가는 교량이 되었다. 당시대는 초당(初唐) 삼대가(三大家)인 구양 순(歐陽詢)․우세남(虞世南)․저수량(遂良)이 나와 각각 특색 있는 해서를 대성하여 해서의 규범이 되고 있어 이 시대는 서예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대표작품으로는 구양 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화도사비(化度寺碑)》, 우세남의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저수량의 《맹법사비(孟法師碑)》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등이 있다. 그 후 손과정(孫過庭)이 나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초서의 규범으로 삼는 서보(書譜)의 작품을 남겼다. 중당시대는 왕희지 이후의 제일인자로 치는 안진경(顔眞卿)이 나와 새로운 서풍을 개척하여 전의(篆意) 섞인 해서를 썼으며, 이를 노공체(魯公體)라 한다. 《근례비(勤禮碑)》 《안씨가묘비(顔氏家廟碑)》 《제질고(祭姪稿)》 《쟁좌위첩(爭坐位帖)》 《제백부고(祭伯父稿)》 등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다. 당말(唐末)에는 유공권(柳公權)․배휴(裴休) 등이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송시대〉 송나라 초기 100년 동안에는 복고주의가 일어났으나 왕희지풍이 흠모되어 태종 순화(淳化) 3년에 칙명으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북송(北宋) 후기에는 채양(蔡襄)․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米? 등 4대가가 나와 종래의 무기력한 서풍에서 벗어나 주관주의․개성주의 강한 작품들이 나왔다.
〈원시대〉 원시대에는 조맹부(趙孟? 松雪)가 나와 복고주의를 표방하여 왕희지의 글씨를 조종(祖宗)으로 하는 전아 우미하면서 격조 높은 서풍이 풍미(風靡)하였으며 고려 말 이후 한국 서예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명시대〉 이 시대에는 명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축윤명(祝允明)․문징명(文徵明)․동기창(董其昌) 등이 대표 작가들이며 말기에는 자유분방하고 표현에 개성미가 강한 서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특히 서위(徐渭)․황도주(黃道周)․예원로(倪元)․장서도(張瑞圖)․왕탁(王鐸)․부산(傅山) 등이 있다. 이들은 대폭에 행․초서로서 리드미컬하고 정열이 약동하는 듯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겨 후세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청시대〉 청조 강희제(康熙帝)가 동기창을 좋아하였으므로 그의 서풍이 널리 퍼졌다. 일면 개성이 강한 서가들인 정보(鄭)․김농(金農)․정섭(鄭燮) 등이 있지만 대체로 법첩을 주로 하는 첩학파(帖學派)가 많았다. 유용(劉鏞)․양동서(梁同書)․왕문치(王文治)․성친왕(成親王) 등이 그러하며 금석학의 영향으로 전예(篆隸)가 유행하였던 시기이다. 특히 등석여(鄧石如)는 전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전무후무한 탁월한 서가였다. 후기에 들어 완원(阮元)이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남첩북비론(南帖北碑論)을 제창하였다. 그 요지는 한․위(漢魏) 이래에 서예의 정통은 번각을 거듭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은 법첩으로 인하여 쇠잔하고 오히려 북위 이후의 비각(碑刻)에서 정통을 찾을 수 있다.
【한국】 8․15광복 전의 고고학적 출토품 중에서 중국 전국시대의 명도전(明刀錢)․포족전(布足錢) 등이 평안도 일대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러한 화폐와 함께 한문도 서서히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① 고구려:고구려의 유물로는 전문(塼文)․석각(石刻)․묘지명(墓誌銘) 등이 있고 또 유명한 광개토경평왕호태왕비(廣開土境平王好太王碑)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부근, 즉 지린성[吉林省] 퉁거우[通溝]에 남아 있다. 이것은 높이 약 7 m, 너비 약 2 m나 되는 거대한 비석으로, 4면에 모두 문자가 새겨졌으며 고구려 영군(英君)의 훈적을 기록한 것으로 서체는 파세가 없는 고예(古隷)로서 특이하며 호탕․웅대하여 동양 서예사상 중요하다. ② 백제:광복 후 부여에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가 발견되었고, 1972년에는 공주의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최고의 지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불상명(佛像銘) 등 단편적인 것밖에 없었다. ③ 신라:통일 이전의 것으로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창녕비(昌寧碑)․황초령비(黃草嶺碑)․마운령비(磨雲嶺碑)․북한산비(北漢山碑)와 82년에 발견된 충원비(忠原碑)가 있다. 모두 북조풍의 해서로 고졸(古拙) 청경(淸勁)하여 신라적인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의 서체는 그 당시 중국 서체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의 서풍가운데 해서는 주로 구양순법이, 행서는 왕희지법이 신라․고려 두 나라의 서예계를 풍미하였다. 따라서 통일 초기의 문무대왕릉비(文武大王陵碑)․김인문비(金仁問碑)와 화엄사석경(華嚴寺石經)․사천왕사비 등이 모두 구법으로 앞의 두 비는 쓴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매우 뛰어난 글씨로 방정고아(方正高雅)하다. 그리고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흰 종이에 먹으로 쓴 사경(寫經)으로 한국 사경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김생(金生)은 각체를 모두 잘 썼다고 하며 고려 때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한 낭공대사백월서운비(朗空大師白月栖雲碑)가 있지만 진적(眞蹟)이 없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이 비만을 볼 때 왕희지의 아류(亞流)로서 과대평가되었다고 하겠다. 석영업(釋靈業)의 단속사신행선사비(斷俗寺神行禪師碑)도 왕희지풍으로 주경(勁)하고 아름답다. 문장으로 유명한 최치원(崔致遠)의 쌍계사진감국사비(雙磎寺眞鑑國師碑)는 구양 통과 흡사한 풍골을 지니고 있는 글씨이나 그의 문명(文名)을 따르지 못하였다. 김원(金)․김언경(金彦卿)․최인곤(崔仁滾) 등은 좋은 글씨를 쓴 서가들이다. 성주사사적비는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매우 방정하고 고아하여 뛰어난 작품으로 최일류이다. 이채로운 것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비로 무장사비(藏寺碑)가 있다.
〈고려시대〉 비문․묘지명․사경 등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자료가 비교적 적다. 이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면, 전기는 거의 비석이고 후기는 비․묘지명․진적과 사경 등이 많다. 전기는 전대를 이어 해서(楷書)는 구양 순의 서풍이고 행서(行書)는 왕희지풍의 일색이며, 후기에는 특히 제25대 충렬왕 이후 조맹부의 서체가 들어와 크게 유행하여 조선 전기까지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이환추(李桓樞)의 광조사진철대사비(廣照寺眞澈大師碑)와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碑塔)는 구법(歐法)인데, 근직(謹直)한 필력으로 주경하면서 금석기(金石氣)가 넘쳐 흐른다. 장단설(張端說)의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眞靜大師圓悟塔碑)는 한국 서예사상 드물게 우세남(虞世南)의 서풍으로서 수윤(秀潤)․근정(謹整)한 명품이며, 고려 비 중에서는 최상급이다. 채충순(蔡忠順)의 현화사비(玄化寺碑)는 골기가 통달하고 정채(精采)가 비등하다고 하나 과찬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거웅(金巨雄)의 거돈사승묘선사비(居頓寺勝妙禪師碑)와 민상제(閔賞濟)의 칠장사혜소국사비(七長寺慧炤國師碑)는 모두 구체로서 당당한 것들이다. 안민후(安民厚)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는 구법이나 우(虞)에 가까운 것으로 근엄․정정하며 품격 높은 일품으로 일류에 속한다. 이원부(李元符)의 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는 《금석고(金石攷)》에 ꡒ신라․고려 양조에 있어서 금석의 서체는 대부분 구법으로 일관한 경향이 있는데, 홀로 원부의 우법(虞法)이 있음은 실로 새벽하늘의 샛별에 비할 수 있는 진귀하고 중한 것이다ꡓ라고 하였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단설도 있었으며 또 완전한 우법도 아니며 송나라 휘종의 수금체(瘦金體)처럼 자획(字劃)을 가늘고 길게 뽑는 독특한 필법이다. 유려하고 운필이 자재(自在)하며 청경(淸勁)한 점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명(書名)이 매우 뛰어난 석탄연(釋坦然)은 처음으로 안법의 해서를 썼고 왕법(王法)의 행서를 겸했으며 문수원중수기 액제(額題)와 승가사중수비(僧伽寺重修碑)를 썼는데 명실이 상부하다. 오언후(吳彦侯)의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는 구법으로 근엄․주경하고 단아하여 당당한 명품이다. 그 밖에 석영근(釋英僅)은 구법의 해서를 잘 썼고, 석혜소(釋慧素)도 안법을 섞은 듯한 해서를 잘 썼다. 김효인(金孝印)․김 순(金恂) 등은 구법이고, 전양고(錢良古)와 이군후(李君候)는 왕법의 행서를 잘 썼으며, 전원발(全元發)의 법주사혜정국사비(法住寺慧淨國師碑)는 전아한 해서이다. 제26대 충선왕(忠宣王)은 양위한 후 연경(燕京)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당시 원(元)의 명사(名士)들과 교류하였으며 특히 조맹부와 친교가 두터워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충선왕이 고려로 귀국할 때 문적과 서화를 많이 들여왔으므로 이에 따라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松雪)체가 들어와 고려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 초기의 서를 풍미하였으며, 이 시기는 송설체 일색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중에서 행촌(杏村) 이암(李)은 특히 송설체를 깊이 터득하여 행서와 초서에 뛰어난 대가였다. 권중화(權仲和)의 회암사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는 예서(隸書)인 것이 이채롭다. 한수(韓脩)는 《동문선(東文選)》에서 양촌(楊村) 권근(權近)이 ꡒ유항 한문경공(한수의 호)은 지행이 높고 견식이 밝아서 일시에 사람의 모범이 되었고 서범이 절륜하여 세상이 소중하게 여기더라ꡓ라고 하였다. 그의 회암사지공대사비(檜巖寺指空大師碑)․신륵사나옹화상석종기(神勒寺懶翁和尙石鐘記) 등은 우법(虞法)으로 아윤 청경하고 품격이 높아 고려 비 중 최상급의 명품으로 손꼽힌다. 설장수(長壽)․설경수(慶壽) 형제는 원(元)나라 사람으로 원 말에 고려에 귀화한 사람으로서 송설체를 썼다. 권주(權鑄)의 신륵사대장각장경비(神勒寺大藏閣藏經碑)는 아윤․청아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명필로 이름 높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석단목(釋端目)이 집자(集字)하여 세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낭공대사비)가 있으며 이는 왕희지체의 행서이지만 서명 높은 왕희지의 서에 비하면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인각사보각국사탑비(鱗角寺普覺國師塔碑)와 직지사대장각전비(直指寺大藏閣殿碑)가 있다.
〈조선시대〉 초엽에는 고려 말의 경향이 그대로 계승되어 조맹부의 서체 즉, 송설체가 유행하였다. 송설체로 된 증도가(證道歌)․천자문(千字文)․적벽부(赤壁賦) 등이 왕부의 명령으로 간행되어 일반에게 전습(傳習)되었다. 1435년(세종 17)에는 승문원(承文院)․사자관(寫字官)의 자법(字法)이 해정(楷整)하지 못하였다 하여 왕희지체로서 궤범(軌範)을 삼게 하였으므로 이로부터 양체가 안행(雁行)하였으나 주류는 역시 송설체였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중망(衆望)을 한몸에 모은 예원(藝苑)의 중심 인물이었고, 당시의 최고 화가인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발문(跋文)은 30세라는 약년(若年)의 서(書)이나 호매(豪邁) 늠늠하고 품위 또한 높다. 따라서 당시 천하제일이라 하였다. 선조(宣祖) 이전에 서명(書名) 높은 사람으로는 강희안(姜希顔)․김종직(金宗直)․정난종(鄭蘭宗)․소세양(蘇世讓)․김구(金絿)․성수침(成守琛)․이황(李滉)․양사언(楊士彦)․성혼(成渾) 등이 있다. 대체로 조선 전기는 조맹부․왕희지 이외에도 명나라 문징명․축윤명의 서풍도 들어와 혼류(混流)되어 행하여졌다. 성종(成宗) 때의 권발(權撥)은 수윤(秀潤)한 행․초서의 대가로 초서는 조선시대를 통하여서도 가장 뛰어났다. 선조(宣祖) 때에 한호(韓濩)가 나온 후로는 조선시대의 서풍이 크게 변모하였다. 즉 한호는 한국 서예사상 매우 이름 높은 사람으로 진체(晉體:왕희지풍의 체)를 연수한 듯 하며 적공(積功)하여 해․행․초서에 능하였으나 누기(陋氣)․속기(俗氣)가 많았다. 그 후에는 삼대가(三大家)라 불리는 백하(白下) 윤순(尹淳)․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이 있으며, 미불(米?의 영향이 크다. 이광사는 주로 초서가 많이 남아 있는데 필력이 매우 주경하나 숙서(熟書)이며 저서로 《원교서결(圓敎書訣)》이 있다. 강세황은 서화겸선(書畵兼善)하였고 품위가 있으며 특히 세행(細行)이 우수하다. 엄밀히 말하면 삼자(三者)가 모두 비슷한 서풍이라 하겠다. 또 서명이 있는 송하옹(松下翁) 조윤형(曺允亨)이 있고 이들은 백하풍이다. 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청수(淸秀) 주경한 서풍으로 품격이 높다.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있는데, 조광진은 예서에서 볼 만한 것이 있고 이삼만은 호남(湖南)에서 특히 이름이 높다.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시․서․화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어졌고, 특히 행서는 아윤(雅潤)․청순(淸淳)하여 품격이 높으며 자하체(紫霞體)로 알려져 있다. 추사(秋史:阮堂) 김정희(金正喜)는 재학(才學)이 뛰어났으며 당시 청나라에서 성행한 금석학의 영향을 받아 독창적이고도 기발한 추사체(秋史體)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금석학자로서 매우 이름 높다. 또 노석(老石) 이하응(李昰應)․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향수(香壽) 정학교(丁學敎)․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석운(石雲) 권동수(權東壽)․비산(比山) 배전(裵z)․백송(白松) 지창한(池昌翰) 등이 유명하며 이들의 필적은 오늘날에도 전해진다.
【서체】 광의로는 세계 각국에서 쓰이는 글씨의 표현 형식을 말하나 보통 한자 및 한글의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 등의 형태를 말한다. 글씨 비슷한 것이 나타난 것은 중국의 황하 문명기로 황제(黃帝) 시대의 사관(史官)이 새나 나뭇가지 등과 닮은 글자를 만든 것이 시초라고 하나 이것은 글자라기보다 부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후 은(殷)시대에 은문(殷文:갑골문이라고도 하며 거북의 등뼈나 짐승의 뼈에 예리한 기구로 새긴 글자)과 주(周)시대에 주문(周文)이 나타나 글자다운 체재(體裁)가 생겼다. 종정고문(鐘鼎古文)이라고도 부르며 종(鐘)이나 세발솥 등에 붓으로 써서 파낸 것이었다. 다시 동주대(東周代)에는 돌에 새겨진 석고문(石鼓文)이 나타나지만 선왕(宣王)시대에 사주(史?가 만든 대전(大篆)이란 자서(字書)에 이 글자의 형식이 사용되었으므로 대전 또는 주문(Y?이라고 불린다. 이 대전을 필사(筆寫)하기 편리하게 점획(點劃)을 단정한 모양으로 한 것이 소전(小篆:篆書)으로 진(秦)나라의 이사가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이어서 이 시대에 진시황제에게 죄를 지은 정막(程邈)이 옥중에서 대전․소전을 다시 간략화한 글자를 만들었다. 이것이 예서(隷書:古隷)로 여기에서 서체는 일단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한의 초기에는 유덕승(劉德昇)에 의해 행서(行書)가 만들어졌고, 후한 말기에는 해서(楷書)도 생겼으며, 이 해서․행서․초서의 3체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기본적인 서체가 되었다.
(篆書)
고대 한자 서체(書體). 중국 주(周)나라 의왕(宜王) 때 태사(太史) 주(?는 갑골(甲骨)․금석문(金石文) 등 고체(古體)를 정비하고 필획(筆畵)을 늘려 대전(大篆)의 서체를 만들었다. 그 후 진(秦)나라 시황제 때 재상 이사(李斯:?~BC 208)는 대전을 간략하게 한 문자를 만들어 황제에게 주청, 이제까지 여러 지방에서 쓰이던 각종 자체(字體)를 정리․통일하였다. 이것을 소전(小篆)이라고 한다. 대전의 예로는 춘추(春秋) 말기(BC 5세기경)의 《석고문(石鼓文)》이 남아 있고 소전의 예로는 진대(秦代) BC 219년에 만들어진 《태산각석(泰山刻石)》이 있다. 이들 전서는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 서체이지만 전서를 약(略)해서 사무용으로 쓰기 위해 예서(隸書)가 만들어졌으며 빨리 쓰기 위한 필기체로서 초서(草書)가 생겼다. 다시 해(楷)․행(行)서가 생겨 일반적으로 해․행․초가 쓰였으나 송(宋)․원(元)대에 복고조(復古調)의 기운이 생겨 주목되어 청대(淸代)에는 전․예서의 연구가 왕성하게 행해졌다.
(隸書)
중국 한(漢)나라 때의 옛 서체(書體). 전국시대부터 진(秦)나라에 걸쳐서, 그 때까지의 공식서체였던 전서(篆書)의 자획(字畵)을 간략화하고, 일상적으로 쓰기에 편리한 서체로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예서란 전서에 예속하는 서체라는 뜻이다. 또 노비인 정막(程邈)이 소전(小篆)을 간략화․직선화하여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예서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은 전한(前漢)부터이며, 전한 중기까지의 것을 고례(古隷)라 한다. 예서는 전한 말기(BC 1세기경)에 완성되었고, 이를 팔분예(八分隸) 또는 팔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한(後漢) 때인 2세기경 팔분은 이미 의례적인 서체가 되고, 대신 초례(草隷)가 생겼으며, 육조(六朝)시대에는 해서(楷書)가 예서를 대신하게 되었다. 예서는 한 점 한 획마다 너울거리는 물결 모양이 있으며, 가장 큰 특색은 가로 획의 끝을 오른쪽으로 빼는 데 있다. 이를 파세(波勢) 또는 파(波)라고 하며, 팔분은 좌우에 균형잡힌 파가 있는 서체를 말한다. 고례의 작품은 전한시대의 목간(木簡)에 많이 전해지며, 후한 후기에 비(碑)의 건립이 유행하여,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 안의 ꡐ을영비(乙瑛碑)ꡑ ꡐ예기비(禮器碑)ꡑ 등, 팔분으로 쓴 뛰어난 비가 많이 세워졌으며, 서가(書家)들이 서로 솜씨를 겨룬 결과, 서도(書道)가 융성해졌다. 당(唐)나라의 현종(玄宗)은 예서에 능하였으며, 청대(淸代)에는 한예(漢隸)의 비(碑)에 대한 연구가 성행하였다.
(草書)
한자의 전서․예서 등의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쓴 서체. 초(草)는 초고(草稿)의 뜻이며, 신속히 쓰는 필기체로서, 중국 한대(漢代)에 비롯되었다. 전한(前漢) 무렵, 전서의 필기체로서, 고초(古草)가 있고, 후한(後漢) 초기에 장초(章草)가 생겼으나 이것은 예서의 자획을 간략하게 한 것이며, 붓을 치키는 팔분(八分)의 필법을 가진 기복(起伏)이 심한 것이었다. 후에 동진(東晉) 초기(330?)에 팔분의 필법은 없어지고, 한 자씩 차분히 쓰는 왕희지(王羲之)의 《십칠첩(十七帖)》과 같은 독초체(獨草體)나 붓을 떼지 않고 이어서 쓰는 왕희지의 《상란첩(喪亂帖)》과 같은 연면체(連綿體)가 생겼다. 왕희지나 그의 흐름을 따르는 서가들에 의해서, 간략․민속한 필기체라는 편리성보다도 초서 독특한 미가 발휘되었고 당대(唐代)에는 더욱 흘려쓴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과 같은 광초체(狂草體)를 낳았다. 또한 초서를 해서의 흘림글씨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며, 해서는 초서보다 후에 성립된 것이다.
(行書)
한자(漢字)의 서체. 해서(楷書)를 약간 흘려서 이따금 잇대어 쓴 것처럼 보이는 필체이다. 중국 후한(後漢) 초에 해당하는 1세기경 유덕승(劉德昇)이 창시하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예서(隸書)를 빨리 쓰기 위하여 생겼다고 전해지듯이 후한 말기에 나타난 해서보다 발생이 오래이며 해서체를 부순 것은 아니다.
(楷書)
일점일획(一點一畵)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서체. 정서(正書) 혹은 진서(眞書)라고도 한다. 해서는 예서(隸書)에서 변화, 발달되었으며 후한(後漢) 말기에 이 서체를 볼 수 있지만 독립된 서체로서 완성되지 못하고 위․진(魏晉) 이후에 비로소 예술적으로 완성되었다. 그 당시 해서를 금례(今隷)라 한 것을 보면 그 발생과정을 알 수 있다. 이후 남북조(南北朝)시대에 북위(北魏)의 《용문석굴조상기(龍門石窟造像記)》 《장맹룡비(張猛龍碑)》 《고정비(高貞碑)》 등의 방필(方筆)과 《정희비(鄭羲碑)》를 비롯하여 운봉산(雲峯山)의 제각(諸刻)의 원필(圓筆)로써 큰 흐름을 이루었다. 이후 초당(初唐)에 이르러 우세남(虞世南)․구양 순(歐陽詢)․저수량(遂良) 등이 배출되면서 해서의 전형이 완성되었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해서의 극치로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중당(中唐) 때 안진경(顔眞卿)이 원세(圓勢)를 가미한 새로운 서풍을 이루었고 이상의 4대가 이후에는 이들에 필적할 작품이 없다. 위 4대가의 대표작으로는 우세남의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구양 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저수량의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 안진경의 《근례비(勤禮碑)》 《가묘비(家廟碑)》 등이 있다.
(顔眞卿/709~785)
중국 당(唐)나라의 서예가. 자 청신(淸臣). 산둥성[山東省] 낭야(琅邪) 임기(臨沂) 출생. 노군개국공(魯郡開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안노공(顔魯公)이라고도 불렸다. 북제(北齊)의 학자 안지추(顔之推)의 5대손이다.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평원태수(平原太守)가 되었을 때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맞았으며, 이 때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조정(朝廷)을 위하여 싸웠다. 후에 중앙에 들어가 헌부상서(憲部尙書)에 임명되었으나, 당시의 권신(權臣)에게 잘못 보여 번번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784년 덕종(德宗)의 명으로 회서(淮西)의 반장(叛將)인 이희열(李希烈)을 설득하러 갔다가 감금당하였고, 이어서 곧 살해되었다. 그의 글씨는 남조(南朝) 이래 유행해 내려온 왕희지(主羲之)의 전아(典雅)한 서체에 대한 반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남성적인 박력 속에, 균제미(均齊美)를 충분히 발휘한 것으로, 당대(唐代) 이후의 중국 서도(書道)를 지배하였다. 해(楷)․행(行)․초(草)의 각 서체에 모두 능하였으며, 많은 걸작을 남겼다.
(顔眞卿三稿)
중국 당나라 서법(書法)의 대가 안진경(顔眞卿:709~785)이 남긴 행초서(行草書)의 대표적 필적 세 가지. 안진경은 해서․행서․초서 3체에 모두 독창성과 우수성을 발휘하였으며 그의 행․초서 중에서 특히 유명한 필적은 그의 삼고(三稿)이다. 즉 《제질문고(祭姪文稿)》 《고백부문고(告伯父文稿)》 《쟁좌위고(爭座位稿)》로서 이들 글씨는 모두 글씨를 쓴다는 의식이 없이 졸연간에 휘갈겨 쓴 초고 그대로의 필적이어서 더욱 자연의 묘미가 있고, 진귀하게 여겨지는 글씨이다. 이 삼고 중 《제질문고》와 《고백부문고는 758년(乾元 1) 이후에 쓴 것이며 《쟁좌위고》는 그로부터 6년 후인 764년(廣德 2)에 쓴 것이다.
① 제질문고:이 법첩(法帖)의 진적(眞蹟)은 송대(宋代) 선화내부(宣和內府)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원대(元代)에 와서 조원례(曹元禮)가 입수, 선우 추(鮮于樞)에게 전해졌고 그 후 장안(張晏)이 입수하였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은사례(殷司隸)에게 옮겨졌고 다시 몇 사람을 거친 후 그 존재여부가 분명치 않다가 지금은 정운관(停雲館)에서 모각(摹刻)한 것이 전해진다. 진적은 베이징[北京] 구궁박물관[古宮博物館]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엄주산인고( 州山人稿)에는 ꡒ공의 행압(行押)의 묘가 여일 극치한 것은 이 원고 뿐이다…ꡓ라고 칭찬하였다.
② 고백부문고:백부(伯夫)를 제사지낸 제문이며 선화서보(宣和書譜)에도 있고 각본(刻本)으로 전해진다. 엄주산인고에는 ꡒ이 법칙은 제질문고와 동법으로 둔좌울발(頓挫鬱勃)은 약간 비슷한 점이 있다ꡓ고 하였다.
③ 쟁좌위고:764년에 안진경이 정양군왕(定襄郡王) 곽영부(郭英父)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 내용은 좌위(座位:官品)를 논한 것이라서 논좌위첩(論座位帖)ꡑ이라고도 하며 여곽복야서(與郭僕射書)ꡑ라고도 한다. 당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정양군왕이던 곽영부가 조정의 신임을 기화로 교만․사치하여 조정신하의 서열좌위까지 무시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는 그의 비행을 점잖게 나무라고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이 쟁좌위첩의 진적은 송대(宋代)에 장안에 살던 안사문(安師文) 집에서 발견되었는데《소동파집(蘇東坡集)》에 ꡒ안진경공의 다른 글씨에 비해 가장 기발하고 특이하다ꡓ라는 평이 실려 있다. 손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쓴 것에 도리어 안진경의 참모습이 나타나 있다.
(歐陽詢/557~641)
중국 당나라 초의 서예가. 자 신본(信本). 담주임상(潭州臨湘:후난성) 출생. 진(陳)나라의 광주자사(廣州刺史)였던 아버지 흘(紇)이 반역자로 처형된데다 키가 작고 얼굴이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는 등 어릴 적부터 불행한 환경을 참고 견디며 자랐다. 그러나 머리는 유난히 총명하여 널리 경사(經史)를 익혔으며, 수양제(隋煬帝)를 섬겨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다. 그 후 당나라의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에는 급사중(給事中)으로 발탁되고, 태자솔경령(太子率更令)․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발해남(渤海男)에 봉해졌다. 그의 서명(書名)은 멀리 고려에까지 알려졌는데 이왕(二王), 즉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 부자의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황보탄비(皇甫誕碑)》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화도사비(化度寺碑)》 등의 비와 《사사첩(史事帖)》 《초서천자문》을 보면 오히려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의 글씨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하였다. 그의 아들 통(通)도 아버지 못지 않은 능서가(能書家)로서 유명하다.
(歐陽詢體)
중국 당나라 초의 서예가 구양 순의 서체. 자획(字畵)과 결구(結構)가 함께 방정(方正)하고 근엄(謹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 데도 잠시라도 정신적 이완을 불허하는 율법적(律法的)인 특색을 지녔다. 구양순은 왕희지체를 배웠다고 하지만 험경(險勁)한 필력이 왕희지보다 나아서 자신의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였다. 구양 순의 서적(書蹟)은 비서(碑書)와 서첩으로 전하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이다. 한국에서는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왕희지체가 무색할 정도로 구양순체가 유행했었다.
(九成宮醴泉銘)
중국 산시성[陝西省] 린유현[隣遊縣]의 고궁터에 있는 당나라 때 세운 비석. 632년 여름, 당 태종이 수나라 때의 인수궁(仁壽宮)을 수리하여 구성궁(九成宮)이라 개칭하고 이 곳에 피서하러 갔을 때 궁의 정원 한 모퉁이에서 단맛이 나는 샘물이 솟아 이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한다. 이 비석의 명문은 당시의 시중(侍中) 위징(魏徵)이 칙명에 의하여 찬(撰)하고, 구양순(歐陽詢)이 썼다. 이것은 구양순이 76세 때에 쓴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 중 첫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단정하고 명랑한 서풍과 뛰어난 품격미를 과시한 작품으로 예로부터 해서(楷書)의 극치로 칭송되고 있다. 비문은 24행이며, 50자로 되어 있다. 그 탁본은 이미 심하게 마멸되어 그 동안 수 많은 감상자들이 몰려들었던 사실을 말하여 준다. 이와는 별도로 송탁본(宋拓本)의 우수한 서첩(書帖)이 오늘날에 전해지고 있다.
(禮器碑)
예서(隸書)의 법첩(法帖). 중국 후한(後漢) 환제(桓帝)의 영수(永壽) 2년에, 노(魯)나라 재상 한래(韓 )가 산둥성[山東省]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孔子廟:이곳에는 한 이하 역대의 비가 많이 있어 曲阜碑林이라 한다)를 수리하고 제기를 바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정면과 이면(裏面:碑陰), 좌우양측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비의 정면에는 서(序)․명(銘)과 한래 이후 9인의 이름이 있고 글씨체는 예서이다. 한비(漢碑)에는 중후한 것과 연미(硏美)한 것이 있으며, 이 비는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용(中庸)을 얻은 것으로 한비 중 최고의 걸작이다. 문자의 구성이 알맞고 용필이 정묘하며 힘이 있어 높은 품격을 지니고 있다. 다른 비에 비하여 손상이 비교적 적으며, 글자수가 많아 예서의 교본으로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겨진다.
(揚州八怪/양주팔괴)
중국 청나라 중기 소금의 집산지로 알려진 상업도시 양저우[揚州:江蘇省]에서 활약한 8인의 화가. 괴(怪)란 정통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며, 보통 왕사신(汪士愼)․황신(黃愼)․김농(金農)․고상(高翔)․이선(李)․정섭(鄭燮)․이방응(李方膺)․나빙(羅聘) 등 8인을 이르나, 고상 대신 고봉한(高鳳翰), 이방응 대신 민정(閔貞)을 드는 경우도 있어 반드시 고정되어 있지 않다. 또 화암(華)도 8괴에 준하여 취급된다. 8괴의 공통적인 특색은 전통적인 화법이나 기교에 구애되지 않고 독창적․개성적인 표현으로, 화훼(花卉)․인물을 즐겨 다룬 점이다. 정섭과 이선이 일시 관계에 나간 일이 있으나 대부분 관리의 길에는 들지 않고 시와 서화를 즐기며 자유인으로 지냈다. 화풍상으로는 명나라의 서위(徐渭)에 이어지며, 청나라 말기의 조지겸(趙之謙)․오창석(吳昌碩)에 큰 영향을 끼쳤다.
(篆刻)
나무․돌․금옥(金玉) 등에 전자(篆字)로 인장(印章)을 새기는 일, 또는 그 새긴 글자. 서예나 그림을 그린 후에는 자기 이름이나 호(號)를 쓰고 도장을 찍는다. 이 도장은 문인묵객(文人墨客) 스스로가 새기는 것이 통례이다. 예부터 중국에서는 인장이 쓰였는데, 가장 발달하였던 시기는 한대(漢代)였다. 11세기 송대(宋代)에 이르자 새로운 금석학(金石學)의 발달로 한나라의 인장이 부활하게 되었고, 15세기 명대(明代)에 이르러 새기기 쉽고 아름다운 석재(石材)의 발견으로, 이전에 상아를 쓸 때와 같이 장인(匠人)들에게 인장을 의뢰하지 않아도 쉽게 새길 수 있게 되어 문인(文人)들은 장인예(匠人藝)로서는 이룰 수 없는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놓았다. 수많은 문인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전각은 시(詩)․서(書)․화(畵)와 병칭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초기의 창시자는 문팽(文彭)과 하진(何震)이며, 청대(淸代)에 이르면 정경(丁敬) 등의 한인(漢印) 연구로 더욱 새롭게 발전하였다. 그들은 출신지인 항저우[杭州]의 아명(雅名)을 따 ‘절파(浙派)ꡑ라는 세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청대는 전각의 흥륭기(興隆期)로, 등석여(鄧石如)․조지겸(趙之謙)과 같은 명인이 잇따라 나타났고, 청대 말에서 중화민국 초에 걸쳐 활약한 오창석(吳昌碩)은 구중국(舊中國) 전각의 마지막 대가였다. 한국의 전각역사는 인장이 사용되기 시작한 고려 때부터이다. 당시는 대부분 동인(銅印)․석인이었고, 모양도 4각형, 6각형, 원형이었다. 자체(字體)는 대부분 구첩전(九疊篆)이며 배자(配字)는 방사선식으로 되어 있어 원주를 향하여 머리를 두고 있다. 이같은 고려 전각의 유풍은 조선으로 계승되어 상서원(尙瑞院)에서는 구첩전과 소전체(小篆體)로 동인․철인 등을 만들었다. 역대 임금의 많은 어보(御寶)가 만들어졌으며, 서예․회화의 발달과 함께 문인 스스로가 전각하는 사인(私印)이 유행하였다. 미수(眉) 허목(許穆)은 한국 전각의 제1인자이며, 전각을 남긴 많은 사람 중에서 자기 스스로가 전각하였다고 믿어지는 문인문객은 정학교(丁學敎)․정대유(丁大有)․윤두서(尹斗緖)․오경석(吳慶錫)․이상적(李尙迪)․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김상용(金尙容)․오세창(吳世昌) 등 20여 명을 손꼽을 수 있다. 재료는 대개 부드러운 납석계(蠟石系)의 돌을 사용하고 도구는 철필(鐵筆)이라는 양날의 손칼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