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壁)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 구문 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의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 구문 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청담(晴曇), 일조각, 1964>
* 감상의 길잡이
전통적인 한국 고유의 서정과 자연을 간결한 시의 형태로 표현하였던 박목월은 이후 생활 주변의 것들을 편안한 상태로 노래하는 쪽을 바뀐다.
이 시에서 냉랭한 현실 속에서 많은 식구들을 감당해야 하는 시인은 삶이 힘겹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녀들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며, 아버지,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을 굳게 지켜 나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중년 이후 박목월 시의 특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