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 창간 5주년 기획특집(乾) 까마의 눈 작가 탐방인터뷰
書窓多暇 작가와의 대화 - 효봉 여태명
대담 : 김정환(책임편집위원) 요즈음은 많은 것들이 전문적으로 분화되어 진리와 삶의 통합적 가치는 단지 고전적인 가치로서 취급되는 듯하다. 미(美)에 대한 견해도 삶 혹은 깨달음과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과시하는 아름다움으로 변해가고 있다. 미는 특정 전문가의 전유물이나 관심 밖의 일로 치부되어 예술의 영역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독자적으로 고고하게 자리 매김함으로써 ‘갤러리’ 혹은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신전’ 속에서 우아하게 거주한다. 실용적이거나 종교적 각성내지 교화 등의 도구로써 기능하던 예술은 덜 순수하며 타락한 것으로 간주되고, 예술 그 자체로서의 자기 충족성과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인 사상에서는 ‘삶과 깨달음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진리의 구현을 표방하여 왔다. 이것은 일상과 심미적 충족의 욕구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미적 경험이 삶 속에서 하나로 융합됨과 동시에 진리에 대한 통찰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미(美)는 따로 즐기는 것이 아닌 삶 속에서 실질적으로 통합되어 생생하게 되살아나 삶과 하나로 기능하는 것이다. 실용적이라든가 현세적, 세속적이라는 말은 정신적 측면과 상반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효봉 여태명의 고민은 예술과 일상의 간격을 좁히는 것, 생활 속에서 한층 빛을 발하는 서예의 쓰임새이다. 그의 화두는 내 서예가 이 사회에 무엇을 남겼는가로 결집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문자의 해체를 통해 필묵을 재해석하고 있으며, 표현방식이 소박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고, 토속적이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닌다. 작가는 일찍이 각별한 한글 사랑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글씨인 민체(民體)를 연구, 개발해 내었고 서예가 대중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작가로 기억되는 그는 회화적 서예와 서예적 회화로 동서고금의 모든 미술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바쁘신 가운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즈음 근황은 어떠십니까? 엊그제 종강을 했습니다. 오늘 『까마』와의 인터뷰가 있어서 새벽차로 서울에서 내려왔어요. 10 여년 동안 쉬지 않고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이젠 몸과 마음이 지칩니다. 미쎌 시꺄르(Michel Sicard) 교수와의 2인전이 끝나고 나서 지금까지 한달 동안 붓을 잡지 않았어요. 몸과 마음이 지치다 보니 작업하기가 싫었어요. 예술의 전당에서 가져온 작품들도 치우지 않고 한쪽에 그대로 두고 있어요. 당분간은 휴식을 취할 생각입니다.
▶주목 받았던 전시가 올 4월 28일부터 5월5일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있었던 미쎌 시꺄르 교수와의 <2인 교류전-획의 본질로 말하는 글과 그림> 이었습니다. 두 분은 언어와 문자가 갖는 ‘사회적 약속과 의미를 가지는 문자’의 성격을 예술로 표현하는 서예술의 개념을 뛰어넘어 ‘획과 선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근간으로 하는 예술이라는 본질적인 공통분모로 융합하는 과정을 보여주셨습니다. 전시를 갖게 된 계기와 이번 전시를 통해 느낀 것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양과 서양은 지역적으로 틀립니다. 예를 들어 땅덩어리가 넓은 중국을 보더라도 남방 문화와 북방문화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지요. 그러한 이유로 중국화에서 보면 북화와 남화가 틀리게 나타납니다. 이번 전시는 한국 사람인 여태명과 프랑스 사람인 시꺄르 교수 두 사람 개인의 차원이 아닌 두 문화의 만남이라고 봅니다. 시꺄르 교수의 작품에 나타나는 양식이 개방적이고, 표현적이고, 여러 가지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고 본다면, 제 작품은 다소 미흡한 부분도 있지만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인의 감성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을 발견하고, 확인하려는 작업이 전시의 목적이었습니다. 여러 가지를 풀어서 헤쳐보기도 하고,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로서의 생각을 확인하고,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번 전시를 통해 시꺄르 교수와의 공동 작업을 3 ~ 4점 정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서초동에 있는 제 연구실에서 처음 마주하고, 서로 의기투합해서 12작품을 같이 제작하였고, 그 중에서 6작품을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제작과정은 처음 작품은 한 사람이 일정부분을 만들면 한 사람이 이어서 하는 형식이었는데, 나중에는 두 사람이 한 화면에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대로 작업을 했습니다. 시꺄르 교수는 한글의 자음이 무엇인지, 모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 작품의 천.지.인 시리즈를 보고 아직도 문자적인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평해 주었습니다. 저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실이거든요. 저 자신은 스스로 깨어있는 사고를 가지고 국내의 다른 작가들과는 차별화된 작업을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 않더군요.
▶최근 백악미술관에서 열린 훈민 한글서예학회전에 출품하신 작품 중 처음처럼 이라는 작품에서 재미있는 조형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은 글자 자형에 있어 문자학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다고 보는데요? 물론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문자는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나 읽혀지고, 겹쳐 쓰고 하는 것은 작가가 유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 작품을 두고 문자가 틀렸다고 말한다면 저도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제 작품을 두고 서예작품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는 할 말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질문과 약간 어긋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서예가는 문자학자, 한학자, 시인, 미학자, 미술사학자, 철학자가 동시에 되어야 하는지 저는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반대로 한학자에게 서예가가 되라고 합니까? 문자학자에게 서예가가 되라고 합니까? 저는 저 혼자 작업을 하면서 제 삶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 갑니다. 서예가는 서예만 해도 비난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최근 작품은 올 6월(6. 5 ~ 14)에 ‘sadi갤러리’에서 열린 제2회 캘리그라피 디자인전 에서 춤을 소재로 한 포스터를 통해서 였습니다. 최근 들어 서예(calligraphy)가 새로운 현상으로 여겨질 만큼 여러 시각 매체들을 통해 다양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기계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있는 감성의 대비를 통해 서예 영역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먹의 농담과 묵의 섬세한 필치까지 느낄 수 있는 서예는 이제 안방까지 들어와 우리의 감성을 깨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서예의 상업화라는 비난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서예가 여러 방면에서 관찰되어지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보다 오래 전부터 서예를 일상에 응용해온 일본을 보면, 앞으로 이런 트렌드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서예가로서 느끼는 것과 이러한 작업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상 생활과 예술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서예라고 하면, 나하고는 동떨어진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서예가 한걸음씩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가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서고, 그렇게 됨으로써 일반인들도 서예에 대하여 마음을 열 수 있는 방법의 일환으로 이러한 작업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서예라고 하면 서예가들도 그렇고 일반인들도 필사적인 것, 즉 쓰여져 있는 현상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봅니다. 간판이나 상표 등을 비롯한 생활에 실용적으로 사용 되어야 합니다. 즉 한마디로 현대 서예는 생활에 쓰임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최근 제작된 작품이 이전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서예가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도연명의 시를 쓴다고 가정합시다. 서예가는 단순히 도연명의 시를 자신이 좋아하는 서체로 써서 관람자에게 전달하는 글씨 쓰는 쟁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글감을 쓰더라도 작가(서예가)의 마음을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필사로서의 서예가 아닌 순수한 서예작품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의 작품들은 제 자신을 자유롭게 펼쳐보이는 작품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분방한 회화처럼 보이는 작품도 더러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 가운데 문자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순수한 서예를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그러나 한 곳에 머물기를 체질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항상 변화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서예를 사랑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작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봅니다. 작가는 스스로에게 서예를 위해 너는 무엇을 했나?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저는 서예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고민 끝에 생활서예로 나가야 한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서예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작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작가의 호를 딴 ‘효봉 축제체’를 비롯, ‘효봉 개똥이체·흰돌체·검은 돌체·푸른솔 B체·푸른솔 L체’ 등 6개의 효봉 서체를 만들어 컴퓨터용 CD로 개발하기도 하셨습니다. 제작한 서체는 자유스럽고 개성이 뚜렷하며 서민적인 한글 서체 입니다. 쉽지않은 작업이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제작과정과 이러한 작업을 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글 서예에 대한 관심은 평소에도 많이 갖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 서체를 개발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먼저 개발업체에 제의해서 함께 개발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는 제 서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작 개발업체에서는 많이 팔리지 않았다고 하고 있어요. 제가 하는 일 제쳐두고 쫓아 다니면서 얼마나 팔렸는지 일일이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답답하죠. 또 복사해서 쓰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런 거 단속하는 사람들도 복사해서 쓴다고 하니, 지적재산권을 전혀 보장 받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자금문제 해결이 수월하지 않게 되고, 다음 개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최근에는 한자와 같이 쓸 수 있는 한글 글꼴을 개발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런 것은 정부차원에서 지원이 되어야 하는데, 문예진흥기금을 신청해도 지원이 안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작고하신 서예가 가운데 작품성이 뛰어난 분들의 서체를 폰트로 개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적어도 300자 정도의 기본 획이 나와야 되는데, 기존의 도록이나 작품집에 나와 있는 획만 가지고는 이러한 작업을 할 수가 없거든요. 작품에 나오지 않는 획들은 작가가 직접 써야 되는데 한계가 있는 것이죠.
▶작가가 <축제>라는 영화포스터와 동명의 소설표지에 동의 없이 작가의 서체를 사용하였음을 이유로 벌인 서예계 초유의 지적재산권 관련 사건이 생각납니다. 예전 같으면 생각하기도 어려웠던 일입니다. 작가가 개발한 글자 1획 1자는 작가 인생의 목표였고 살아온 발자취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일반인들의 화제에 오를 만큼 특별한 것은 아니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얼마 전에는 부산영화제의 포스터와 로고 등의 테두리 문양과 글자체 일부가 작가가 지난 94년 발간한 한글서예판본을 도용하였습니다. 작가에게 유독 서예와 관련된 지적재산권 분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서예가로서 지적재산권에 대한 최초의 소송이어서 서예계 뿐만 아니라 문화계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본 사건으로 기억되는데요? 제 작품의 일부를 <축제>에 도용했을 때는, 저 뿐만 아니라 서예인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언론에 알리면서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승소했습니다. 이 사건이 서예가의 창의성을 인정받는데, 제도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서예가의 지적재산권에 대한 법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였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서예가의 작품과 관련된 첫 판례로 사법연수원의 연수생들이 공부하는 판례집에도 실려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사회적 반향이 컸습니다. 그 후에 다시 부산영화제집행위원회 측과 유사한 사례로 분쟁이 벌어지게 되었어요. 외부적으로는 소송만 하는 사람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해 조용히 소송을 진행하였고, 이번에도 제가 승소했어요. 배상금은 원광서예학회와 민족서예가협회의 발전기금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 글씨가 그 만큼 독창적이니까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게 아니냐고 위로하시는데, 어쨌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서예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서구 문화의 대량 유입, 현대식 가옥에 잘 어울리지 않는 작품의 구조(대부분 세로), 크기, 표구양식, 21세기에도 구태의연한 도제식 교육방법, 서예공모전을 둘러싼 끊이지 않는 잡음 등이 서예가 생활에 뿌리를 내리기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행히 아시아 한자문화권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진다고는 하지만 서예인 스스로 ‘특단의 서예 부활책’을 내놓지 않으면 안될 시점으로 판단됩니다. 지금 지적하신 여러 가지 중에서 저는 공모전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서예를 하다보면 공모전에 출품하게 됩니다. 크게는 두 가지 이유에서 입니다. 첫째는 공모전을 통해서 공부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공부한 것을 평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의 세태를 보면 공부라는 목적보다는 평가 위주로 바뀌는 것 같아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목적이 평가, 즉 입상에 있다 보니 공부가 사라져 버렸어요. 이것이 큰 폐단입니다. 여러 협회가 존재하지만 공모전의 주체가 되는 협회들도 공모전을 1년 농사로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공모전의 수익을 통해 협회가 운영되지만, 여기서 발생한 수익으로 국제 교류전이라든가 세미나 등을 통해서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공모전이 협회운영에 있어 현재 100%를 차지하고 있다면, 공모전의 비중을 30% 비중으로 줄이고, 나머지는 세미나나 학술대회, 국제적인 교류전 등에 할애해서 뭔가 서예계에 활력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공모전을 폐지하자는 입장은 아니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모전에 전력 투구하는 것에는 분명히 반대합니다. 심사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책임심사를 해야 합니다. 점수제나 합의제는 현실적으로 공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제도입니다.
▶일전에 신문기사에서 중요무형문화재 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제례악’이 일제식민지 시절 고의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면서 악보를 감정하신 것으로 나온 기사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서예작품에 대한 감정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그것은 또 어떻게 기억하셨습니까? 아직은 감정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서예계에서 고문서 감정분야는 도곡 김태정 선생과 근원 김양동 선생이 남다른 안목을 갖고 계십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몇 마디 더 하자면, 우리 서예계에는 서예사를 공부하는 분들과 서예 평론을 하는 분들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 서예계의 또 하나의 맹점이에요. 한국의 미학을 이야기 할 때, 아직도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일제시대의 시각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서예관련 포럼이나 세미나에 참석해 보면, 서예 평론가나 서예사 전공자는 없고 국문학자나 미술사학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붓도 안잡아 보고, 서예에 대한 안목도 없는 사람들이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니 오류가 많습니다. 한국 미술사는 사실 화론이 50%라면, 서론이 50%입니다. 그래서 서화론 아닙니까. 그런데 화론 공부한 사람들이 서론까지 다 해버려요. 이러한 현실은 바뀌어야 할 것 입니다.
▶중국과의 수교 후 중국 측 작가들과도 교류가 빈번하신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받은 느낌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미술학원의 서예전공 교수들과는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왕용(王鏞), 구진중(邱振中), 유언호(劉彦湖), 서해(徐海) 교수 등과는 남다른 친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미술학원의 왕동령, 주관중 교수, 그 밖에 동북의 조법평, 양산, 오명남 등의 서예가들과도 교류가 있어요.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지역마다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대나무가 많은 곳은 의식주도 대나무와 관련이 있고, 황토지대에는 황토문화를 볼 수 있고, 또 운남성 같은 곳에서는 석림(石林)이라는 돌문화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다른 토양의 영향으로 그 지역에서 표현해 내는 예술이 제각기 틀립니다. 사는 모습에 따라서 그 표현 양식 또한 틀린 것이죠.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미가 있습니다. 중국에서의 전시나 여행 등 교류를 통해서 느끼는 것은 한국의 미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고민 끝에 천.지.인 연작 시리즈를 내놓게 된 것입니다.
▶지난해 남한의 서예가들은 물론 북한과 재일동포들까지 같이 한 ‘민족서예교류전’이 서울의 물파아트센터와 전주의 역사박물관에서 열렸습니다. 교류전을 개최하게 된 계기와 북한과 재일동포 작가들의 작품 특징을 말씀해 주십시오. 북한에도 대학에 서예학과가 있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 서예학과가 있고, 오광성이라는 분이 서예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대표적으로 쓰이는 글씨체는 천봉체라고 김일성의 탄생지에서 그 명칭을 따온 서체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구호적이고, 투쟁적인 서체입니다. 북한 측에서는 고려서예연구회라는 단체가 참가 했습니다. 재일동포 작가들은 대부분 조총련 소속이었어요. 조총련이 국적으로 보면 북한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북한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일본 서예의 영향을 받은 것도 보여집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 지면서 한국 서예의 영향이 점차 확대 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앞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서예계가 이제는 공모전에서 탈피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되었고, 그래서 대외교류의 일환으로 이러한 전시를 갖고, 학술발표회를 한 것입니다. 해외에 있는 우리 교민들이 계승하고 있는 우리 문화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제 생각입니다.
▶현장에서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고 있는 서예학과 교수이자 영향력 있는 서예계 중진으로서 서예계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한국 서예계의 미래는 어둡지 않습니다. 밝습니다. 다만 현실이 어려울 뿐입니다. 서예는 어렵다는 인식이 저변에 깔린 것이 사실이나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서예인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우려되는 것은 작품의 경향입니다. 3개 단체가 실시하는 각각의 초대작가전 도록을 중국이나 일본 작가들에게 보여주면 한결같이 듣는 말이 있어요. 한국에는 공부하는 사람들만 있냐?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바꿔 말하면 작가로서의 서예가가 아닌 아직도 공부하는 단계의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대체적인 수준이 작가라고 말하기 어려운 학서의 단계에 있는 수준이고, 작품의 경향이나 형식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개성과 독창성을 배제하는 한국 서예계의 현실이 부끄럽기도 합니다. 몰개성주의로 흐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서예는 서법도 서도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서예는 서법에서의 ‘법’과 서도에서의 ‘도’에 이르는 과정에 너무 치우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예는 서예일 뿐입니다. 예술로서 서예인데, 지나치게 학문적인 접근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1992년 생긴 원광대를 시작으로 각 대학과 대학원에 생긴 서예학과 출신들의 약진이 최근 서예계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젊은 서예가들이 시대정신을 담고, 현실과 함께 호흡하려면 작가로서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21세기 서예의 발전 방향과 작가의 고민은 현재 어떤 것입니까? 문화나 모든 예술은 변해가기 마련입니다. 21세기의 예술(서예)이 분명 20세기와는 다르겠지만 어떻게 다를 것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현재의 시대성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가 앉은 자리가 어디인가를 인식하고 내가 누군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자기를 표현할 수는 있는 매체로서의 서예가 중요한 것이지, 서예가 필묵으로서 과거의 양식을 재현하는 수단에 그친다면 그것은 이 사회의 예술로서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고전을 통해서 재해석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북위서나 한글의 궁체를 임서하는 이유가 뭡니까? 똑같이 베끼고자 하는 것은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 행위입니다. 그게 목적이 될 수는 없지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 것을 찾고, 자기 것을 만들어 가야 할 것 입니다. 열심히 필사하고, 닮게 쓴 다음에는 거기에서 탈피해야죠. 제 자신도 나를 찾으려고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헤매는 과정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시대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리라고 봅니다.
▶한글에 관심을 기울이시게 된 배경과 효봉 민체의 탄생 과정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가, 적어도 예술 작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데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 입니다. 항상 변화를 추구하게 됩니다. 반복적인 것인 예술가적 취향이 아닙니다. 예술가에서 중요한 것은 창의성, 독창성, 개성입니다. 똑 같은 형식의 반복적인 임서 작업에 지쳐서 새로운 무엇이 없을까? 하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골동품상에 들리게 되었는데, 거기서 민체를 발견하게 된 것 입니다. 순간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민체로 쓰여진 책들은 어렸을 때 우리 주위에 널려 있던 것이었어요. 이런 책들은 어떤 때는 불쏘시개로 사용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담배를 말아서 피우는 데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장실에 가서 볼 일 보고 나오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그 글씨에 대한 진가를 몰랐던 것이죠.
90년도에 독일 교통역사박물관에서 종이생산 600주년 기념으로 한·중·일 서예초대전이 열렸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한글과 한문 작품을 가져갔습니다. 당시 큐레이터가 당신들은 중국작품을 전시하나? 당신네 고유 글씨는 없나?하기에 한글 작품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때 당시 가져간 한글 작품은 궁체보다는 조형을 강조한 한글 작품이었는데, 그곳에서 반응이 존경스럽고, 느낌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좋다는 의미는 두 가지 였을 것입니다. 하나는 한국의 문자를 한국인이 썼다는 것이고, 하나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조형으로 보니 좋았다는 것이겠지요. 그 큐레이터가 한글의 내용을 알았겠어요? 조형을 보고 그랬던 것이죠. 독일 전시에서 느꼈던 것은 한국에 돌아가면 한글을 더 열심히 써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양의 예술과 비교해 보았을 때 한국의 예술은 닫혀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서예로 말하자면 한국 서예는 너무나 쓰는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쓴다는 말은 군대의 필사병이나 과거 조선시대 궁궐의 서사상궁처럼 기계적으로 쓴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궁체 같은 것은 학습과정의 본이지, 그것 차체가 훌륭한 예술작품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한문의 경우 6체니, 7체니 하고 나누어지지만, 한문과 한글 등의 모든 서체는 두 가지로 나뉜다고 봅니다. 즉 관방서체와 민간서체로 말입니다. 관방서체란 관에서 주도하는 서체이고, 민간서체는 주요 민간에서 사용하였던 서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관방서체라 할 수 있는 관체(官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비 같은 것은 관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도 마찬가지구요. 봉평비 같은 신라고비는 민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죽간이나 목간의 경우 관체라고 볼 수도 있고, 민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죽간에 나타난 병기록 같은 경우는 관의 주도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민간 백서의 경우는 관의 주도가 아니었습니다. 형도전문 같은 글씨는 형을 집행한 후 바로 기록해서 사자(死者)를 묻은 것이죠. 그러니 관체가 아니고 민간인이나 형 집행자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급하게 쓰게 된 것이라, 관체가 아닌 민체입니다. 묘지명과 이러한 형도전문의 차이는 마치 한인(漢印)과 장군장(將軍章)의 차이와 같습니다. 관체란 자기를 찾을 수 없는 서체입니다. 나를 표현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죠. 이에 반해 민체란 내가 나를 찾을 수 있는 서체입니다. 민체에는 작가의 개성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민체마다 다양한 표정이 나옵니다. 관체의 대표적인 글씨인 궁체를 보면 좋은 붓을 이용해서 써서 붓끝의 유연한 맛이 살아 납니다. 또한 질서 정연하죠. 반면 민체를 보면 무질서 속에서 질서가 느껴집니다. 민체를 보면 붓끝이 닳아진 몽땅 붓으로 쓴 것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민간에서 쓰다 보니 좋은 붓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관체와 민체는 그 쓰였던 재료부터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나 문자는 그 시대의 얼굴입니다. 그 시대에 통용되고 읽혀지면서 항상 발전하고 바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랑’ 같은 글자를 보면 ‘사’자와 ‘랑’자의 이체자가 엄청나게 많아요. 또 하나의 예를 본다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였습니다’라고 표기하면 무식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현재는 어떻게 씁니까? ‘하였읍니다’에서 ‘하였습니다’로 바꿔 쓰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표기하게된 것은 대통령 등 위정자들이 바꾼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가 바꾼 것이죠.
민체가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대하여는 이론적으로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장법을 보면 궁체는 열을 맞춰서 썼습니다. 마치 궁궐에서 궁녀들이 머리를 들지 못하고 움직였던 것과 같습니다. 반면 민체를 보면 모음의 선이 서로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민중이 제 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입니다. 시골 장터에서 술 한잔하고 걷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죠. 고개 숙이는 게 없이 당당하게 걷는 모습입니다. 궁체는 관체로서 정해진 형식에 의해서 쓰여지다 보니 개성을 발견하기 어려운데 반해 민체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다양한 필법과 장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민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목소리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민체의 연구와 발표에 앞장서온 작가로서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떠신지요? 먼저 용어에 대한 재정립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제가 민간에서 쓰던 한글 서체를 두고 민체라고 명칭을 붙였습니다만 이에 대한 연구는 학회라는지, 전문가들을 통해 좀 더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사실 궁체도 궁중에서 발전된 서체라고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이는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양식의 서체라고 하면, 사용된 장소보다는 글꼴과 형식을 가지고 이야기 해야 되는 것입니다. 획.점.자형 등의 글꼴이 어떠한 형식으로 정형화되었는지 여기에 대한 설명이 학문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획과 획이 어떠한 상태로 각도와 길이를 갖고 있으며, 굵기를 유지하고 있는지, 또는 자형의 중심 축 이동은 어떠한 형식으로 되는지, 이에 대한 궁체와 민체의 상호 비교라든지, 이러한 것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몇년 전에 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한·중·일 3개국이 참여하는 ‘수묵의 향기―조형전’ 에 참가하여 관람객들과의 대화도 하시고, 작품제작 과정을 시연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당시 매체 보도를 통해 서체적 운필의 조형화와 필선의 감흥을 추구하고 있는 작가로 소개된 것을 보았습니다. 3국의 회화를 어떻게 느끼셨나요?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여는 동안 저는 전시 타이틀을 그냥 <여태명전>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여태명 서예전이라고 규정한 적이 없어요. 제 작품을 서예작품이라고 보시기 전에 그냥 예술작품으로 봐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각국의 예술의 특징은 국민성과 지역성, 그리고 풍토성에 따라 예술의 표현이 달리 나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중국의 회화는 화법에서 나왔지만 전통과 결부시킨 수묵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또한 현대적인 감각을 적절히 조화시켜 화면이 진부하지 않았습니다. 서비홍(徐悲鴻) 같은 화가는 일찍이 유럽으로 유학하여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서구문명을 받아 들였습니다. 중국은 사실 일찍부터 현대적인 감각을 익히기 시작했던 것이죠. 일본은 서예로 말하면 묵서와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작품에 도(道)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색채도 화려하고요. 우리나라의 작품을 보면 서예에서 나온 획적인 요소가 강했어요. 이는 정신적인 획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이러한 획은 서양화의 도구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대 미술사를 살펴보면 클레나 미로 같은 화가들은 동양회화에서 서예적인 요소에 주목하였고, 실제로 동양회화의 획을 가져가서 자신들의 작품에 취했습니다. 우리나라 작품을 보면 획적인 요소가 강한데 비해 구성이나 구도가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예로 말하자면 장법에 맞지 않는 작품이 눈에 띄었습니다. 국제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이란 나라를 외국인들이 잘 모릅니다. 특히 우리 문화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 문화를 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내가 누구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서예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상자에게 읽혀서 뜻이 전달되는 쓰는 서예와 그야말로 감상자가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표현하는 서예입니다. 제 자신은 현재 표현하는 서예에 관심을 두고 천착하고 있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는 것이죠.
▶우문이 될 수도 있는데, 작가에게 서예란 무엇인가요? 단순히 쓰는 것이 서예가 아닙니다. 지·필·묵을 이용해서 단순히 쓰는 것이라면 그것은 필사입니다. 필사의 기능이 곧 서예는 아닙니다. 문자를 소재로 해서 어떠한 도구(재료)를 사용해서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서예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시를 쓰는 전달 매체가 서예가 아닙니다. 가령 친구나 조카가 서예란 무엇인가요? 하고 물어 봤을 때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단순히 붓으로 글씨 쓰는 것, 누가 그것을 몰라서 물어 보겠습니까? 작가의 서예철학을 물어보는 것이죠. 설명의 각도를 달리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많이 고민을 해야 자신의 서예관이 생기고, 추구하는 방향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의 고민 끝에 얻어지는 것이고, 같은 해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저는 서예의 수 천, 수 만개의 갈래 중에서 하나를 잡고,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자신을 찾고 있습니다.
▶서예에 처음 입문하시게 된 게 언제였습니까? 작가로서 성장하게 된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습자시간(서예시간)이 있었어요. 당시에 ‘우리나라, 푸른 산, 밝은 물’ 등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서예에 재주가 있다고 선생님들께서 말씀하셨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군에서 주최한 서예대회에 나가서 초등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1등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항상 붓을 잡아왔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서예도 했지만, 수채화나 디자인의 기초인 구성 쪽을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도 미술특기생으로 진학하게 되었지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주에 있던 한국서예학원에서 동양화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소나무 그림을 체본으로 받아 그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운봉 이재수 선생님께서 지도해 주셨는데, 효봉이라는 제 아호도 운봉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것입니다. 고 3때 서예학과로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서예학과가 없었어요. 비슷한 학과를 찾다 보니 동양화를 전공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부모님들이 미술대학 진학을 반대하지는 않으셨나요? 제가 11남매 중 첫째입니다. 당시 아버지께서 항상 너는 장남이니까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고등학교 때는 전주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가끔 하숙집에 오시면 제가 그린 그림과 글씨, 그리고 화구들을 아궁이에 넣고 태워버리셨어요. 당시에는 서예도구나 화구를 살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학교 화실에서 선배들이 귀가한 뒤 남아서 몰래 선배들의 붓을 쓰기도 하고, 선배들의 화선지 뭉치에서 몰래 한 장씩 꺼내 쓰기도 했습니다. 고 3때로 기억되는데, 전주에 고려필방이라고 있어요. 필방에서 서화도구를 구경하다가 얼마나 붓이 갖고 싶었던지, 주인 아주머니 몰래 슬쩍 붓을 가져오고 말았어요. 그 때 제가 느끼기에는 주인 아주머니께서 그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해주신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아도 참 고마운 분입니다. 그 때 그 아주머니께서 그 일로 저를 나무라셨다면 사춘기인 저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그 필방의 단골로 인연을 이어왔지요. 대학은 원광대 미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군대 제대 후 수업료가 없어서 복학을 하지 못했어요. 27살 되던 해에 전주대학교 동양화과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곧바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서울로 올라가서 가방공장에 취직하기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서 한달 만에 그만두고 전주로 내려와서 2년 동안 친구들의 자취 집을 돌면서 살았어요.
▶작가로서의 예술철학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가슴에 새기시는 서론이나 화론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자신이 좋아서 하나 보니까 작가라고 불리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가적인 성향이 저와도 맞는 것 같습니다. 예술의 가치에 높고 낮음이 있습니까? 다만 작가는 스스로 많은 생각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소식(蘇軾)은 ‘글씨를 쓸 때 아름다움에 뜻을 두지 않아야 비로소 아름답게 된다(書出無意于佳乃佳爾)’고 하면서, 용모가 예쁘면 눈살 찌푸리는 것도 용납될 것이요, 아름다운 옥이면 타원형인들 뭐가 거리낄 것이냐(貌硏容有 , 璧美何妨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름다움과 추함의 대립을 버리고, 개성의 표현을 아름다움의 표준으로 대체한다는 말이지요. 이는 조각가인 로댕의 예술에서 개성을 갖추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작가로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정신적인 스승은 남정 최정균 선생님이십니다. 남정 선생님께 직접 체본을 받거나 사사 한 적은 없어요. 75년에 제가 원광대에 처음 입학해서 서도회를 만들었고, 남정 선생님은 당시 문학부 교수셨어요. 선생님은 제가 주도적으로 만든 서도회의 초대 지도교수를 맞아 주셨습니다. 그 때의 인연으로 정신적인 스승으로 모셨던 분입니다. 실질적인 스승들은 제 주위의 모든 분들입니다. 학습적인 스승이 있다면 제 아내입니다. 아내는 전시장에서도 제 작품을 유심히 보면서 자기 방식으로 해석을 해서 제게 조언을 해 줍니다. 저는 작업을 하면 한 주제를 가지고 보통 3가지 형태로 작업을 합니다. 서체, 구성, 크기 등을 다르게 해서 작업을 하는 편입니다. 그 중에는 제가 마음 속으로 정해 놓은 작품도 있지만 항상 아내에게 고르라고 합니다. 아내가 고르는 쪽은 항상 구성이 좋은 작품이에요. 아내가 제 작품을 보면서, 이것이 좋고, 저것이 좋다는 말이 항상 제 자신을 깨우쳐 줍니다. 아내는 큰 스승이자, 가장 가까이 있는 관전자입니다. ▶작품은 주로 언제 제작하십니까? 저는 철저한 저녁형 인간입니다. 작업은 주로 저녁 10시 이후부터 새벽까지 이루어 집니다. 보통 밤을 새운 후 아침에 잠자리에 듭니다.
▶치열했던 청년기를 지나 이제 영향력 있는 중진의 반열에 오르셨는데. 청년기 때는 작가로서 무엇을 갖추고자 노력해야 하는 시기인가요? 좀 느긋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너무 서둘러요. 또한 공모전에 상당히 얽매여 있습니다. 한가지 주제에 천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엄지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이 다른 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둘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이 다른 것은 잘 설명하지 못하죠. 둘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의 다른 점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치밀한 분석이 필수적입니다. 공부를 통해서 철저하게 비교 분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대충하는 것은 서예가 아닙니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빛나는 상상력을 발견합니다. 작가적 상상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철저한 고민을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문자예술에 대한 고민을 해야지요. 사실 서예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서예를 보면 겁부터 낸다는 것이죠. 그리고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부분이 있어요. 다른 미술작품을 보면 아는 척하든지, 알려고 노력을 하는 편인데 말입니다. 예술은 어려운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쉬운 것도 없습니다. 천착해서 치밀하게 비교 분석한 후에 하면 진짜 재미있습니다. 또한 결과도 그렇게 나와요. 이러한 과정 속에 작가적 상상력이 발휘된다고 생각합니다.
▶갑골문을 지각(紙刻)을 통해 표현하기도 하고, 전각작품 제작시 우리 전통 기물을 이용하는 등 작가의 재기 넘치는 아이디어는 끝이 없어 보입니다. 최근엔 캔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신은 전공(회화)과 무관하시 않은 것 같습니다. 재료에서도 다양화를 추구하고 계신데, 끊임없는 변신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서예의 지·필·묵은 한정된 재료입니다. 표현의 한계성도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면, 즉 화선지를 떠나면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달라질 수 있어요. 지각이나 캔버스를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같은 화선지라도 오당지를 사용한다면 번지는 효과를 더 낼 수 있고, 오합지나 삼합지를 쓴다면 두꺼운 장지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제 자신에게서 나오는 표현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어서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옹기에 새기는 것도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도편(陶片) 등을 통해서 이미 보여진 것 입니다. 다만 상감기법 등의 방법을 응용하여 재해석했습니다. 작품에 서예적인 양식을 재해석한다면 현대적인 미감과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서예의 한계를 서예가들이 스스로 좁히는 경향이 있는데, 오히려 서예를 범위를 좀 더 넓혀가야 할 것으로 봅니다.
▶구진중 교수가 작가에 대하여 쓴 평론 가운데 만리장성에 오르면서 관광객들의 남긴 글을 주제로 작품 구상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과정이 흥미로울 것 같은데요. 북경 이화원의 담벽에는 다양한 낙서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다녀갔다는 표시로 해 놓은 낙서들입니다. 전돌 하나에도 오래 전에 한 낙서가 있는 반면 최근에 한 낙서들도 있어요. 이러한 낙서를 통해서 중첩된 세월의 흔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만리장성을 오르면서도 이러한 낙서들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낙서들이 제 눈에는 낙서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보였어요. 다녀갔다는 표시지만 다녀간 사람들의 혼과 마음이 담긴 표식이거든요. 저도 열쇠 같은 것으로 낙서를 해보려고 했지만 왠만한 것으로는 낙서를 하기가 어려웠어요. 낙서하기가 상당히 힘든 상태였습니다. 만리장성의 낙서는 탁본도 하고 사진으로 찍어오기도 했어요(여기서 만리장성에서 촬영한 낙서 사진을 보여 주셨음). 만리장성의 경우 해가 떠 있을 때만 찍을 수 있어서 여러 번에 걸쳐 촬영한 것입니다. 탁본의 경우 처음에는 관리인들이 못하게 막았어요. 그러자 제가 꾀를 내어 여기에 낙서한 사람들을 찾아 내어 혼내 주려고 한다고 하자 관리인들이 허락을 하더군요. 이러한 낙서는 조만간 자료화하여 책으로 출간한 예정입니다.
▶현대 서예를 지향하는 작가들에게 한 말씀해 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고전을 끊임없이 탐구해서, 그 속에서 자기 것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하게 되면 객기로 치부될 수가 있어요. 또한 설익은 작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피카소가 실경(實景)이나 구상작업을 하지 못해서 추상을 한 것이 아니잖아요. 고전에 천착하면서 작업을 병행한다면 소기의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후배들의 작업을 보면 바람직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막힐 때는 고전으로 다시 돌아가서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어요. 이러한 반복적인 과정이 중요합니다.
▶우리 서예계는 초서와 전각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견해가 많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지적하신 대로 한국 서예계에서는 초서가 상대적으로 취약합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승부를 할 수 있는 분야에 전력 투구해야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마라톤을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겠습니까? 전서, 해서, 예서는 일정기간 투자를 하면 얻는 게 있습니다. 열심히 쓰면 되니까요. 그러나 초서는 그냥 쓰는 것이 아닙니다. 작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서체입니다. 한글에도 음률이 있듯이, 한자에도 고유의 음률이 있습니다. 한글 세대인 한국의 현대 작가들이 취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초서를 가지고는 중국사람과 대적이 안됩니다. 따라서 초서를 써서 승부를 하려면 거기에 맞는 체격조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각도 굉장히 뒤쳐져 있는 분야입니다. 동아미술제나 전연대상전, 전각학회 등에서 전각의 발전을 꾀하고 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여요. 전각은 곧 믿음입니다. 내 작품이라는 믿음, 완성이라는 의미가 있어요. 따라서 가볍게 여길 분야가 아닙니다. 전각은 <모나리자> 그림에서 모나리자의 눈동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완성된 작품에서 핵심적으로 시선이 갈 수 있는 곳이 인장이에요. 특히 한글 서예는 변하고 있는데, 한글 인장은 그대로 머물러 있어요. 신발을 발에 맞게 고쳐 신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작가들의 안목이 아직 부족하다는 것이죠. 저는 작품을 제작할 때 마다 그 작품의 분위기에 맞게 각을 해서 작품에 찍고 있습니다. 일작일각(一作一刻)인 셈이죠.
▶신인 작가 발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엔날레 등의 중요 행사에 젊은 작가들을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시의 장을 넓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테마가 있는 전시를 통해 신인 작가들이 등단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작품을 하지 않는 시간이나 여유시간은 어떻게 보내십니까? 화가나 음악가 등 예술하는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칩니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바둑도 즐겨 둡니다.
▶민체의 근간이 되었던, 800여 권이나 되는 필사본은 어떻게 수집하셨습니까? 민체의 필사본을 골동품상에서 처음 본 순간 아! 이거구나. 이게 작품이구나하는 생각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필사본은 20여 년간 수집했습니다. 이제는 많은 사람과 공유할 생각입니다. 다른 작가들이 제가 수집한 책을 본다면 해석을 달리 해서 다른 표현 방법을 내 놓을 수가 있습니다. 저도 제가 모은 자료가 사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골동품상에 가도 필사본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전주나 서울 등의 고서점에서 필사본이 나오면 이따금씩 전화가 오는데, 제가 자료를 수집한다는 것을 아니까 값을 꽤 높게 부릅니다. 그래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을 모아서 자료화 하겠나 하는 심정으로 사 모아요. 제가 전주에서 태어난 것은 행운입니다. 한글 판본 중에 완판본이 많이 남아 있고, 비교적 필사본의 자료도 풍부했습니다. 한마디로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었죠. 중국에 가게 된 동기도 사실은 우리의 조상의 얼이 담긴 필사본을 그 쪽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였습니다. 필사본을 보면 호남의 글씨와 영남의 글씨가 차이가 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역별로 글씨가 다른데, 중국에 남아 있는 우리 글씨도 그 곳의 지역적 특성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중국 북쪽의 경우 고구려의 기상과 같은 글씨를 예상했었죠. 그곳 동포사회에 남아 있는 필사본 수집을 위해서 떠난 것이죠. 그곳에 가서 물어보니,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필사본을 어려서는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때 전부 소각해 버리고, 이제는 시골의 한약방이나, 비문 써주는 곳, 종이 만드는 공장 등에 일부만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필사본과는 달랐다는 것이죠. 힘과 기상이 느껴지는 필체였어요. 아쉬운 것은 그곳에 필사본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죠.
▶한국 서단의 젊은 작가들과 최근 한국 서단의 흐름을 어떻게 보게 계십니까? 자료면에서 보면 제가 서예를 시작하던 때에는 안진경, 구양순, 집자성교서 등 한정적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엄청난 자료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자료를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 될 것 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해석 하느냐 입니다 . 작가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응용력과 해석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젊은 작가들의 수준이 제가 젊었을 때 작가들의 수준보다 훨씬 높아요. 재주들도 더 있고요. 움츠러들지 말고, 이러한 재주를 발산하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술에 완성이 어디 있습니까? 완성시키기 위한 과정만이 존재합니다. 설령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경험한 만큼 이득입니다. 젊은 작가들 중에는 곧바로 정상에 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정상을 가는 과정에 샘물을 마실 수도 있고, 잠시 쉬었다 갈 수도 있고, 다양한 길로 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훗날 후배들에게 자신의 역정에 대하여 다양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민족서예인연합을 이끌고 계신데, 어떤 단체이며 어떤 취지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서예의 정체성을 탈피하고자 서예학과 출신의 젊은 작가들 위주로 구성되었습니다. 대외적인 교류나 학술세미나 등을 통해 우리 서예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리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공모전의 형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방향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에 서예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작가보다는 새로운 젊은 의식을 수용하고자 했습니다.
▶예술가의 교우관계는 또 다른 흥미거리 입니다. 창작활동에 도움을 주는 후원자가 있습니까? 화가, 음악가, 시인들과의 만남은 즐거운 시간입니다. 탤런트인 김수미씨, 한승헌 변호사, 이해찬 의원 등이 제 창작활동에 도움을 주고 계신 분들입니다. 시인 김용택, 안도현님, 소설가인 이병천님 등이 많은 이야기를 제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장 큰 후원자는 집사람입니다.
▶한 때 중국 심양의 노신미술대학에 교환교수로 가 계셨는데요, 그 곳에서 느끼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봐야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주로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운남성 여행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양한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사는 모습들이 각기 틀렸어요. 그러나 서로 잘 어울리면서 살고 있었어요. 그들이 쓰는 똥바문자라는 것이 있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원시적으로 남아 사용되는 상형문자입니다. 상당히 충격적이며, 신선했습니다. 교환교수로 가 있으면서, 제작한 작품을 가지고 북경에 있는 중국미술관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곳인데, 외국인은 물론 중국의 작가에게도 잘 대관하지 않는 곳입니다. 2000년 1월에 밀레니엄의 첫 전시를 갖게 되서 개인적으로는 영광이었습니다. 이 전시에 소개된 작품 가운데는 똥바문자를 응용한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중국미술관에서는 전시된 작품 중 두 점을 매입해서 소장했습니다. 노신미술관에서도 한국적인 정취가 묻어나는 제 작품을 구입해서 소장하였습니다.
▶『한글서예판본(용비어천가편)』, 『한글서예판본(송강가사편)』, 『여태명쓴 한글서예』, 『조웅전영인본』, 『한글서예판본(조웅전편)』 등 여러 권의 한글 저서를 내셨습니다. 자료는 발간하시게 된 계기와 그 의미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목적은 자료를 공유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인본과 영인본에 대한 자전형식으로 자료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영인본 자전을 나중에 통합하면, 볼만한 한글자전이 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개인적으로 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나 사명감을 가지고 일년에 한 권씩 낼 예정입니다.
▶지금도 계속 발표하고 계신 천·지·인 연작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화면에 천·지·인의 기본형을 나열해가고 있는데 이는 작가의 내면적 기(氣) 분출을 서예의 핵심적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말한 것 같이 독일에서의 전시 이후 한글에 천착하게 되었고, 한글을 테마로 해서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화장실에 갔는데, 마침 표어를 붙였다가 뗀 자국이 있었어요. 아래와 위, 그리고 가운데에 풀칠을 했다고 뗀 자국이었는데, 제 눈에는 그것이 마치 천·지·인 같이 보였습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서 천·지·인 시리즈를 하게 된 것입니다. 천은 ‘ . ’, 인은 ‘│’, 지는 ‘━’로 삼재(三才)에 근거를 두고 있는 상형문자의 기본형을 제시한 것입니다. 삼재(三才)가 한글의 창제 원리인 우주의 삼라만상과도 닿아 있어요.
▶작년 연말에 개봉된 한국영화 <황산벌>에 보면 신라의 스파이가 계백장군의 ‘거시기’를 해독하지 못해 쩔쩔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거시기’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사전적으로는 무엇인가 딱 꼬집어서 설명할 수 없을 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술이란 딱 꼬집어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딱히 설명은 할 수 없지만 표현되는 것이 예술입니다. 뭐라고 규정할 수 없지만, 갈팡질팡한 가운데 표현이 자유스러운 상태를 나타낸 것이고, 작품의 제목도 그렇게 붙여 봤습니다.
▶한글 작품을 보면 작품의 소재와 민체가 썩 잘 어울리고, 작품의 소재들 또한 흥미롭습니다. 소재는 어떻게 선택하십니까? 대체로 서예작품의 글감을 보면 두보(杜甫)나 도연명(陶淵明) 등 당시(唐詩)에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작가라면 적어도 우리 글에서 소재를 가져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시도 많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의 고전 가운데 고려가사에서 많이 찾고 있습니다. 가사의 선율, 율동이 살아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서예는 음악, 즉 리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시인이 표현하는 음률이 있고, 서예가가 표현하는 음률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서예가는 편곡자인 셈이죠.
▶작가로서 좌절의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개인전을 열게 되면 성공적으로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요. 그러나 고생했다, 수고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 성공적인 전시가 아니잖아요. 관람객이 제 작품 앞에 오래 머물러서 작품과 대화를 해야 성공한 전시라고 봅니다. 작품과의 대화를 통해서 관람객은 작가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고, 다른 견해를 가질 수도 있어요. 저는 전시를 통해 질타나 바람직한 조언을 듣고자 합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보완해서 다음 전시를 준비하게 되는 것이죠. 작품을 하다가 막히면, 집사람과 데이트를 합니다. 집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다 보면 돌파구가 열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반복적인 표현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작가로서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봅니다. 한국화를 하게 된 것이 조형과 구성면에서 장점이 됩니다. 그 동안 한문·한글 서예와 전각, 문인화 등을 해 왔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야가 아직은 없습니다. 내 작업을 찾아가는 단계입니다. 작가란 죽을 때까지 다양하게 시도 해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황 여행 시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들 또한 훌륭한 작품입니다. 마치 화가 이중섭이 가족들에게 보낸 엽서처럼 훌륭한 예술성과 가족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묻어 납니다. 중앙미술학원에는 벽화과가 있습니다. 왕용 교수의 추천으로 돈황으로 벽화과 연구생들과 답사를 갈 기회가 생겼어요. 일반인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돈황의 특굴에서 벽화과 학생들은 모사 작업을 했습니다. 특굴은 원형그대로 잘 보존이 된 상태였고, 벽화과 학생들은 일주일 동안 하루에 벽화 두 개를 대상으로 정밀묘사 작업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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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