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谷雜詠(운곡잡영)중 謝客-朱憙(주희)
野人載酒來 農談日西夕
야인재주래 농담일서석
此意良已勤 感歎情何極
차의량이근 감탄정하극
歸去莫頻來 林深山路黑
귀거막빈내 임심산로흑
농부가 술을 가져와
농사 이야기에 해는 서산에 기운다.
이러한 마음 정말 고마워
놀라워라 그 정이 어찌 그리 지극한지
돌아가시걸랑 자주 오시지는 마시게
숲이 깊어 산길이 어둡다오.
雲谷(운곡)은 福建城(복건성) 建陽縣(건양현)의 서북쪽에 있는 곳으로 그 곳에는 노봉이 있었는데 주희(朱憙)가 그 곳에 이름을 雲谷이라 고치고 草堂을 짓고 글을 읽었다. 雲谷雜詩(운곡이 여러 가지를 읊음 )는 12가 있는데 이 시는 그 중 謝客(사객 客의 訪問을 사절함)이라는 題目의 시다.
그는 福建省(복건성) 尤溪(우계) 출신으로, 죽 고향에서 책을 읽고 訓育하며 일생을 보냈다. 들어앉아서 공부만 하니 사람들 찾아오는 것을 싫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詩와 관련지어 나온 말 같다. 그러나 농사짓는 이웃이 모처럼 술 한 병 들고 찾아 와서, 비가 오느니 안 오느니 날씨가 더우니 안 더우니 등 주로 농사 관계 이야기꽃을 피운다. 별로 의미를 부여할 만남도, 주고받을 것도 없는 가벼운 만남이다. 그런 손님을 보내면서 “숲이 깊어 산길이 어두우니 자주 오지는 마라”고 했다. 그저 덤덤하게 가벼운 고마움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 곳은 지금 사람들의 관심이 없어서 개발도 안 된 시골, 그 옛날의 흔적을 겨우 찾을 수 있다고 한다.
陶淵明(도연명)의 飮酒 제9수에서 농부가 술병을 들고 찾아온 것은 고맙지만 幽居(유거)에의 의지는 바꿀 수 없다고 노래한 것과 비슷하다. 이 시에 謝客이라 題目을 붙인 것이 幽居(유거)를 원하는 마음에서 였다. 朱熹도 농부와의 대화를 피했지만 결코 그들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고로 여기 陶淵明(도연명) 飮酒 9를 소개해본다.
陶淵明(도연명) 飮酒(음주) 9
淸晨聞叩門 倒裳往自開
청신문고문 도상왕자개
問子爲誰歟 田父有好懷
문자위수여 전부유호회
壺漿遠見侯 疑我與時乖
호장원견후 의아여시괴
襤縷茅詹下 未足爲高栖
남루모첨하 미족위고서
一世皆相同 願君汨其泥
일세개상동 원군골기니
深感父老言 稟氣寡所諧
심감부로언 품기과소해
紆비誠可學 違己거非迷
우비성가학 위기거비미
且共歡此飮 吾駕不可回
차공환차음 오가불가회
아침일직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서둘러 옷 입고 대문을 여니
누군지 묻는 내 앞에
착하게 생긴 농부가 서 있다
멀리서 술 들고 인사 왔다며
세상과 떨어져 산다. 나를 나무란다.
누차하게 초가집에 산다하여
고상하고 청허한 삶이라 할 수 없다 한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듯이
그대 또한 뒤섞여 함께 더불어 살라 하네.
농부의 말에 마음 깊이 느끼는 바 있지만
본시 타고난 성품이 남들과 어울리길 싫어하니
험한 일이야 배울 수 있겠지만
타고난 성격을 바꾸는 것도 바르지 못하리.
속뜻을 알았으니 가져온 술이나 마십시다.
본래 타고난 나의 본성은 돌릴 수 없으리라.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우성(偶成)이란 글은 세월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겨지 말라는 것이다.
우성(偶成)-朱憙(주희)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미각지당춘초몽 계전오엽이추성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연못의 봄풀이 꿈을 아직 깨닫지도 않았는데.
섬돌 앞 오동나무 잎은 이미 가을 소리로고.
朱文公勸學文(주문공권학문)-朱憙(주희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물위금일불학이유내일 물위금년불학이유내년
日月逝矣不我延 嗚呼老矣是誰之愆
일월서의불아연 오호노의시수지건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 있다 하지 말고
금년에 배우지 않고 내년 있다 하지 마
세월 흘러가는구나, 시간은 나를 연장해주지 아니하나니
아 ! 늙었구나,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주희(朱憙, 1130~1200) 중국 송대(宋代)의 유학자.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둔옹(遯翁).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깃?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 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朱子學을 구축하였으며 주자(朱子)는 그의 존칭이다. 시호는 문공(文公).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주희(朱憙)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 등 많은 책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