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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교실

석봉 고봉주 선생의 전각 예술(평전)

석봉(石峯) 고봉주(高鳳柱) 선생의 전각(篆刻) 예술

- 암울한 시대에 칼끝으로 새겨낸 방촌(方寸) 위의 돌꽃 -


권상호(문학박사, 문예평론가)

 

현대 전각을 개척한 일본 유학파 고봉주(高鳳柱, 1906~1993) 선생은 1906년 3월 23일 충남 예산(禮山)에서, 고영서(高永瑞) 씨의 오남일녀(五男一女)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字)는 자위(子緯), 호(號)는 석봉(石峯)이다. 이 외에 별호(別號)로 석봉(石棒), 팔도산인(八道山人), 호도인(壺道人), 보운선사(普雲仙史), 천선도암주(天仙道庵主), 탄심재(彈心齋), 석봉(石唪), 추부재(秋缶齋), 완부재(阮缶齋), 방부노인(仿缶老人), 석봉노부(石峯老夫), 노봉(老峯), 석로(石老), 남은옹(南隱翁), 설염옹(雪髯翁) 등이 있다. 

석봉(石峯)은 장대한 기골에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아픔을 깨닫고 독립운동을 위해 일본에 건너가 활동한다. 하지만 오히려 일본에서 큰 스승을 만나 서예와 전각을 공부하고, 나아가 당대 대표적인 전각가가 되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작가생활을 해 왔다. 서예도 훌륭하지만 특히 전각으로 그 명성이 국내보다 일본에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석봉은 7세(1912)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10세(1915)에는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15세(1920)에는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하여 예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과 성적이 뛰어나 월반을 거듭한 나머지 3년 만에 졸업하였다. 이때 벌써 필재(筆才)가 남달라 습자시간에는 담임선생을 대신할 정도였다고 한다. 

교육자로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범학교 진학을 희망하였으나, 재학 중 일본 교장 축출 운동을 벌이는 등으로 인하여 관으로부터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 꿈을 접고, 새로운 꿈을 찾아 19세(1924)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20세(1925)에 어렵사리 도쿄(東京)에 도착하여 길거리 행상(行商)을 하는 등 고난(苦難)의 생활을 겪는다. 그런 가운데 니혼대학(日本大学) 사회학부(社会学部)에 입학했으나, 학비가 없어 다니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고학(苦學)의 길을 택한다. 그런 가운데 조선인노동총동맹(朝鮮人勞動總同盟)을 결성하여 비밀리에 노동쟁의를 하고, 일본 전 지역을 순회하며 밀서연락책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비밀활동이 발각되어 금고형(禁錮刑)을 선고 받고, 1년간 복역하게 된다. 출옥 후에도 해방 때까지 요시찰 인물로 지목받는다.


27세(1932) 일본 각지를 방랑하다가 시마네현(島根県, しまねけん)에 머물 때, 미하라 지로(三原次郞, みはら じろう)의 소개로 히다이 텐라이(比田井天来, ひだい てんらい, 1872∼1939) 선생을 방문, 그의 문하에 들어가 6년간 공부한다. 그는 석봉보다 34세 연상으로 일본 현대서도의 아버지로 불리며, 당대 일본 최고의 한학자이자 서예가였다. 본명은 홍(鴻), 아호는 텐라이(天来)이다. 그리하여 성 대신에 주로 텐라이로 호칭된다. 석봉의 전각을 본 텐라이는 “환력(還曆, 환갑) 이후의 작품에는 고석봉이 새긴 도장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이때가 바로 텐라이의 환갑년이었다. 사제 간의 극적 만남이 석봉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텐라이 선생이 목간(木簡)과 예서(隸書)에 심취해 있을 때, 석봉은 진전(秦篆)과 한인(漢印)에 빠져있었다. 

2019년 2월에는 도쿄 긴자(銀座)의 화랑미술관(画廊美術館)에서 ‘히다이 텐라이 영면 80주년 기념 텐라이 회서전(比田井天来 没後 80年記念・天来の会書展)’이 개최되고, 여기에 399점의 작품이 전시될 정도로 일본 예술계에서의 텐라이의 명성은 아직도 대단하다.

석봉은 3년 동안 텐라이 서학원(書学院)에 거처하면서 고전임서, 금석학, 전각 공부에 매진한다. 한편 이때 함께 동문수학하던 여러 도반(道伴)들과의 친교는 평생 이어진다. 1960년대 이후 이 도반들의 초대로 석봉은 일본을 더 자주 방문하게 되고, 전시를 통하여 명성도 쌓고 많은 작품도 남기에 된다. 

이해 11월에 텐라이 선생을 따라 귀국하여 김돈희, 오세창, 이한복, 이용문, 김용진, 박영철, 고희동 등과 교우관계를 맺는다. 이후 1934, 1935년에도 같은 모양으로 귀국하게 된다. 

특히, 텐라이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일본서도원의 심사위원, 도쿄서학원의 교수 겸 이사를 역임하는 영광을 얻게 되고, 시고쿠(四國), 오사카(大阪), 고베(神戶), 히로시마(廣島) 등지의 강습회 강사로 활동하기도 한다. 석봉은 독립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지만 그때 그를 격려하고 풀어준 사람이 텐라이 선생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석봉은 나중에 텐라이 스승의 임종 제자가 된다.


28세(1933년) 서도예술사(書道藝術社) 동인(同人)이 된다.

31세(1936년) 추종녀(秋終女)와 결혼, 9년간 일본 생활을 하게 된다. 석봉은 텐라이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당대 일본 최고의 전각가 가와이 센로(河井筌廬, かわい せんろ, 1871∼1945) 선생에게는 전각을 공부한다. 하지만 금전상의 문제로 가와이 센로 선생 밑에 들어가 깊이 있게 배우지는 못하고 새긴 전각 작품을 보여드리며 첨삭 지도를 받을 뿐이었다. 주로 책에 의존하여 독학하는 편이었으나 선생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오창석(吳昌碩, 1844~1927)이 사용하던 전각도를 선물로 받는다.

석봉은 가와이 센로 전각에서 오창석의 인풍을 깨닫고, 나아가 조지겸(趙之謙, 1829~1884), 제백석(齊白石, 1864∼1957) 등의 여러 전작가들의 작품 세계도 접하면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심화시켜 나간다. 가와이 센로는 중국에 건너가 오창석으로부터 전각과 금석학을 직접 사사받은 작가이다. 그러므로 석봉은 오창석의 손자 제자뻘이다. 결과적으로 석봉은 히다이 텐라이로부터는 서예를 배우고, 가와이 센로로부터는 전각을 전수(傳受)한 셈이다. 


33세(1938) 작가로서는 어린 나이에 일본 황기(皇紀) 2600년을 기념하는 보인(寶印) ‘강원신궁(橿原神宮, かしはらじんぐう)’을 주백(朱白) 이과(二顆)로 제작하는 전무후무한 영예를 얻는다.(그림1) 솔직히 피압 민족으로서 꺼림칙한 일이기도 하지만 텐라이 스승의 말처럼 ‘국경 없는 예술’로 볼 때, 역사에 남는 귀중한 보배로 진열되어 있을 것이다. 이해 일만화삼국전(日滿華三國展)에 입상하여 은향로를 부상으로 받는다. 

34세(1939) 1월 석봉의 병간 속에 텐라이 선생이 영면한다. 

39세(1944) 징용장(徵用狀)이 나오자 일체의 공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여 현대 한국 전각계의 틀을 구축하고자 노력하며 개인전을 펼친다. 

40세(1945) 해방을 맞이하고, 35세 연상인 수덕사 선승(禪僧) 송만공(宋滿空, 1871~1946)을 심방하기도 하고, 42세 연상인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을 찾아가 ‘석봉산방(石峯山房)’등 4점의 휘호를 받는다. 

41세(1946) 예산공립여자중고등학교 교사로 취임한다. 

45세(1950) 학교 사임, 6.25전쟁을 겪지만 구사일생(九死一生)한다.

46세(1951) 전주 금산사에 들어가 수도하면서 철학을 연구한다. 

47세(1952) 증산(甑山) 교리(敎理)를 탐독하고 출가를 결심한다. 전북 김제 모악산 증산교본부에 입산하여, 청음(靑陰) 이상호(李祥昊, 1888∼1967), 남주(南舟) 이정립(李正立, 1895~1968) 형제를 대면하고 10년간의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석봉에게 있어 1950년대는 예술 활동보다 철학과 종교에 심취해 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56세(1961) 수도생활을 그만두고 귀가한다. 일본 도쿄서학원(東京書學院) 동인인 미즈시마(水島) 선생의 초청으로 도일, 4개월간 쇄도하는 전각 주문에 주야로 몰두한 바 있다.

60세(1965) 서울 국립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고석봉전각서예전(高石峯篆刻書藝展)’을 개최한다. 이후 여러 차례 일본에서도 전각서예전을 갖는다. 

61세(1966) 일본의 서학원(書學院) 동인(同人)들의 초청으로 도일(渡日), 16개월간 체류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다. 

62세(1966) 귀국 후 문공부 주최 신인전(新人展) 심사를 한다.

63세(1968) 서울의 국립중앙공보관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리고 이해 서울 종로에 사무실을 개설한다. 

65세(1970) 한국미술협회 3기 이사를 역임한다.

66세(1971) 중앙공보관에서 ‘제2회 고석봉전각서예전(高石峯篆刻書藝展)’을 개최한다. 출품작 중에는 의재 허백련,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원곡 김기승(그림2-1, 그림2-2) 외에 일본 작가들을 위한 전각 작품도 보인다.

68세(1973) 문공부 주최 ‘원로작가전(元老作家展)’에 출품한다. 

69세(1974) 한국전각협회(韓國篆刻協會)가 창립되고 ‘창립전’에 참여한다. 

71~76세(1976~1981) 한일문화교류협회 초청으로 매년 일본을 방문한다.

72세(1977) 1월 일본 시사신문사(時事新聞社)로부터 문화상을 수상한다.

77세(1982) 제1회 현대미술초대전(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한다. 이해 일본 도쿄 신주쿠(新宿, しんじゅく) 게이오백화점(京王百貨店, けいおうひゃっかてん)에서 희수(喜壽) 기념 ‘고석봉전각서예전(高石峯篆刻書藝展)’을 개최하고 <고석봉작품집(高石峯作品集)>이 출간된다. 여기에는 27세에 텐라이 선생을 만난 이후 50년간의 석봉 선생 작품 중에서 엄선한 1400여 작품이 실려 있다.

78세(1983) 제2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한다.

79세(1984) 일본 일한문화교류협회(日韓文化交流協會)의 초청으로 도일한다. 서울에서 열린 ‘제1회 국제전각예술대전(國際篆刻藝術大展)’에 참가한다.

80세(1985) 제4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를 하고, 제5회 추사선생 추모 학생서예공모전의 심사도 맡는다. 그리고 추사 선생 추모비(追慕碑)를 쓴다. 이해 일본 도쿄 긴자(銀座)의 타카겐화랑(タカゲン画廊)에서 ‘산수기념개인전(傘壽記念個人展)’을 개최하고 <산수전작품집(傘壽展作品集>도 간행한다. 그리고 도쿄에서의 ‘국제예술문화교류전(國際藝術文化交流展)’에 참가한다.

81세(1986) 일본 일한문화교류협회(日韓文化交流協會) 재 초청으로 도일한다.

82세(1987) 일본 도쿄 우에노(上野, うえの)에 있는 모리미술관(森美術館, もりびじゅつかん)에서 개최되는 일본 전국서미술진흥회(全國書美術振興會) 주최의 ‘일한서도교류전(日韓書道交流展)’에 초대되어 도일한다. 

83세(1988)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이다.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고석봉전각서예전(高石峯篆刻書藝展)’ 및 ‘고석봉(高石峯) 선생과 교류가 깊은 일본 서가전(書家展)’이 개최된다. 

84세(1989)부터 건강이 악화된 가운데 그해 제1회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한다. 작품 활동은 못하나 지도는 계속한다.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에도 이해 텐라이 선생 50주기(周忌)를 기념하여 ‘천래오십회기기념(天來五十回忌記念)’(그림5)라는 내용의 전각 작품을 남긴다. 이를 통하여 석봉선생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짐작할 수 있다.


85세(1990)에 6월에 <고석봉작품집(高石峯作品集) 2>가 일본에서 간행된다. 표지에는 ‘노봉봉주(老峯鳳柱)’로 씌어 있다.

88세(1993)에 슬하에 1남 3녀를 두고 예산읍 향리 자택에서 영면한다. 


석봉의 예맥은 1968년부터 사사받기 시작한 청람(靑藍) 전도진(田道鎭)으로부터 석헌(石軒) 임재우(林栽右) 등이 잇고 있다. 석봉 선생의 전각에 대한 열정은 2만 과(顆)가 넘는 무수한 유작으로 짐작만 할 뿐, 그 구체적인 수효는 알 수 없다. 영면 이듬해인 1994년에는 그의 아내 추종녀(秋終女) 편저의 <석봉 고봉주 서집(石峯 高鳳柱 書集)>이 간행된다.

그리고 석봉 선생의 예술 세계를 연구한 석사학위논문으로는 ‘石峯 高鳳柱 篆刻藝術에 대한 硏究’(김성숙, 성균관대학교, 2005), ‘石峯 高鳳柱 篆刻硏究’(權頂, 대전대학교, 2011) 등이 있다. 

2013년 12월 10일 석봉 선생 사세(辭世) 2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는 석봉기념사업회(회장 박학규) 주관으로 ‘석봉 고봉주 선생 서예 및 전각 연구 국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2017년 9월 27일부터 두 달 반 동안, 일본 도쿄 북방에 있는 고가시(古河市) 전각미술관에서는 ‘고석봉전각전(高石峯篆刻展)’이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84세까지의 전각 작품을 중심으로 임서 및 창작 서예 작품, 그의 인장을 사용한 당대 서예가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었다. 이처럼 석봉의 일본에서의 명성은 여전하다.


석봉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도일하지만, 두 분의 일본 스승을 모시고, 일본에서 더 많은 작품 활동을 함은 물론, 일본 황실의 보인을 새기는 영예를 누리고, <고석봉작품집(高石峯作品集)> 1, 2권이 모두 일본에서 출판된 점 등을 들어 친일파로 의심받기도 한다. 또한 이 때문에 그의 만년의 한국에서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크지 못했던 점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독립운동 행적으로 인한 구속과 구금은 그의 일인 스승 히다이 텐라이 선생의 도움으로 예술로 승화하게 된다. 텐라이는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로 일본에서의 석봉의 명성을 시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기실 예술은 이념을 떠나 작품 자체로써 감상해야 한다.


20세기 대표적인 우리나라 전각가로는 석불 정기호(1899~1989)를 필두로, 석봉 고봉주(1906~1993), 청사 안광석(1917~2004), 회정 정문경(1920~2008), 철농 이기우(1921~1993) 등으로 이어진다.

석봉의 교유관계는 한국과 일본에 두루 걸쳐있는데, 그의 인보(印譜)를 살펴보면 인맥을 알 수 있다. 그와 인연이 깊었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그의 출중한 외모와 변함없는 마음에 방점을 찍고 있다. 당대의 대표적인 서화가(書畵家)들은 물론 종교인과 학자들, 특히 많은 일본 작가나 지인들이 그의 전각 예술을 사랑하고, 또 소유하고 싶어 했다. 수정불가(修正不可)의 전각예술처럼 그와 교유했던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생을 마칠 때까지 망각불가(忘却不可)였다.

전각가로는 충남 청양 태생의 회정 정문경은 동향인으로 가깝고, 위창 오세창의 제자인 철농 이기우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성당 김돈희의 제자로서 한국전각협회 초대회장을 맡은 심당 김재인(1912~2005)과는 한국전각협회 창설 이후 알게 되고, 경남 김해 태생의 청사 안광석과는 교분이 별로 없었다. 

서예가로는 위창 오세창(1864∼1953), 성당 김돈희(1871~1937), 소남 송치헌(1887~1963), 죽농 서동균(1902~1978), 소전 손재형(1903~1981), 소암 현중화(1908~1997), 청남 오제봉(1908~1991), 원곡 김기승(1909∼2000), 검여 유희강(1911~1976), 동정 박세림(1924~1975) 등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화가로는 의재 허백련(1891~1977), 이당 김은호(1892∼1979), 청전 이상범(1897∼1972), 소정 변관식(1899~1976), 심산 노수현(1899~1978)을 비롯, 석봉보다 연하인 남농 허건(1907~1987), 이당 김은호의 제자인 월전 장우성(1912~2005)과 운보 김기창(1913~2001)(그림3), 그리고 심원 조중현(1917~1982), 유산 민경갑(1933~2018) 등과도 친근하게 교유했다. 이는 그들의 작품에 석봉의 전각을 찍은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그리고 일엽(一葉) 스님(1896∼1971)의 아들인 일당(日堂) 스님(金泰伸, 1922~2014)과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다. 학자로서는 연민 이가원(1917~2000) 박사와 각별한 사이었다. 


석봉의 전각 작풍(作風)은 오창석과 그의 제자 가와이 센로의 각풍(刻風)을 직접적으로 따르고 있어 고아(高雅)하면서도 중후(重厚)하고, 질박(質朴)하면서도 세련(洗練)된 맛을 보여주고 있다. 석봉은 일본 서학원의 풍부한 책과 자료를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타고난 재능에 꾸준한 노력까지 더하여 일본과 한국의 전각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전각의 고전인 한인(漢印)을 기초로 하여 금문(金文), 석고문(石鼓文), 고새(古璽), 봉니(封泥) 등을 연구하고, 등석여로부터 오희재, 조지겸, 오창석으로 이어지는 청대 명가들의 서풍과 각풍도 섭렵했다.(그림6) 주로 가장자리를 두들겨 질박한 맛을 내고 있지만, 가끔은 제백석의 도법과 결구로 예리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백문(白文)으로 새길 때에도 주로 테두리 선을 넣어 장법상의 새로운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이는 인면(印面) 주변에 담을 쌓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럴 경우 인문(印文)은 보호받는 느낌과 함께 갇힌 느낌을 주기도 한다.(그림1-1)

그리고 좁은 인면에 음양각(陰陽刻)으로 완성한 작품도 더러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주문(朱文) 획의 중심을 정교하게 다시 새겨나감으로써 아낌없는 정성에다 화려한 느낌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손재주가 앞선 나머지 오래 두고 보면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점은 어쩔 수 없다.(그림4)

변관(邊款)에도 치밀한 장법(章法)을 이용하여 품격을 더하고 있으며, ‘방완백산인(仿完白山人)’처럼 자신 공부한 작가를 밝히기도 했다. 방대한 작업 분량 탓인지 변관 작업에서는 쌍관(雙款)보다 자신의 아호 정도만 간단히 새겨 넣은 단관(單款)이 많은 편이다.

석봉은 서예에서도 전각과 같이 1~4자 정도의 글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애(愛), 기(祈), 천(灥), 흠(吽)’ 등과 같은 1자 서예를 비롯하여, ‘구시(求是), 승우(勝友), 쾌문(快聞), 유목(遊目), 신욕녕(身欲寧)(그림7), 정기심(正其心), 화기동(和氣動), 진즉성(愼則誠), 심안여해(心安如海)’ 등과 같이 전각에서 흔히 씀직한 짧은 소재들을 주로 다룬다. 따라서 그의 필법(筆法)은 도법(刀法)을 닮아 근골(筋骨)이 강하고, 결구나 장법에서도 전각에서의 긴밀한 포치법(布置法)을 따르고 있어, 각서일체(刻書一體)의 작가라 할 만하다. 

그는 칼을 잡아야 마음이 편안한 집도신이(執刀神怡)의 작가이다. 세상에 태어나 의식이 싹틀 무렵,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석봉은 현장에 나아가 몸으로 싸우기도 하고, 돌아와 홀로앉아 돌을 새기면서 삶을 새겨나가기도 했다. 석봉 전각의 처음은 먹고 살아야 하는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을지 모르나, 나중은 포박함진(抱朴含眞)의 태도로 아름다운 도혼(刀魂)을 영원히 남기는 쪽이었다.(그림2-1)

우리나라에서 전각이 예술로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부터이다. 청(淸)과 일본(日本)의 전각 예술을 이어받은 석봉은 일본과 한국 현대 전각의 문을 열어준 대표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공적으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한일문화교류의 확대이다. 그는 당당한 예술적 풍자(風姿)로 씩씩하면서도 아름다운 한일문화교류의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또한 오창석과 제백석도 몰라볼 만큼 청말(淸末)의 지고한 예술 경계에도 마음껏 드나들었다. 원숙(圓熟)하고 질박(質朴)한 칼맛은 인성(印聖)의 영역이다. 그러나 엄청난 작업량과 평생 무수한 역작을 남겼음에도 동향(同鄕)의 선배 예술가인 추사(秋史)의 발칙하고 기괴한 상상력과, 중국의 오창석이 일으킨 이른바 오풍(吳風)을 훌쩍 뛰어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하나 독립운동가로서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한 작가로서 한글 전각 작품이나 한글 서예 작품이 눈에 잘 띄지 않음도 옥의 티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호 석봉(石峯)은 영원히 쌓아두고 누구나 마음껏 새길 수 있는 거대한 인재(印材)로 다가온다.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칼끝으로 한(恨)을 풀어가며, 방촌(方寸)에 새겨낸 도장 꽃에 매운 향기가 더하기를 소망해 본다.(끝)


(그림1) 

강원신궁(橿原神宮) - 백문(白文)

강원신궁(橿原神宮) - 주문(朱文)

(그림2-1) 

지어자락수지아(池魚自樂誰知我) 못의 물고기는 자락하니 누가 나를 알아보며

임조상망불피인(林鳥相忘不避人) 숲의 새는 서로 잊고서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그림2-2)

김기승신인대리장수(金基昇信印大利長壽) 김기승 신인(도장)으로 큰 이익과 장수를 기원함.

(그림2-3)

원곡생우부여장우한양(原谷生于扶餘長于漢陽) 원곡은 부여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성장함.

(그림3) 

운보묵희(雲甫墨戱) 운보(雲甫) 선생이 필묵(筆墨)을 유희(遊戲)함. 

(그림4)

장근보졸(將勤補拙) 장차 부지런히 노력하여 부족한 점을 보충함.

(그림5) 

천래오십회기기념(天來五十回忌記念) 텐라이(天来) 선생 50주기(周忌)를 기념함.

(그림6) 

부지노장지(不知老將至) 늙음이 곧 다가옴을 알지 못함.

(그림7) 

신욕녕(身欲寧) - 노봉(老峯). 몸이 편안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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