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 받아 갈고

 

도정 권상호

  구름은 높이 올라가고 개울물은 맑게 내려가는 보니 가을이 오나 보다. 백로(白鷺)만큼이나 깔끔한 백로(白露) . 특히 백로 무렵은 이슬방울처럼 포동포동하게 살찐 포도가 맛을 자랑하여 침샘이 솟구치는 계절이다.

  백로(白露) 되자 걷어붙였던 소매를 내려도 소매 밑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 지독하게 비가 많았던 여름, 끔찍이도 태풍 피해가 컸던 여름이 꼬리를 감추고 있다.

  밤낮의 일교차가 심해지면 하늘과 대지가 갈등하기 시작한다. 밤새 뜻밖의 서늘함에 목을 옴츠리는 대지를 하늘이 슬쩍 안는다. 천지의 비밀스런 사랑으로 옥액(玉液) 맺히는 때가 바로 백로 철이다.

  풀잎에 맺힌 그렇게 많은 이슬이 아침 햇살에 영롱하게 비치는 정경은 세상의 보석을 부끄럽게 만든다. 순간 발칙한 생각이 드는데,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대지의 꽃들을 사랑하고 갔구나! 하늘의 별군과 땅의 꽃양도 연애질을 하는구나. 가을 안개는 바로 그들의 홑이불이로구나. 오곡백과가 익어 가는데, 저희들도 있으랴. 저렇게 영롱한 이슬들을 사랑의 흔적으로 남겨놓다니…….

  이슬 중에서도 비온 뒤에 맺히는 비이슬은 별로다. 밤사이에 내리는 밤이슬이 그래도 낫다. 천하가 태평할 때에 하늘에서 내린다고 하는 달콤한 이슬이 감로(甘露)인데 최상품이다. 아마 감로는 모든 식물의 열매를 충실하게 맺게 주는 백로 즈음의 아침이슬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감로는 모든 생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래서 술은 감로주(甘露酒), 차는 감로차(甘露茶), 물은 감로수(甘露水) 최고로 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을 비유하여 감로법우(甘露法雨)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갖 번뇌와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깨달음의 열매를 맺게 주기에 감로(甘露) 비유하여 말한 것이리라.

  내게는 승로연(承露硯)이라 명명한 벼루가 하나 있다. 승로반(承露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명명한 벼루이다. 승로반은 하늘에서 내리는 장생불사의 감로수를 받아먹기 위하여 만들었다는 쟁반이다. 그렇다면 승로연이란 백로 절후의 꼭두새벽 감로를 따서 먹을 벼루가 되는 것이다. 알갱이 자체가 다이아몬드와 똑같은 탄소 성분이라 영원불변하지만, 감로로 승로연에 갈아서 쓰는 글씨는 영원에다가 생기까지 불어넣는 작업이다.  

  지난해 여름 널따랗게 붓글씨를 있는 제법 넓은 별장이 생겼다. 도봉산 무수골의 무수산방(無愁山房) 그것이다. 물론 나의 명의로 되어 있는 집은 아니지만. 앞에는 마당이 있고, 마당가를 작은 시내가 두르고 있다. 지우들과 더불어 속마음 없이 세상 얘기를 터놓을 수도 있다. 앙증맞은 텃밭도 있고, 밭두렁에는 넘어 보이는 해묵은 은행나무도 지킴이처럼 우뚝 있다. 서울 안의 외딴 시골집이라 무섭기까지 하다. 비가 내릴 때나 낙엽이 때면 우수수 하는 소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