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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 [茶道, teaism]
찻잎 따기에서 달여 마시기까지 다사(茶事)로써 몸과 마음을 수련하여 덕을 쌓는 행위.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평보다는 주어진 것에 대하여 행복해 하는 삶 - 그릇
본문
몸의 수련은 차의 효능으로 달성되며, 마음의 수련은 군자와 같고 사악함이 없는 차의 성미를 따름으로써 달성된다.
중국의 다도는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다경(茶經)》(760)을 짓고, 호주자사(湖州刺史)인 안진경(顔眞卿)이 삼계정(三癸亭)이라는 다정(茶亭)을 지어 육우에게 기증한 773년에 완성되었으며, 이념은 《다경》에 적혀 있는 중용검덕(中庸儉德)이다.
또, 일본의 다도는 선종(禪宗)의 헌다(獻茶) 의식이 발달된 심미적인 종교로서 무로마치[室町]시대(1336~1573)에 사카이[堺]의 무라다 슈코[村田珠光]에 의하여 형성되고, 그의 제자인 센노리큐[千利休]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일본의 다도 정신은 자득[佗]을 바탕으로 하여 깨우침[覺]의 종교차(宗敎茶)를 인연으로 한 현성(現成:佗禪)으로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신라의 화랑에 의하여 다도의 싹이 텄다고 할 수 있는데, 화랑도가 다도를 형성한 편모는 《삼국유사》의 <경덕왕 충담사> 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덕왕(재위 742∼765)이 어느 해 3월 3일, 궁성 서쪽의 귀정문(歸正門) 누(樓) 위에 나가서 좌우 신하들에게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중을 한 사람 데려올 수 있겠느냐”고 하여 적임자로 불려 온 사람이 기파랑도(耆婆郞徒) 충담승이었다. 경주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차를 달여 공양한 후 벚나무통을 둘러메고 돌아오는 충담을 경덕왕은 반갑게 맞아들여 통을 열어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과인에게도 그 차를 한 사발 나누어 주겠느냐”고 하자 충담은 곧 차를 달여 바쳤는데, 차맛이 특이하고 찻사발 속에서는 독특한 향기가 그윽하게 풍겼다. 또 왕은 “짐이 듣건대 스님이 기파랑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는 뜻이 매우 높다던데, 과연 그러하냐”고 물으니 “그렇습니다”고 한 즉,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백성을 다스려, 편안하게 하는 노래를 지어 달라”고 하여, 충담은 곧 칙명을 받들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쳤다. 왕은 이것을 높이 평가하여 충담을 왕사(王師)로 봉하려 하였으나, 그는 재배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한다.
이것을 경덕왕의 의도적인 과거(科擧) 장면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진흥왕 37년에 창제된 화랑은 관리의 기용을 목적으로 한 제도였다.
둘째, 원성왕 4년에 독서삼품(讀書三品)의 과거제도가 시행되기 전에는 한때 활쏘기로도 관리를 발탁하였다고 하나, 충담이 치른 다도와 노래지어 부르기도 시험과목이 된 본보기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신라의 다도는 화랑의 수행요목인 도의연마(道義鍊磨)와 산수유오(山水遊娛)에 해당되며, 노래지어 부르기는 가락 즐기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도의연마를 위한 다도는 정신수양을 위한 것이고, 산수유오를 위한 다도는 차의 효능에 따른 신체단련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차의 맛과 향기를 감정함으로써 다도(도의연마)의 수련 정도를 측정할 수 있으며, 노래지어 부르기로써 가락 즐기기의 수련 정도를 판정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음력 3월 3일은 조선시대에도 절일제(節日製)의 과거날이었으며,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모자에 어사화(御賜花)를 꽂아 주는 화랑찾기[探花郞]라는 의식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있었는데, 이것은 신라 화랑의 유습으로 보인다. 한편, 이것을 신라 다도의 형성으로 보는 것은 충담이 메고 다닌 다구가 담긴 벚나무통이 그 무렵 《다경》에 씌어 있는 당나라의 다구와 다를 뿐만 아니라, 화랑의 산수 유람에 편리하도록 고안된 고유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삼국통일의 성업을 성취한 정신력의 배양도 구도적인 다도의 영향이었다. 또 “마음이 맑아야만 도가 보인다(澄懷觀道)”는 말처럼 화랑도의 아름다운 덕망은 다도의 수련을 통한 맑은 마음에서 샘솟은 것이었다.
고려의 다도정신은 다가(茶家)들이 읊은 차시(茶詩)에 많이 보이는 망형(忘形)의 경지이다. 예를 들면, 이규보(李奎報)의 《빈강의 촌집에 묵다(宿瀕江村舍)》에는 강가를 방랑하니 저절로 형체를 잃네(江邊放浪自忘形), 임서하(林西河)의 《찻집에서의 낮잠(茶店晝眠)》에는 무너지듯 평상에 누우니 문득 형체를 잃네(頹然臥榻便忘形), 이숭인(李崇仁)의 《신효사 감스님방을 적다(題神孝寺湛師房)》에는 담쟁이덩굴 무늬 옷과 흰 장삼 차림에 이미 형체를 잃네(蘿衣白衲己忘形) 등이 있다.
망형이란 자신의 형체를 잊고 무위자연의 도(道)를 깨치는 것으로서 망기(忘機) 또는 좌망(坐忘)이라고도 한다. 좌망이란 단정하게 앉아서 잡념을 떨쳐 버리고 무차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망형의 다도정신은 고려청자의 다기(茶器)에도 투영되었다. 때문에 송나라의 태평노인은 《유중금(釉中錦)》에서 감서(監書)의 술, 단계(端溪)의 벼루, 휘주(徽州)의 먹, 낙양(洛陽)의 꽃, 건주(建州)의 차, 고려청자의 비색은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격찬하였다.
다도에는 오관(五官)이 동원되는 외에도 그림 ·노래 ·춤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종합예술이라고 한다. 잎차 중심의 조선시대에는 다가들이 차를 마시면서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청담을 나누는 취미를 즐겼다. 차마시기의 흥취는 유독한상(幽獨閑賞)에 있었다. 이 때 다가들은 소요(逍遙) ·자득(自得) ·무집착 ·비우사상(庇雨思想) 등의 심상으로 다도를 수련하였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읊은 차시에는 극한 상황을 소요와 자득의 정신으로 극복한 모습이 드러난다. 소요정신이란 온갖 욕망을 버리고 유유자적할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로서, 현실을 관조하고 긍정하는 달관의 경지이다.
한편, 일본의 다도정신인 자득이란 우리의 안빈낙도와 견줄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자득이란 다산처럼 절망적인 유배생활을, 선택한 운명인 양 역설적으로 극복하는 능소능대(能小能大)한 품성을 말한다.
무집착은 정약용의 제자인 승려 의순(意恂)이 읊은 “산천도인의 사차시를 받들어 화답하여 짓다(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라는 차시에서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바라밀(波羅蜜)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불가의 무집착은 유가나 도가의 좌망에 담겨 있는 무집착과 개념이 같다.
비우사상에 의한 다도정신은 안빈낙도와 청백리 사상을 함께 담고 있는 차때[茶時]라는 미풍양속으로 표출되었다. 비우사상이란 정승 유관(柳寬)이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살았다는 우산각(雨傘閣)의 고사에서 비롯되어 그의 외증손인 이희검(李希儉)으로 이어지고, 그의 아들인 이수광(李晬光)이 재건한 비우당(庇雨堂)에 이르러 성숙된 청빈사상이다.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사헌부의 관리들이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차때를 적으면서 사헌부 감찰의 검소함을 역설한 것도 비우사상과 맥락이 통하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다도정신은 시대별로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의식은 무아의 경지이다. 왜냐하면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란 맑은 것, 아름다운 것, 깊은 것이 샘솟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의 다도법식
신라시대에는 《다경》에 의한 제다법과 자다법(煮茶法)이 준용되었다. 전라남도에 전승되는 엽전 모양의 돈차[錢茶:綠苔錢, 靑苔錢]의 제다법은 신라시대 제다법의 유습으로서, 《다경》에 적힌 제다법과 거의 같기 때문이다. 또한, 자다법에 대해서도 최치원(崔致遠)의 <진감국사비문(眞鑑國師碑文)>에 다시 중국차로 공양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섶나무로써 돌솥에 불 때어 가루를 내지 않고 달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다경》에 적혀 있듯이 떡차[餠茶]를 가루내는 방법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고, 다만 찻가마[鍑] 대신에 돌솥을 사용한 것이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다경》에 의한 떡차의 제다법과 자다법은 다음과 같다.
① 음력 2∼4월, 차나무에서 딴 찻잎을 종다래끼에 담아 온다.
② 밑바닥에 대발을 깐 시루에 찻잎을 넣은 다음 물을 담은 가마에 얹고 쪄낸다.
③ 쪄낸 찻잎이 식기 전에 절구에 찧는다.
④ 찧은 찻덩어리를 틀에 박아내어 대자리에 널어서 말린다.
⑤ 차가 굳기 전에 송곳으로 복판에 구멍을 뚫고 대꼬챙이에 꿰어 불에 말린다.
⑥ 마른 차를 화롯불에 쬐어 장육기(藏育器)에 저장한다.
⑦ 달이려면 대집게에 차를 끼워서 차의 양면이 부풀어 오르도록 불에 쬔다.
⑧ 구운 차의 향기를 보존하기 위해 종이 봉지에 넣고 열을 식힌다.
⑨ 차를 나무매통으로 갈아서 가루떨개로 가루를 모아 비단체에 쳐낸 다음 차합에 구기[則]와 함께 담는다.
⑩ 풍로에 찻가마를 걸고 물통의 물을 부은 다음 끓인다.
⑪ 물은 어목(魚目) ·용천연주(湧泉連珠) ·등파고랑(騰波鼓浪)의 3단계로 끓는데 용천연주 단계에 표주박으로 물을 떠내어 익은물바리[熟盂]에 담아서 식힌다.
⑫ 길이 두 자쯤 되는 대젓가락으로 가마 복판의 탕심(湯心)을 저으면서 물 1홉에 약 4 g의 가루차를 가마의 물속에 넣는다.
⑬ 등파고랑 이전에 익은물바리에서 식힌 물을 가마에 부어 끓는 물의 세력을 가라앉히며 차기(茶氣)를 낸다.
⑭ 가마를 교상(交床)에 내려 놓고 표주박으로 찻물을 떠내어 청자 찻주발에 담는다.
⑮ 1인당 3주발을 뜨거울 때 마신다.
고려시대에는 연고차(硏膏茶)를 마셨는데, 차는 섣달과 한식 이전에 따서 5등급으로 분류하였다. 특등품은 물에 담근 찻잎의 섬유질 한 가닥을 뽑아낸 것으로서 은선수아(銀線水芽)라 한다. 1등품은 응조(鷹爪)·작설(雀舌)·맥과(麥顆)와 같은 올차[早茶]이다. 2등품은 일창일기(一槍一旗)로서 간아(揀芽) 또는 기다(奇茶)라고 한다. 3등품은 일창이기(一槍二旗)의 차로서 중아(中芽)라고도 한다. 4등품은 한 싹에 3∼4잎이 달린 쇤차[老茶]이다.
연고차의 자다법은 다음과 같다.
① 연고차를 몽치[椎]나 방칫돌[砧]로 으깨어 차맷돌[茶磨]로 가루 낸다.
② 탕관의 물은 해안(蟹眼)·어목·용천연주·등파고랑·노탕(老湯)의 5단계로 끓는데, 3단계인 용천연주의 물을 표주박으로 떠내어 찻사발에 붓는다.
③ 찻사발에서 찻가루와 물을 융합시키는 점다(點茶)는 약 4g의 가루차를 찻숟가락으로 떠서 찻사발에 넣고 반점이 생기지 않도록 탕수를 붓는다. 찻숟가락이나 찻솔[茶筅]로 거품이 나도록 젓는데 7단계를 거친다.
1단계는 손은 가볍게, 찻솔은 무겁게 흔들면서 천천히 휘젓는다. 2단계는 찻솔을 힘차게 휘저어 차의 빛깔을 낸다. 3단계는 찻솔을 가볍게 휘저으면 60∼70%의 빛깔이 갖추어진다. 4단계는 찻솔을 천천히 저으면 차 거품이 난다. 5단계는 찻솔을 천천히 저으면 차의 향기가 난다. 6단계는 찻솔을 더욱 느리게 휘저으면 유액상의 거품이 난다. 7단계는 중용을 지키면서 탕수를 부으면 잔이 넘칠 만큼 유무(乳霧)가 생기다가 응고상태[咬盞]가 된다. 점다가 끝난 차는 거품을 균등하게 나누어 마신다.
조선시대에는 잎차를 마셨는데, 차기를 우려내는 엄다법(淹茶法)은 다음과 같다.
① 탕관의 물은 하안(蝦眼)·어목(魚目)·용천연주·등파고랑·수기전소(水氣全消)의 5단계로 끓는데, 3단계인 용천연주까지를 맹탕(萌湯)으로 치며, 물의 기세가 완전히 쇠하는 5단계를 순숙(純熟)으로 친다.
② 순숙한 물과 잎차를 다관에 떨구어 넣는 방법을 투다법(投茶法)이라고 하는데, 계절별로 차이가 있다. 겨울에는 탕수의 냉각을 방지하기 위하여 다관에 차부터 넣고 탕수를 붓는 하투법(下投法)을 쓴다. 여름에는 다관에 탕수부터 붓고 차를 넣는 상투법(上投法)을 쓴다. 봄·가을에는 다관에 탕수를 절반 붓고 차를 넣은 다음 나머지 탕수를 붓는 중투법(中投法)으로 한다.
③ 다관에서 잎차와 탕수를 융합하는 침출(浸出) 시간은 삼호흡법이 적용된다. 다시 삼호흡 동안을 기다렸다가 찻잔에 따라서 차탕의 빛깔·향기·맛을 음미하며 마신다.
중국차의 음용은 신농씨(神農氏) 때부터 시작되어 5,000년의 역사를 가졌으며, 현재도 광둥어[廣東語]의 '차', 푸젠어[福建語]의 '테'가 세계적으로 '차'란 말로 쓰이고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차는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은 차의 하나였으나, 최근에는 인도·스리랑카의 홍차에 그 명성을 빼앗기고 있다. 현재 다시 부흥되고 있으며, 특히 광둥의 잉더[英德]홍차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차는 약차(藥茶)로 마시기 시작해 점차 기호차(嗜好茶)가 되었다. 중국차가 일반화하고 세계에 널리 퍼진 것은 명(明)나라 때의 전차(煎茶)법이고, 모차[抹茶]나 다례(茶禮) 같은 것은 송(宋)나라가 멸망하면서 사라졌다. 또 중국에서는 수십 년 묵은 차를 약차로 하여 거기에 여러 가지 한약을 넣어 민간약으로 많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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