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작품 이해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전통시, 민요시, 낭만시
○ 율격
① 7․5조의 음수율, 3음보의 민요조
② ‘-우리다’의 각운
○ 성격 : 전통적, 민요적, 여성적, 애상적
○ 제재 : 진달래꽃의 정서와 이별
○ 주제 : 이별의 한(恨)과 그 승화(昇華)
○ 어조 : 전통적인 여인의 애절한 목소리
○ 특징
① 1연 4연에서 반복한 수미쌍관(수미상응, 수미상관)의 구조
② 반어적 표현을 통한 절제의 압축미와 시적 인상의 강화
③ 점층적 반복을 통해 감정의 깊이를 심화시킴
④ 전통적인 율격과 정서, 향토적 지명, 소재를 사용(민요시의 일면)
⑤ 도치, 반복, 반어, 명령법 등의 사용
○ 출전 : <개벽>25호. 1922. 7
○ 구성
1연 : 이별에 대한 체념적 순응(기)
2연 : 떠나는 임에 대한 사랑과 축복(승)
3연 : 원망을 초극한 희생적 사랑(전)
4연 : 인고의 의지로 이별의 슬픔을 극복(결)
◎ ‘진달래꽃’의 전통시와의 접맥
도솔가(향가) → 가시리(고려가요) → 황진이의 시조(시조) → 진달래꽃(현대시)
◎ 시어 및 구절 풀이
* 1연 : 반어적 표현. 전통적 여인이 지녔던 인종의 자세가 드러남.
* 역겨워 : 마음에 거슬리고 싫어
* 가실 때에는 : 이 시에서 이별을 가정하고 있다고 볼 때, 이는 가정상의 선험적 이별 체험인 셈이다.
* 영변 : 평안북도 영변군의 지명
* 약산 : 약산 동대를 가리키는 말. 관서 팔경의 하나로 진달래가 곱기로 유명함. 평북 영변 서쪽 약 2km 지점인 철옹성 동남쪽에 있음.
* 진달래꽃 : 서정적 자아의 분신. 임에 대한 헌신적 사랑. 전통적 소재. 토속성.
* 뿌리오리다 : 꽃과 연결하여 불교의 산화(散華)로, 축복의 뜻
☆ 산화공덕(散花功德) : 부처님 앞에 꽃을 뿌려 그 공덕을 비는 일(=散華功德)
* 즈려 : ‘지그시 눌러, 저질러’의 평안도 사투리
* 4연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반어법. 도치법(아니 눈물). 수미쌍관법. 애이불비(哀而不悲),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자세. 슬픔의 의지적 승화
◎ 작품 해설
이 시는 전통적인 민요조의 3음보의 운율과 한시의 ‘기-승-전-결’의 구조를 효과적으로 결합시켜 운율감과 함께 전체적인 형태적 통일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운율과 형태적 통일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교묘한 행의 배치와 시어의 변용을 통하여 고전 시가에서 보이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다. 또한 시적 자아의 이별의 정한을 반어법과 적절한 이미지의 사용을 통해 절제시켜 표현함으로써 시의 격조를 한층 높이고 있다.
◎ ‘진달래꽃’의 율격
이 시는 자유시이지만, 7․5조를 기초로 한 3음보격의 외형률을 보이고 있다. 그 각 행의 형태를 분석해 보면, 제2연의 ‘영변의 약산/진달래꽃’만이 거의 4․4조에 가까운 음수이고 그 밖의 모든 부분은 7․5조의 일본 시가의 율조인데, 그것이 우리 시에 쉽게 수용된 것은 7․5조가 4․3․2․3조 또는 3․4․3․2.조 등의 음절수로 분해되어 우리 전통 시가의 율격과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진달래꽃’의 이미지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이라는 극한적 상황을 ‘진달래꽃’을 통하여 초극하려는 의지가 담겨진 작품이다. 내용상으로 보아 붉고 아름다운 ‘진달래꽃’은 시적 자아의 사랑의 완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시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원망과 슬픔을 상징하는 동시에 떠나는 임에게 끝까지 자신을 헌신하려는 순종과 정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옛 시에서도 ‘진달래꽃’은 민족 정서의 대유적 상징물로써 존재하는데, 특히 사랑과 이별이 정한을 노래하는 작품에서 시인의 분신으로서 표현되기도 한다.
◎ 암시성과 표현 기법
이 시의 표면적인 의미는 ‘떠나보냄’이다. 그러나 속뜻은 ‘되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강한 의지’이다. 즉, “죽어도 아니 눈물을 흘리우리다”는 “속으로 몹시 울겠다.”는 뜻이고,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도 표면상 ‘체념’한 듯이 보이지만, 속으로는 간절한 기다림이다. 그러므로, 이별에 대한 사랑의 반어인 것이다.
◎ 김소월 시의 ‘이별’과 만해 시의 ‘이별’
김소월의 시와 만해의 시는 공통적으로 ‘임’과의 ‘이별’ 을 가장 중요한 시의 모티프로 삼고 있다. 그러한 두 시인에게 ‘이별’이 지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김소월에게서 ‘임’과의 ‘이별’이 지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김소월에게서 ‘임’과의 ‘이별’은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것으로, 그 이별의 상태가 극복될 가능성은 거의 주어 지지 않는다. ‘초혼(招魂)’ 같은 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김소월에게 있어서 ‘임’은 항상 과거의 존재, ‘나’ 와 근원적으로 합일될 수 없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만해 에게 있어서 ‘이별’은 다른 의미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이별’ 은 외부에 있어서 강요된 것이라기 보다는 새롭고 높은 차원의 ‘임’과 만나기 의해서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그런 의미에서 만해의 ‘이별’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방법적 계기로서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별’ 속에는 ‘임’과의 만남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소월의 시에서는 억누를 길 없는 비애와 절망을 안으로 삭이는 한의 정서가 강조되는 반면, 만해의 시에서는 이별로 인한 비애와 슬픔이 새로운 만남의 대한 기대와 예견의 의해 극복되어 가는 모습이 강조된다.
◎ 김소월(金素月/1902. 8. 6~1934. 12. 24)
시인. 본명 정식(廷湜). 평북 구성(龜城) 출생.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도쿄상대[東京商大]에 입학하였으나 간토대진재[關東大震災]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였던 안서(岸曙) 김억(金億)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浪人)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오과(午過)의 읍(泣)》 《그리워》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먼 후일(後日)》 《죽으면》 《허트러진 모래 동으로》 등을 《학생계(學生界)》 제1호(20.7)에 발표하여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배재고보에 편입한 22년에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닭은 꼬꾸요》 《바람의 봄》 《봄밤》 등을 《개벽(開闢)》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못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등을 발표하였고, 이듬해인 24년에는 《영대(靈臺)》지 3호에 인간과 자연을 같은 차원으로 보는 동양적인 사상이 깃들인 영원한 명시 《산유화(山有花)》를 비롯하여 《밭고랑》 《생(生)과 사(死)》 등을 차례로 발표하였다. 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되었다. 그 후 구성군(郡) 남시(南市)에서 동아일보사 지국을 경영하였으나 운영에 실패하였으며, 그 후 실의의 나날을 술로 달래는 생활을 하였다. 33세 되던 34년 12월 23일 부인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셨는데, 이튿날 음독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詩論) 《시혼(詩魂)》을 남겼다.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자신의 저서에서 ꡒ그 왕성한 창작적 의욕과 그 작품의 전통적 가치를 고려해 볼 때, 20년대에 있어서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ꡓ라고 지적하였다. 7․5조의 정형률을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계속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에서
○ 김소월의 시 세계
“소월의 시는 거의 전부가 ‘임’을 찾고 ‘임’을 구하고 ‘임’을 노래한 것들이다.”라고 김도리가 지적한 대로, 소월의 시의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깊은 상실감이다. 그가 찾는 ‘임’은 사랑하는 여인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인간과 자연을 일체로 화합하게 함으로써 인간이 그 세계 안에서 낯설지 않게 해 주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소월의 시에 이러한 상실감이 임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러한 화합이 안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소월 시는 틈, 극복될 수 없는 거리감에서 비롯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러한 그리움을 민요조 서정시에 실어 표현하는 데 그의 특색이 있다.
○ 소월 시의 정조
소월 시의 바탕에 흐르는 정서는 한(恨)이다. 이 한은 제재면에서 보면 남녀의 애정 생활의 파탄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아 버림받은 여인의 신세 타령, 하소연 같은 것이 도처에 보인다.
이와 같은 소월 시의 정조는, 제재나 장르면에서는 재래의 ‘시집살이요(謠)’ 등의 내방요(內房謠), 멀리는 ‘서경별곡’, ‘가시리’, ‘정과정’ 또는 송강의 ‘사미인곡’, 황진이의 시조 등을 잇고 있는데, 이는 확대하면 민중들의 소외 의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소월 시의 정한은 변두리 인생, 삶의 터전에서 낙오한 자들의 자기 연민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그것은 체념의 상태까지 이어지지만 그러나 그것은 심리적으로 불쾌한 경험이 아니라, 비록 도착적인 자기 학대의 성향은 띤다 하더라도, 일종의 쾌감을 수반하며, 억압된 원한을 정화시킨다는 데 그 묘미가 있다.
김완진. <한(韓)민족은 한(恨)민족인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