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 표현 기법과 회화 정신
대나무 잎의 묘사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경아식(驚鴉式), 개자식(字式), 분자식(分字式) 이다. 〈풍죽도〉에서는 바람을 맞이하는 쪽의 대나무 잎은 사필경아식(四筆驚鴉式, 네 잎을 까마귀가 놀라 날개를 펴고 달아나는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을 구사하였고, 그 반대쪽 대나무 잎은 첩분자식(疊分字式, 한자의 分字를 여러 개 겹친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과 삼필개자식(三筆个字式, 个字를 풀어 쓴 방식)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대나무 잎을 그릴 때 한자의 필획을 차용하는 것은 동양화 특유의 서화일체(書畵一體)사상과 관계가 깊다. 서예가로 유명한 조맹부(趙孟)는 서화일체를 강조하면서바위는 비백법으로, 나무는 전서체로,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반드시 팔분법(八分法), 즉 예서의 일체를 통달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잘 이해한다면 서화는 원래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김정희는 묵란(墨蘭), 묵죽(黙竹)에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킬 것을 강조하여, 예서의 획과 묵란의 획을 동일시하였고, 또한 대나무 그림에도 문인 정신의 표현인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서예의 필력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선비들이 대나무를 즐겨 소재로 삼아 그리는 데에는 대나무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다른 소재도 많은데 굳이 대나무를 비롯한 사군자를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대나무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사계절을 통하여 푸르름을 잃지 않으며 곧게 자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속성을 지닌 대나무를 동양의 옛 사람들은 군자에 비유하였다. 대나무를 군자에 비유한 최초의 사례는 《시경 詩經》의 위풍(衛風)편의 기오(淇奧)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것은 제1절의 내용이다.
저쪽 기수 후미를 보아라 (瞻彼淇奧)
푸른 대나무는 청초하고 무성하니 (綠竹)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有匪君子)
뼈와 상아를 다듬은 듯 (如切如磋)
구슬과 돌 갈고 간 듯 (如琢如磨)
정중하고 너그러운 모습이여 (瑟兮兮)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赫兮兮)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有匪君子)
결코 잊지 못하겠네 (終不可)
는 기수(淇水) 가의 대나무를 위(衛)나라 무왕의 인품에 비유하여 읊은 시로, 모두 3절로 되어 있다. 3절을 통하여 비군자(匪君子)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모두 대나무를 의인화해서 비유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경》 이후 대나무와 군자 사이가 가까웠던 때는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이다. 죽림칠현들이 대나무 숲을 은거처로 삼아 군자를 자처하며 풍류를 즐긴 것이라든지,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 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하였다는 일화가 이를 입증해 준다. 대나무에 대한 이와 같은 정서는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고 읊은 윤선도의 〈오우가 五友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선비화가들은 대나무 등 사군자를 그림에 있어서 작화 태도의 확립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 때문에 사군자를 그리는 사람은 예술의 기법에 앞서서 문학의 교양을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여겼다. 서권기가 바로 그것이다. 서권의 기운이 없고서는 대나무건 난초건 그 격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였다. 선비들은 그래서 단순한 기예(技藝)는 서권의 기를 구비하지 못한 교묘(巧妙)한 손재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문인화의 기본 정신은 인품과 화품(畵品)을 동일시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대나무 그림이 마치 아무나 손쉽게 기법을 습득해서 그릴 수 있는 화목인 것처럼 착각되고 있는 느낌이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풍죽도〉는 오늘날 잘못된 사군자 그림의 추세에 많은 점을 깨우쳐 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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