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文房四寶物語(번역 중)
文人趣味와 筆墨硯紙
榊莫山(日)
먹의 不可思議한 魅力과 덧없는 宿命
늘 먹을 갈아왔다. 글쓰기의 발판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이제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계속 갈 것이다. 이는 계속해서 갈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 내가 언제부터인지 無常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형태가 있는 먹은 갈리고 갈려서 머잖아 없어져 버린다. 화선지에 물로부터 온 생명을 불어넣고, 자신의 모습을 없애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먹에 무상을 느끼는 것은, 그런 먹에 인생의 덧없음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먹은 언젠가는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을 안고 이 세상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古往今來의 墨匠(묵장)들은 만들어 내는 먹에 다양한 모양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꾸미는 것에 따라서 짊어지는 숙명이 애석하게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기껏해야 손바닥 위에 놓을 정도의 검은 얼굴을 한 墨魂으로 蟠龍의 위협적인 무서움을 간직하기도 하고, 樓閣의 淸韻을 머물게 하기도 하고, 山川草木 森羅萬象을 먹의 모습으로 조각하여 만들려고 했던 때문이다. 항상 먹을 갈면서 그것을 화선지에 남겨 놓으면서 나는 이럭저럭 40년 먹을 상대로 살아왔으나 아직도 먹을 모른다. 먹의 성품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좀더 과장되게 말하면 신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먹의 신비한 불가사의를 부풀리면서 화선지에 남긴 먹색을 따라 돌리고 있는 중에 먹의 매력에 잠기기 시작한다. 매혹에 어느만큼 지쳤다 해도 좋은 먹, 古墨은 간단히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있었다고 해도 만금을 털어서 손에 넣을 정도로 나의 마음은 여유롭지 못했다. 그래도 무리해도 손에 넣고 싶었던 먹이 있었다. 숙명이지요. 스스로 비웃으면서 나는 계속 먹에 집착하고 있다. 지난 해 각천서점에서 문방사보 4책,(먹의 이야기, 붓 이야기, 벼루 이야기, 종이 이야기)의 집필을 의뢰받았을 때, 바로 그 --- 숙명적인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붓도 좋고, 벼루도 좋고, 먹도 좋고, 종이도 좋다. 나는 천하의 수집가도 아니지만 그것들을 멀리보고 눈을 가늘게 뜨고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매일 문방사보의 은혜를 받아서 여러 가지 곰곰이 생각하고 글이나 수묵에 빠져 있을 뿐이라고 말씀드린다면 ‘그것을 써’라고 말할 것이다. 아트리에의 작업장에서 종일 함께 지내고 있는 상대(문방사보)의 일이라면, 언제든지 달려들었다.
그러나, 정작 처음 써보면 먹도 붓도 종이도 벼루도 상상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이 날마다 알게 되었다. 불가사의하다 신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에는 아직 괜찮은 것이었지만 정작 그 불가사의와 신비의 베일을 벗기려고 하면 이내 문방사우는 難題難問을 던져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들어진 먹은 언제 죽을지 무슨 일도 결코 명료하지 않다. 만들어 진다고 간단하게 말해도 예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일본에서 지금 油煙墨에 쓰는 그을음을 채집하기 위한 유채꽃 기름은 나라현 내에 유채꽃 기름 일년간의 소비량보다도 많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나라먹으로 좋은 기름을 갖고 싶다 해서 짐수레를 끌고 阿蘇의 山麓까지 기름 야일을 사러간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은 ‘유채꽃밭의 석양은 희미해지고 몰라보는 산이......’라고 읊어지는 풍경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송연묵의 그을음을 채집하고자 하면 紀州의 깊은 산속에서 松林을 사고 15~20년 주기로 그을음을 태우는 연기를 계속 낸 우두머리와, 태우는 아이의 모습도 역시 소화 35~36경을 최후로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시대는 확실히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은 간단하게 ‘먹의 예술’이라든가 ‘동양의 전통’이라든가 하는 구절로 취하고 싶지만 지금 글이나 수묵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裏方상(귀인의 아내, 문방사보) 들은 그런 말에 취해서 수그러져 버렸다는 것이다.
文人趣味의 내력과 중국 문방사보의 現狀
중국에서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먹의 아성, 붓의 아성, 벼루도 종이도, 중국은 원료에서 혜택받았다. 게다가 영광에 빛나고 긴 전통이 묵직하게 계속 거듭되어 왔다. 그러나 저 문화대혁명이라고 하는 치열하기 짝이 없는 투쟁의 세월은 중후한 전통을 어디에도 없게 쫓아버렸기 때문이다. 붓과 먹, 종이와 벼루의 제조도 혁명의 폭풍 속에서 은거했다. 명왕조 때부터 내려온 오래된 가게, 그을린 은과 같은 영광을 지켜온 다수의 오래된 가게, 폭풍과 같은 모습으로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화대혁명은 여진이 아직 계속해서 응어리가 남아 있을 즈음, 나는 중국을 방문했다. 북경의 유리창은 문방사우의 메카였다. 오래된 벼루, 오래된 탁본, 인재나 붓이나 먹 등을 늘어놓은 가게가 처마를 잇대고 있었던 것이나, 고풍스러운 간판은 모조리 추방되어 있었다. 겨우 榮寶齋라고 하는 가게만이 왠일인지 추방을 모면하고 멍한 표정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탁본이나 古印材가 많은 慶雲堂은 ‘北京市文物商店, 碑帖硯墨門市部’라고 하는 페인트 간판을 쓸쓸하게 매달고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표정으로 줄어들었다. 창에 커튼을 치 채로 다소곳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거의 가게에 다가가지 낳는 듯했다. 오래된 사상도 습관도 그 위에는 전통으로 본 풍속도 같이 모조리 쓸어서 문화의 대혁명을 실현하려고 하는 문화대혁명으로 문방사보 따위는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1965년 문화인의 비판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紅衛兵이 선두에 서서 격렬한 형세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인의 비판과 추방은 문인이나 예술가 생활의 변혁을 가져왔다. 문방사보에 둘러 싸여서 시문이나 서화에 빠져있는 따위는 괘씸했다. 모든 사람은 생산에 직면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럭저럭 이집에 있었던 오래된 벼루나 서화 골동류는 징발되어져 북경이나 상해 등의 대도시의 창고에 들여놓게 된 것 같다. 때마침 이차세계대전 경 일본의 가정에서 동이나 철로 만든 調度品의 거의가 징발되어졌던 것일 것이다.
중국에 있어서의 문방사보는 근세에 거듭되는 외국세력의 침략이나 內紛에 의해서 상당한 衰運을 따르는 때에 이 문화대혁명의 폭풍이 지나갔다고 할 만하다.
문방사보나 서화 골동만은 아니고, 많은 문화재도 그 폭풍의 여파를 받고, 지금은 옛날의 --- 라고 하는 것으로 된 모양이다.
나는 이 원고를 쓰기에 앞서 ‘중국의 문방사보에 관해서’ ‘그 매력’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 편집자에게 말하겠다. 매력에 홀려 있던 나이지만 현상의 인식을 근거로 삼지 않는다면, 어느 것뿐, 벼루가 어떤지 먹이 어떤지 해볼 경우에 과거의 추억으로 끝나버린다고 라고 생가하기 때문에 장황하게 나의 설명을 우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