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가 마음속 깊이 잊혀지지 않거나, 잊을 수 없는 사람이 한두 명쯤은 으레히 있기 마련이다. 이미 고인이었거나 현세의 인물이거나 관계없이 일상생활과 직간접으로 연관이 지어질 때면 그 농도가 보다 절실해진다. 서예술의 대가(大家)였던 이삼만(李三晩) 선생을 나는 어려서부터 마음속 깊이 존경해 왔다. 선생님의 경해(驚駭)에 접할 기회는 가지지 못했어도 언제나 그분 곁에 있거나 조석으로 뵙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내가 이토록 선생을 존경하게 된 연유는 그분이 서예의 대가였다는 선념보다는 인간으로서 인내의 한계를 넘는 서예학습의 수련과정이 나를 보다 감동케 했는지도 모른다. 이삼만 선생은 조선 말기 철종 때 전북지방에서 활동했던 서예가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붓글씨 공부에 정심하여 먹을 갈아 구멍이 뚫린 벼루가 세 개나 되었다고 한다. 범인들로서는 도저히 인내하기 어려운 각고의 수련을 통해 마침내 일가를 이루어낸 서예술의 대가이다. 이삼만 선생이 하루는 돈 많은 부호의 선산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봉분 앞에 잘 다듬어진 비석이 아직 각자가 되지 않은 상태로 누워 있기로 불현듯 글씨를 써넣고 싶은 욕망이 회동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망자의 관성명을 물어 항시 지니고 다니던 필묵으로 석면 위에다 비문을 일필로 휘둘러 놓고 산소지기에게, 「주인이 오거든 이삼만이가 휘필했노라고 일러라.」 하고 홀연히 떠나갔다. 한편 묘소 주인은 양반된 가문의 체통으로 보나 돈 많은 권세로 보아 선영의 묘비는 의당 덕망 높은 선비의 필체로 입석하리라 하여 몇몇 이름 있는 저명인사들을 안중에 두고 물색중이던 차에, 느닷없이 양반도 아닌 중인 신분의 이삼만이가 비면 위에다 낙필을 하고 갔다는 연락을 받고 노발하여 쫓아와 보니 아직 묵흔이 체 마르지도 않은 영롱한 필세는 선녀가 구름을 타고 하강하는 듯, 천둥번개가 뇌성을 하는 듯, 맹호가 천산을 달리는 듯하여 넋을 잃고 바라보고 섰다가, 「아깝구나, 이삼만이가 양반의 신분만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고.」 탄식을 하고는 산소지기를 시켜 물로 깨끗이 닦아 없애 버리도록 지시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물을 쏟아붓고 비로 쓸어내고 행주로 닦아내도 묵흔은 오히려 생생해지기만 했다. 묘소 주인은 도리없다 하여 이삼만 선생의 필적으로 비각을 하여 입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묵흔이 지워지지 않은 까닭은 오랜 세월 먹을 열심히 가는 동안 손에 공력이 붙어나서 필압의 힘이 석면 깊숙이 먹물을 흘려 넣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삼만 선생에 대한 전설적 이야기의 진위야 어찌됐건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학동의 마음속 깊이에는 이삼만 선생이 하늘처럼 높아 보이고 첨산처럼 우뚝 솟은 천하 명필의 상징이었으며 장래의 지표이기도 했었다. 「세월이 흐르면 산천도 그 모양을 바꾼다」했듯이 서학동호인(書學同好人)들과도 지교관계가 많지 못했던 나로서는 오랜 세월을 호리건곤(壺裏乾坤) 속에 부침(浮沈)되어 우직스럽게도 고대금 석문이나 중국 서예가들의 서첩만을 최고인 양 탐닉하다 보니 이땅의 서화예술인들의 묵적에는 미처 관심을 돌리지 못한 채 세월을 넘기는 동안 어린시절 그토록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삼만 선생에 대한 열념도 먼 옛날의 기억 속으로 점차 잊혀져만 갔다. 그랬는데 5년 전 무심히 펼쳐보던 신문광고란에서 조선 말기의 명필 이삼만 선생의 유작전을 전북 문화방송국 주관으로 도청 공보관에서 전시한다는 기사가 나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나도 언젠가는 기필코 3개의 벼루에다 구멍을 뚫고야 말리라고 가슴 부풀리며 밤잠 설레였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일시에 되살아 올랐다. 전시기간이 그날로 끝나고 있었다. 나는 앞뒤 가릴 여유도 없이 곧장 터미널로 달렸다. 기운차게 내달리는 버스 차창 밖에는 삼복더위 속에 가로수 잎들마저 생기를 잃었고, 열기를 푹푹 토해내는 아스팔트는 차체를 뜨겁게 달구어 냉방시설이 미진한 차 속은 찜통 속 그대로 였다. 땀이 옷을 흥건히 적셔 흘러도 들떠 있는 마음에 더위도 잊었다. 전주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원 방송에 얼핏 차창 밖을 내다보니 개선문 같은 거대한 일주문(一株門)이 차가 달려가는 앞 저만큼에 하마처럼 입을 쩍 벌리고 섰는데, 문루 상단에는 예도의 고장임을 뽐내기라도 하듯 강암(剛庵) 선생이 휘호했다는 호남제일문(湖南 一門) 현액이 천리여정의 고달픈 길손을 반갑게 맞아 주는 듯했다. 차는 마침내 종착지에 도착을 했다. 북적대는 인파속을 헤집고 대기중인 택시에 몸을 던졌다. 택시가 터미널 광장을 빠져 나올 때쯤 택시기사에게 행선지를 알렸더니 눈치빠른 택시기사는 벌써부터 내가 전주 땅에 내려온 목적을 훤히 간파하고 있었다는 듯 싱글거리는 웃음빛 얼굴로 뒷좌석에 앉은 나와 백미러로 눈길을 맞추더니 느닷없이, 「인제사 알고 본깨로 국중에 명필은 우리 지방 사람이었는디 그 양반 글씨가 그렇게도 유우명 하담서요.」 한다, 순간 나는 마음속을 도둑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답 대신에, 「어떻게 알아보았소.」 되물으니, 「왜 몰라라. 그 정도 못 알아보먼 택시기사직 그만둬야제라. 요 며칠 상간에 서울서 온다는 손님을 다섯 번도 넘게 그곳으로 뫼셔다 드렸소.」 「그럼 전시장 안에도 들어가 보셨겠군요. 사람들은 많이 왔었던가요?」 여러 가지 궁금한 일들이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우리 같은 까막눈들이사 가본들 뭘 알겄소마는 그분 아호가 창엠(蒼巖)이라 하는디 전저바닥에는 구분 글씨가 안즉도 솔찬히 굴러댕기고 있제라. 몇 년 전에는 우리집에도 두어 장 있었는디 표구사 허는 친천이 하도 달라고 해싸서 그냥 줘뿌렀소. 시방 생각해 본깨로 여엉판 애싹허요. 서울서도 이렇게들 와쌌는디.」 50대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