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교실

낭공대사碑 기사<주간 동아 2000.08.10 >

낭공대사碑 역마살 끼었나
신라 명필 金生의 글씨 기록된 문화재 불구 이리저리 유랑생활

                                                         

비(碑)의 궤적을 찾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무더위가 맹위를 떨친 지난 7월27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청량산의 한 자락을 붙들고 앉은 이 골짜기 마을엔 그러나 신라 명필 김생(金生·711∼791)의 글씨를 집자해 만들었다는 비의 흔적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신라시대 고찰로 조선 중기에 이르기 전 일찍이 폐사된 것으로 알려진 태자사 절터. 이곳에 있었다는 낭공대사비 대신 기자를 맞은 것은 비신(비의 몸체)이 달아난 채 남아 있는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와 이수( 首·용이 새겨진 비석 덮개돌). 수년간 손대지 않은 듯한 퇴락한 비닐하우스와 지난 93년 폐교된 태자초등학교의 낡은 건물 사이로 숨겨지다시피 놓인 이 석조물들은 한눈에 보아도 1000년의 풍상을 겪었음직한 것들이었다.

‘이 석조물은 신라 말기 왕사(王師)인 낭공대사의 백월서운탑비의 귀부와 이수로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제작 연대는 확인 못함… (중략) …우리나라 금석학상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 안동시청이 석조물 옆에 세워둔 안내표지판은 이 귀부와 이수가 ‘경북도 문화재자료 68호’란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표지판 내용대로라면 이 귀부와 이수는 낭공대사비의 부속물이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청량산 일대 김생 유적을 답사하고 있는 대구의 금석문연구가 이봉호씨(67)는 “이 귀부와 이수는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달리 낭공대사비의 것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이씨의 말은 사실일까. 그렇다면 낭공대사비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의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박물관 창고서 14년째 햇빛 못 봐

낭공대사비의 기구한 유전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식 명칭이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인 이 비는 원래 신라시대 명필로 ‘해동의 서성(書聖)’으로 불리며 중국 송나라의 최고 명필 왕희지와 비견되던 김생의 글씨들을 고려 광종 때인 954년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해 새긴 비석. 명승이자 신라 효공왕과 신덕왕의 스승이기도 했던 낭공대사(832∼916)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들에 남겨진 낭공대사비의 운명은 순탄치 않다. 건립 당시 경북 봉화군 태자리(일제강점기에 안동 땅으로 편입됐다)의 태자사에 세워져 있던 이 비는 조선 중종 때인 1509년 당시 영주군수 이항(李沆)에 의해 영주군청 정자인 자민루(字民樓) 앞으로 옮겨져 400여년을 보낸 것으로 비의 측면에 기록돼 있다.

제자리를 잃은 낭공대사비의 수난은 1918년 조선총독부가 이 비를 총독부 박물관이 있던 경복궁으로 옮긴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놓여 있던 이 비는 다시 1986년 당시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의해 구 중앙청 건물로 이전해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 창고로 옮겨진 후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

7월28일 기자는 낭공대사비의 현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신광섭 유물관리부장(49)은 “낭공대사비 비신은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안전하게 보관, 관리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포장이 씌워져 있다는 이유로 사진촬영은 허용되지 않았다. 대신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의 도록을 보여줬다. 도록엔 가운데가 절단된 낭공대사비의 사진이 있었다. 인수 당시의 상태 그대로라는 것이 박물관측의 답변.

중앙박물관엔 현재 12만여점의 소장유물 중 5000여점만 상설 전시되고 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유물은 특별전시 계획이 없는 한 낭공대사비처럼 수년간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낭공대사비는 아직 문화재로 지정돼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가치는 매우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김생 글씨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신품(神品)으로 불릴 만큼 출중해 낭공대사비는 김생의 글씨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자료라 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유물관리부 학예연구사 조용중씨(40)는 “우리나라 비석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수준이 높지만 수장고 내에 있는 전체 비석 수는 10점도 안 될 만큼 희소하다”고 말했다.

제자리를 떠나 ‘유랑’의 길을 떠나야 했던 낭공대사비엔 몇 가지 의문이 따른다.

총독부는 왜 낭공대사비를 서울로 옮겼을까. 조씨는 박물관에 남아 있는 각종 자료를 통해 낭공대사비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했다. 그가 제시한 박물관 유물관리 카드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19년 6월11일 누군가로부터 이 비를 당시 돈 100원에 사들여 경복궁 정원에 세운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누구로부터 구입했는지, 왜 구입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또 여러 금석학 문헌에서 밝히고 있는 ‘1918년’이란 비석 이전 시기도 1년이나 차이가 난다.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박물관측이 낭공대사비에 대해 아는 사실은 이 비가 191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진 이후 1959년에도 여전히 경복궁 정원에 있었고 1986년에 비로소 박물관 창고로 직행했다는 것 정도다.

다행히 낭공대사비는 조만간 ‘세상빛’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측은 2003년 말 준공 목표로 서울 용산에 건립 중인 새 중앙박물관이 완성되면 낭공대사비를 일반에 공개할 전시계획을 잡아두고 있다는 것. 17년여에 걸친 ‘지하 유배생활(?)’을 끝내게 되는 셈이다.

이젠 귀부와 이수를 찾아보자. 박물관측은 “낭공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는 원래부터 사라지고 없었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현재 안동에 있는 귀부와 이수는 무엇인가. 안동시의 추측대로 낭공대사비의 것일까.

2003년 말 일반 공개 추진

아쉽게도 중앙박물관측은 물론 대다수 학자들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 석조물의 명예관리인인 태자리 주민 김점수씨(53)는 “일부 대학생이나 서예 동호인들의 현장 답사는 간간이 이어지고 있으나 전문 학자들이 찾아온 적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점에 의문을 품어온 금석문연구가 이봉호씨는 이미 2년 전 귀부와 이수의 치수를 재보았다. 이씨의 실측 결과에 따르면 이 귀부와 이수에 맞는 비신의 크기(높이는 알 수 없다)는 폭 85cm, 두께 14.5cm. 중앙박물관측이 밝힌 낭공대사비의 실측 결과인 비신 높이 208.5cm, 폭 102cm, 두께 26cm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비석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도대체 태자사터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어떤 비석의 것일까. 그리고 그 비석은 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동시 문화재계 관계자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래 태자사터엔 낭공대사비와 함께 통진대사(通眞大師)비라는 비석이 하나 더 있었던 것으로 돼 있다”며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의 주인이 통진대사비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장유물 중 통진대사비라는 것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중앙박물관측은 “해당유물 자체는 물론 그에 관한 기록조차 전혀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결국 언제인지 모르지만 귀한 비석 하나가 일찌감치 사라져버렸다는 얘기다.

어쨌든 같은 절터에 나란히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비석의 엇갈린 운명은 오랜 우리 문화재 수난의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다. 혹 우리의 유물 조사연구가 너무 크고 화려한 유물들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두 비신의 크기 차가 확연한데도 아직 일부 문헌에서는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가 낭공대사비의 것이라고 단정짓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결국 잃어버린 낭공대사비의 귀부와 이수를 찾는 일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의 주인인 또 다른 비석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일도 과제로 남는다. 문화재는 외면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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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비문에 대하여(<a href=http://www.seoyea.co.kr/epitaph/?id=bimoon) target=_blank>http://www.seoyea.co.kr/epitaph/?id=bimoon) </a>

槪 論

비문이란 사회적으로 공헌이 있는 훌륭한분이나 선조들이 나라와 가정에 훌륭한 치적이 있을 때 그분들의 뜻을 기리보전하여 잊지 않기 위함이며
누구나 선조 삼대를 살펴보건대 세분 중에 한 분만큼은 나라나 가정 사에 크게 이받이하여 잊지못할분이 계시다.
이러한 분들의 비문을 21세기를 달리고 있는 우리세대에 어떻게 작성해야 될 것인가

1. 해방후 신문화를 접하고 돌아가신 분은 후손들이 쉽게 읽어볼 수 있는 한글로 작성하는 것이 타당하다
 
2. 예술에는 구도가 잘 구성되어야 대작이 될 수 있듯이 풍속에도 구색이 따라야 본연의 의미를 구성하게 된다
우리가 단군의 초상을 그리면서 양복을 입혔다고? 또는 300년전 조상의 초상을 그리면서 중절모자에 넥타이를 착용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둘다 대답은 뻔한 일이다.
 
3. 조선시대에 벼슬하신 분의 비문을 한글로 지었다고 보자
첫째 : 한문을 한글로 번역을 하면 글자수가 3배로 늘어나 좁은 비석에 그분의 기록을 다할 수 없다.
둘째 : 숭록대부. 가선대부. 통정대부. 통훈대부의 벼슬 하신 분이 한글비문 이라면 구색이 어떻게될까?
셋째 : 완전 한문으로 작성했다면 후손이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겠는가?
 
4. (비석 사진)
한국의 서예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하여 한문으로 작성하고 여기에 율곡선생(李珥)이 제정하신 표준 토(吐)를 달아서 한문사전만 가지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짓는다.
 
5. 비문필사는 어떠한 글씨로 써야하는가?
첫째 : 좋은 글씨의 비석이라면 예술로써 한층 돋보여 하나의 자랑거리이다 그렇기에 옛 선조들은 명필을 찾았고 필사자의 이름이 반드시 기재 된 것이다.
둘째 : 단골체(서당글씨체)와같이 서법이나 임서가 무시된 글씨라면 공들려 세운 비석을 후세들이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셋째 : 한문 書法은 수천 년을 내려와도 변함이 없으니 비문은 반드시 서법에 준한 글씨를 선정해서 필사해야한다.
 
碑石의 種類
短褐(단갈)--짧은 비석으로 아무런치장이없다. 褐--無衣無褐--치장이없다는말
無冠碑(무관비)--정삼품관 이하는 갓을 씌울 수 없다.
冠碑(관비) -- 종이품관 이상의 묘비에 씌울 수 있다
神道碑(신도비)--종이품관(대감)이상의 비석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 묘지에서 가장 가까운 길옆에 세운 비석.

碑石의 規格

높 이 면 넓 이 두 께
五尺(150㎝) 一尺八寸(54㎝) 八寸(24㎝)
五尺五寸(165㎝) 二尺(60㎝) 九寸(27㎝)
六尺(180㎝) 二尺二寸(66㎝) 一尺(30㎝)

碑文書式

예로부터 비문에 대한 특별한 서식은 없으나 선인들이 작성한 것을 보면 대략 初 中 終으로 비슷한 점이 있어 이를 書式이라하고 소개한다

〈初〉 公의 諱는 ○○ 이오 字는○○으로 ○○氏 諱○○가 寔爲鼻祖也라 世
有明德하고 累世簪纓하야 ○○世諱○○는 ○○功臣으로 諡號○○ 祖의 諱는 考
의 諱는 等等 (선조紹介)
〈中〉 는 ○○公 諱○○之女로 以○○年○月○日生于漢城舊 하다 〈公生于○○年○月○日漢陽舊屋 〉
(1)外家및 胎生 (2) 甫成童(소년시절) (3)旣長 (장성.冠禮후) (4)行狀(하신 일) 等等 ( 외가 및 주인공의 소개)
〈終〉 配○○氏 諱○○之女로 生○男○女하니 長曰○○이오 次曰○○라 等等( 妻家 및 子孫소개)

※ 경탄할 行狀이나, 忠義지사와, 시골에서 편안히 지내신분,등을 初上에 (卷頭. 弁言)로
훌륭함과 경탄함과 편안함 등을 쓰기도 한다
例 -- (1) 世或有才德之士가 其才德이 足以經國濟民이나 而不遇其時하야 等等
例 -- (2) 故大司憲 ○○公者는 剛毅有大節하다 數上書論事하니 皆國家所以安危 存亡之故로 等等
例 -- (3) 隱居于山川之下하야 時以詠歌自樂하고 無意於功名으로 甘美於監農하고 煙霞於杞菊으로 四時佳節하며 平生安分樂道하다 等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