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 정호승
나는 한 젊은이한테 태어났습니다.
젊은이가 처음으로 만들어 본 항아리라서 좀 못생긴 항아리로 태어났습니다.
"에이, 뭐 이래? 이거 정말 못생긴 항아리잖아."
젊은이는 울퉁불퉁하게 생긴 내가 보기 싫었는지 나를 멀리 마당가에 버렸습니다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나는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곧 잊혀졌습니다. 내 가슴은 무척 아팠습니다.
그래도 어딘가에 소중히 쓰일 데가 있을 거야.
이 세상에 항아리로 태어난 무슨 까닭이 있을 거야.'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버려진 하나의 항아리일 뿐이었습니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빗물이 고이고, 고인 빗물에 흰 구름이 잠깐 머물다가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가을날이었습니다.
젊은이가 낙엽을 헤치고 땅을 깊게 파고는 모가지만 남겨둔 채 나를 땅에 묻고 돌아갔습니다.
내 가슴은 뛰었습니다. 이제야 내가 소중한 무엇으로 쓰여지나 싶어 온몸이 떨려왔습니다.
그 날 밤이었습니다.
감나무 가지 위에 휘영청 걸려 있는 달그림자를 밟으며 나를 향해 조용히 다가오는 젊은이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발소리는 바로 내 머리맡에 와서 딱 멈추었습니다
나는 그대로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아,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요?
젊은이가 바지춤을 끄르고 나를 향해 갑자기 오줌을 누기 시작했습니다.
아, 나는 그만 오줌독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슬펐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참고 기다려 온 것이 고작 오줌독이 되기 위한 것이었나 싶어 눈물이 자꾸 났습니다.
젊은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와 오줌을 누고 갔습니다.
젊은이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까지 찾아와 신나게 오줌을 누고 갔습니다.
'내가 오줌독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까?'
'아니야, 그렇지 않아. 결코 그렇지 않아.
소중한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서일 거야.'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꾸 소리쳤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오줌독이 되어 가슴 가득히 오줌을 담고 살게 되었습니다.
곧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강물이 얼어붙자 오줌도 얼어붙었습니다.
나는 얼어붙은 내 몸이 그대로 터져 버릴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터지면 안 돼.
터지만 내가 죽어 버린단 말이야.'
나는 안간힘을 썼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이 겨울은 지나가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얼었던 강물도 녹아 흐르고, 얼어붙었던 오줌도 녹아내렸습니다.
사람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렸습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에는 내 몸에 가득 고인 오줌을 퍼다가 밭에 뿌렸습니다.
배추 밭에는 배추들이 싱싱하게 자랐습니다.
무 밭에는 무들이 싱싱하게 자랐습니다.
나는 그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자 비록 오줌독이 되었지만 항아리로 태어난 보람은 있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오줌독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를 만든 젊은이가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항아리를 만들던 가마터도 허물려 수북이 풀들만 자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대로 땅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이제 오줌독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이번에야말로 다른 소중한 무엇이 되길 간절히 꿈꾸는 항아리였습니다.
어느 해 봄이었습니다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들리더니 항아리를 굽던 곳에 사람들이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집은 아주 큰 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몇 해에 걸쳐 일주문을 짓고 대웅전을 짓고 종각을 지었습니다.
사람들은 절을 다 짓자 종각에 에밀레종보다 조금 작은 종을 달았습니다.
종소리는 날마다 새벽 하늘 높이 울려 퍼졌습니다.
새벽이 되도록 잠들지 못하는 내게, 종소리는 새소리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소리가 맑지 않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종소리가 아니라 그냥 쇳소리야, 쇳소리!"
"저런 걸 종이라고 종각에 매달다니!"
절의 주지 스님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고민스러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내 머리맡에 흰 고무신을 신은 주지 스님의 발이 와서 가만히 머물렀습니다.
주지 스님은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시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셨습니다.
"흐음, 이건 아버님이 만드신 항아리야.
이 항아리가 아직 남아 있다니 정말 놀랐군.
맞아, 이 항아리를 종 밑에 묻으면 좋겠군."
주지 스님은 무슨 큰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얼굴에 환히 웃음을 띠었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곧 종각의 종 밑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 되기 위해 종 밑에 묻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종 밑에 묻고 종을 치자 너무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종소리가 텅 빈 내 몸 안에 가득 들어왔다가,
조금씩 숨을 토하듯 휘돌아 나가면서 참으로 맑고 고운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 소리가 처음에는 천둥 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가,
나중에는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이어지는가 싶으면 끊어지고, 끊어지는가 싶으면 다시 이어졌습니다.
나는 내가 종소리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때서야 문득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항아리가 되었다는 것을.
내 비록 못생긴 항아리로 태어나 오랫동안 오줌독으로 버려져 있었지만,
참고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는 항아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내가 만일 참고 견딜 수 없었다면 종소리를 내는 항아리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요즘 스님이 종을 치실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맑은 종소리를 내는 일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