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贈李白(증이백)> 이백에게 제二수 - 두보(杜甫) 시
秋來相顧尙飄蓬 (추래상고상표봉)
가을이 왔는데 돌아봐야 아직도 마른 쑥처럼 떠도는 신세,
未就丹砂愧葛洪 (미취단사괴갈홍)
단사를 얻지 못해 갈홍 보기가 부끄럽구나.
痛飮狂歌空度日(통음광가공도일)
술 실컷 마시고 미친 듯 노래하며 헛되이 나날을 보냈나니,
飛揚跋扈爲誰雄(비양발호위수웅)
뽐내며 거드럭거리고 발호했던 것은 누굴 위해 잘난 체한 일이었던가.
* 葛洪(갈홍, 284~363) : 별명은 포박자(抱朴子), 불로불사의 술법을 집대성한 사상가.
東晉(동진)시대의 이름 난 의약학자이자 도가이다. 갈홍은 『포박자』와 『신선전』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갈홍은 원래 산동성 동부의 호족(豪族) 집안 출신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오(吳)나라의 관리였다. 그러나 오나라가 갈홍이 태어나기 2년 전에 망하자 그의 일족은 강소성으로 이주했다. 갈홍이 연금술에 몰두하게 된 이유에 대해 후세의 연구자들은, 그가 나라를 잃은 유민(流民)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갈홍은 어릴 때부터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가난하게 살았지만, 땔감을 팔아서 종이를 사고, 책이 있는 곳이면 멀리까지 달려가서 베껴 왔다. 그는 유학은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이 담긴 책을 구해 보는 등 당시의 주된 사상을 두루 공부했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데다 만족스럽지도 못하자 새롭게 시작한 것이 바로 연금술에 대한 연구였다.
사실 갈홍에게는 그러한 것을 선호하는 집안 내력이 있었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종형제였던 갈현(葛玄)은 위(魏)의 조조(曹操) 앞에서 대마술을 펼쳐보였던 좌자의 제자로, 그 역시 여러 가지 술법을 구사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무더운 한여름 날이나 술을 과하게 마셨을 때는 강 밑바닥으로 내려가 숨어 있으면서 하루를 시원하게 보냈다고 한다. 좌자는 갈현에게 『구정단경(九鼎丹經)』2) 『태청단경(太淸丹經)』 『금액경(金液經)』 등을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다시 정은(鄭隱)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 정은이 바로 갈홍의 스승이었다. 정은은 갈홍에게 자신의 모든 지식을 가르쳐준 후 산 속으로 들어갔다. 갈홍이 정은의 가르침대로 수행한 결과는 『포박자』 「내편(內篇)」에 상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 다음으로 갈홍은 포현(鮑玄)이라는 학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당시는 한창 전란이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는데, 하필 그가 살고 있던 지방이 유민 반란군의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방위군으로 참전해 전공을 세운 후에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낙양으로 가서 연금술을 연구하기 위한 책들을 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내전 상태가 지속되어 뜻한 바를 이룰 수 없게 되자 각지를 유랑한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갈홍이 돌아와 보니 동진(東晉, 317~420) 왕조가 성립되어 있었다. 왕조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내려 군대에서 복무토록 했다. 그래서 군의 참모가 된 갈홍은 이후 순조롭게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원래 자신이 계획했던 수행의 길을 버릴 수는 없었다. 마침내 연금술의 재료인 단사(丹砂 : 유화수은)가 현재의 베트남에서 산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갈홍은 그 지방의 현지사를 자청했다. 다시 여행길에 나선 갈홍은 베트남을 향해 가던 도중 잠시 광주(廣州) 지방에 들르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의 장관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머물러 달라는 제안을 했다. 갈홍은 하는 수 없이 그곳에 있는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연금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 속에 있던 갈홍이 광주의 장관 앞으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먼 곳에 있는 스승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장관이 급히 산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갈홍은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 후 갈홍은 시해선(尸解仙)이 되었다는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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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신선이 될 수 있다는 갈홍의 사상 : ‘포박자’라는 이름은, 자신의 소박한 성격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 그 이름을 밝히는 것이라고 갈홍은 『포박자』의 '자서(自序)'에 기록해놓았다. 이 책은 신선 사상을 집대성하여, 도교의 학문적인 부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책은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나뉘어 있는데, 갈홍 자신이 내편은 '도교', 외편은 '유가'에 속하는 것이라고 구분해놓았다. 이 중에서 흥미가 있는 것은 물론 내편이다. 주된 내용은 정신의 양생법(무위자연(無爲自然)을 실천한다), 육체의 양생법(생명 활동을 활발하게 한다), 생리적 양생법(곡물의 섭취를 피하고 장 속을 청결하게 한다), 그리고 금단(金丹) 제조법이다. 여기서 말하는 금단 제조법은 환단(還丹)과 금액(金液) 제조법이다. 환단이란 단사(丹砂)에 열을 가해서 건류(乾溜 : 밀폐된 용기 속에 넣은 고체에 열을 가해서 휘발성 화합물을 빼내는 것-옮긴이)하면 수은이 되고, 거기에 유황을 더해 다시 단사로 만든 것이다. 금액은 금에 고열을 가해 액화 상태로 만든 다음 냉각시키면 다시 고체가 되어 아름다운 광택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환단과 금액의 특성을 가진 물질을 인체에 작용시킴으로써 육체의 노화를 막아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갈홍은 "장생은 제사를 잘 지내고, 귀신을 잘 모신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그 자신은 조상의 영을 위해 제사 지내는 것 외에 다른 제사에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신선이 되려는 생각을 가졌던 실천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다.
갈홍은 일관되게 신선이라는 존재가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저작들인 사마천의 『사기』나 유향(劉向)이 편집한 『열선전(列仙傳)』에도 신선이 실재했다는 증거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인간보다 하등한 식물이나 동물들도 모습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며, 거북이와 학이 수천만 년의 수명을 가진 것만 보더라도 그들보다 고등한 인간이 지혜를 발휘하면 신선이 되지 못할 것도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갈홍의 사고는 고대 중국의 과학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포박자』는 당시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과학 지식을 집대성한 것이기도 했다.
갈홍의 저작은 지금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아마 도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지식인들도 그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저서가 다른 도교 관련 저작물들과는 달리 상당히 논리정연하며, 종교적인 냄새도 그다지 풍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이면, 갈홍을 모시는 사당은 항주(杭州) 갈령(葛嶺)에 있는 포박도원(抱朴道院)과 광주 나부산에 있는 형허고관(衡虛古觀)이 유명하다.
* 跋扈(발호) : 큰 고기가 통발[扈]에서 빠져나와 도망침. 제멋대로 날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