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제6강> 金文(금문)

1. [金文]의 名稱

  金文이란 "吉金文字"의 簡稱이며, 金文에서의 "金"은 靑銅을 뜻하지만, 靑銅은 실제적으로 錫과 鉛의 合金이다. 中國의 上古時期에는 銅을 "金"이라 불렀기 때문에, 金文은 靑銅器 銘文이다. 宋代에는 "鐘鼎 器款識"라고 하였으며, 후에는 "鐘鼎文"이라 하였는데, '鐘'은 古代의 樂器를 대표하고 '鼎'은 禮器를 대표하였기 때문이다. 狹義의 金文은 殷周(주로 周代)時期의 鐘鼎 등의 靑銅器物에 주조된 銘文을 말하며, 廣義의 金文은 이후의 漢代 器物의 銘文까지를 포함한다.

  2. 靑銅器物과 金文字數

  靑銅器物는 歷代로 꾸준히 출토되어왔으나, 그 출토 원인은 주로 "地不愛寶(땅은 보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보물은 눈에 띄게 되어 있다)"라는 식의 自然的인 노출이 많았다. 商代의 銅器에는 文字가 거의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대개 族徽나 祭祀 지내는 사람의 이름, 혹은 器物을 만든 緣由 등이었으며, 대부분 1∼2 個 字나 圖象이었다. 末期에는 2∼30 字의 銘文으로 증가하였지만, 전체적인 字數가 적었으므로, 사실상 金文은 周代의 대표 文字라고 할 수 있다. 周代에는 靑銅器上의 銘文의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예를 들면, 成王時代의  令  에는 187字, 康王時代의  大盂鼎 에는 291字, 宣王時代의  毛公鼎 에는 499字가 鑄造되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靑銅器物은 一萬件이 넘으며, 孫雉雛의  金文著錄簡目 에는 7,312件(殷周이후의 銅器 포함)이 수록되어 있다. 殷代의 靑銅器는 매우 적게 발견되었으며, 가장 많기로는 역시 周代로서 銘文이 있는 靑銅器는 4,000件 이상이다. 宋代이래로 많은 金文 關聯 著錄이 편찬되어, 銘文을 摹錄하고 考釋하였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金文은 모두 4,000여字이며, 考釋된 字는 2,500字 정도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3. 金文의 內容

   宋代以來로 金文著錄이 나온 이후, 오늘날까지 原物과 著錄의 수효는 대단히 많으며, 그 내용도 또한 매우 풍부하다. 이미 발견된 金文은, 절반이상이 自名式 金文으로서, 商代 中期에 이미 출현하여 春秋戰國시대까지 계속되었다.
   自名式 金文은 器物의 소유자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서, 최초에는 族氏名, 혹은 作器人名(器物製作人名), 受祭人名을 기록하였으며, 그 숫자는 1-3字로서 일정하지 않았다. 族氏名만을 기록한 것은 대부분 商代의 族氏文字에서만 나타나며, 器物製作人名이나 受祭人名만을 기록한 것은, 대부분 商代와 西周初期에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 (婦)好, 父乙, 且(祖)辛" 등이 그것이다. 商代晩期에서 西周初期까지에는, 族氏名에 作器人名을 더하거나, 혹은 族氏名에 受祭人名을 더한 것, 作器人名에다 器物의 名稱을 더한 것 등이 나타났다. 이밖에 器物의 쓰임에 대한 설명, 器物의 명칭 등이 언급된 것도 나타났는데, 예를 들면, '亞 乍(作)父乙寶 鼎'이라는 銘文에서 '亞'는 族名, ' '은 作器人名, '父乙'은 受祭人名, '寶 鼎'은 器物의 쓰임에 대한 설명과 器物名稱이다. 이에 상응하여 後代로 갈수록 銘文의 字數도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自名式 金文에 대해 篇幅이 비교적 길고, 내용이 풍부한 記事性 金文이 있다. 商代末期에 출현한 記事金文의 내용은 대단히 광범위하여, 예를 들면, 祭祀, 賞賜, 冊名, 旌功, 訓誥, 約劑, 戰事 등이 기록의 범위였다.
   祭祀 活動은 당시의 大事였는데, 祭祀를 위하여 지은 金文으로는 武王 때 鑄造된  天亡  ( 三代吉金文存 9.13)이 있다.
   賞賜를 기록한 金文 또한 적지 않은데, 周王의 諸侯大臣에 대한 封賞나 大臣의 부하에 대한 賞賜 기록 등이 있었다. 周王은 諸侯大臣에 대한 賞賜活動이나 諸侯를 冊奉하거나 신하에게 관직을 임명하는 冊命禮儀를 동시에 진행하였는데, 冊命性質의 金文은 西周中期이후에 비교적 많이 나타나며, 고정된 형식을 형성하였고, 文字 또한 비교적 整齊하였다.
   先祖들의 德善, 功烈, 勳勞, 慶賞, 聲名을 稱頌하는 하거나, 자신의 功業을 宣揚하는 旌功性質의 金文은 文辭가 대부분 繁縟하고 지나치게 아름다운 말을 사용하였다.
   金文에는 또한 祝 性質의 것이 있는데, 대부분 西周晩期와 春秋時期에 나타난다. 春秋時期 諸侯상호간에 혼인을 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送女兒出嫁의 金文이 남아 있는데, 내용은 대부분 祝 文辭이다. 그리고 箴戒性質의 것도 있는데, 이러한 箴戒金文은 일반적으로 文辭가 簡約하고, 비유를 즐겨 사용하였다.
   이밖에, 周王의 訓誥만을 기록한 것, 約劑만을 기록한 것, 法律審判 기록, 戰事를 기록한 것, 民事 事件 記錄, 家系 序列, 官府에서 발급한 憑信證書 등이 金文의 內容에 포함된다.

   4. 金文의 文字學的 特徵

   文字學的 觀點에서 보면, 金文은 시대적으로 위로는 甲骨文의 영향을 받고, 아래로는 小篆과 隸書에 의해 계승되어 진다. 金文은 甲骨文의 기초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文字의 構造와 用法에 있어서 甲骨文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殷商時期의 金文은 甲骨文과 더욱 類似하다.
   甲骨文과 金文은 相異한 재료위에 相異한 工具로써 기록하였던(刻, 鑄) 同一體系의 文字이지, 각기 다른 두 종류의 文字라고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金文은 靑銅器物에 鑄造되었다는 점 때문에, 칼로 새긴 甲骨文과는 풍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甲骨文은 일반적으로 劃線들이 비교적 섬세하지만, 金文은 대부분 비교적 두터운 편이다. 金文에는 또한 속을 채우는 방법을 채용하고 있는데, 이는 甲骨文에서는 드문 현상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西周에서 春秋까지의 金文은 周代의 文字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으며, 西周金文과 商代金文은 서로 계승적 관계이므로, 書寫風格을 제외하면 그 차이점을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銘文의 行款은, 竪列直書로서 右向左行이 가장 一般的인 것이고, 左向右行의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일부 銘文은 蓋, 器에 따로 鑄造되어 있으며, 蓋銘은 右向左行이나 器銘은 左向右行인 경우도 있다.
   일부 銘文은 同銘異器이며 行款에도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면  中伯  의 器銘은 左向右行이나 또다른 器物에서는 右向左行이다. 銅器에 있어서 銘文의 위치는, 器物의 종류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商, 西周時期의 銘文은 대부분 器物 내부의 은밀한 곳, 즉 爵이나  는 바닥에,  나 尊은 다리부분의 안쪽이나 바깥쪽, 鼎은 기물내부의 벽에, 敦,  ,   등은 器物 內部에, 귀가 없는  은 둥근 주둥이를 따라서 記錄하였다. 春秋戰國시기에 이르러서는, 銘文을 器物 外部에 鑄刻하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였다.

   金文의 字形上의 일반적인 특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象形의 특징이 점차 줄어들고, 線條化, 符號化하는 추세이다.
   (2) 金文은 字形이 定型化되는 추세에 있었으므로, 一字 多形의 현상이 甲骨文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
   (3) 筆劃은 일반적으로 甲骨文에 비하여 둥글고 두터우며 字形 또한 크다. 靑銅器의 절대 多數의 銘文은 鑄造된 것으로서, 만약 筆劃이 너무 가늘어서 鑄造되어 나오지 않거나 뚜렷하게 鑄造되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필획이 굵고 거칠어 졌으니 字形 또한 당연히 커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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