愼獨齋先生遺稿卷之二
次龜峯詩
운암(雲菴)의 눈 오는 밤/ 次雲菴雪夜
누가 저리 하얀 옥을 성대에다 뿌렸다더냐 / 誰敎白玉疊城臺
바람은 장공으로 갠 달을 끌고 왔네 / 風掣長空霽月廻
한밤중 솔바람에 학의 꿈이 깨었든지 / 半夜松濤驚鶴夢
구고에서 맑은 소리가 베개맡에 들려오네 / 九皐淸響枕邊來
김집 [金集, 신독재, 1574 ~ 1656]
본관 광산. 자 사강(士剛). 호 신독재(愼獨齋). 시호 문경(文敬). 장생(長生)의 아들. 서울 출생. 영특하고 학예에 뛰어나 l8세 때 진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은퇴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뒤 등용되어 부여현감이 되고, 이어 임피현령·지평(持平)·집의(執義)·공조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중기에 공서파(功西派)가 집권하자 퇴직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여 공서 김자점(金自點) 등이 파직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등용되었다. 예조참판·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하였다. 그때 실각한 김자점이 이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자, 청나라의 문책으로 사태가 시끄럽게 되므로 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뒤 대사헌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중추부판사로 재임 중 사망하였다. 만년에 예학(禮學)을 대성하여 그와 접하는 자는 예에 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아버지와 더불어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1883년(고종 20)에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文廟)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향사되었다. 문집에 《신독재유고》, 편서에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