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최고위과정

정관대사의 시

허공을 봐도 허공 아니지…

靜坐南臺上 (정좌남대상)
觀空不是空  (관공불시공)
勿拘聲色外 (물구성색외)
寧墮見聞中  (영추견문중)
湛湛秋潭月  (담담추담월)
亭亭冬嶺松  (정정동령송)
玄關追擊碎:  (현관추격쇄)
方得震禪風:  (방득진선풍) 
조용히 남대 위에 앉아
허공을 보아도 허공이 아니지
소리 빛 밖에라도 구애되지 말면
어찌 보고 들음에 떨어지랴
맑고 맑은 가을 못 달
꼿꼿한 겨울 고개 마루 소나무
오묘한 문도 때려 부수어야
선풍을 드날릴 수 있는 것을 


이 시는 정관대사의 시이다. 관선자(觀禪子)라는 선객에게 준 시이기에
그 이름 풀이이듯이 선을 참구하는 마음가짐을 풀이한 것 같다.
여기서 말한 남대가 오대산의 남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대에 조용히 앉아 허공을 보아도 허공이 아니라 하였으니 여기서부터
보고 들음이나 소리 빛에 구애되지 않는 마음가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렇지만 달은 달이요 . 소나무는 어디까지나 소나무이다. 
이것들이 바로 진리의 터득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니 이 문을 부수어야 선풍을 드날릴 수가 있다.
출가와 불출가의 수선적 방편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이 물이 물이 아니요 산이 산이 아닌 자리에서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자리로 되돌아 온 것이다.
가을 못에 비친 달, 겨울 고개의 소나무
각기 맑고 고고하면서 바로 그대로 존재하는 소리 빛의 실상이다.
오묘한 진리의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있다.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열 수 있는 대상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부술 수 있는 문은 더더구나 없다. 그렇지만 없다고 의식되는 이 오묘한
문을 찾을 수만 있다면 부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문이 사물의 빛과 소리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에 없다면,
오히려 내 마음에 있는 문일 수가 있다. 내 마음의 문이라면 나만이 열 수
있으니 주인은 바로 나이다. 내 마음의 주인이 나이기에 이 문은 내가
열어야 하고 그러자니 대상의 사물로 인식되는 어느 곳에도 집착되어서는
안 된다. 이 집착을 여의면 문은 저절로 부숴 지는 것이다.
마치 저 허공을 보아도 허공이 아니듯이,
이 시는 이렇듯 선미와 선기(禪機)로 가득 차 있다. 

이종찬 <동국대학교 교수>
[부다피아]에서 펌
달마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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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靑禾
뭐라 표현을 하기란 제 식견에서 는 너무 고고한 시 같아서 어렵지만 느낌으로 만 해석을 한다면  집착에 가까운 생활이 거듭되는 나를 보는듯 가슴이 막히는것 같네요 산은 산이고 소나무는 어디까지나 소나무인데......그러면 산에 소나무를 심으면 안되는건가? 요상스런 심술이 자꾸 뻗쳐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