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선생의 숨결이 묻어 있는 자운서원... 이곳에서
2008년도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춘계 MT가 있었다.

-------   참고 자료 ----------

朝鮮: 해 뜨는 이른 아침의 신선한 나라.

朝: 갑골문-> 아래위로 나누어 배치한 풀 艸+日 +月. 무성한 풀숲이 펼쳐진 대지, 떠오르는 아침 해, 아직 서녘 하늘가에 걸려 있는 달. 日+月=朝자의 원형. 明=창문의 상형인 囧과 月을 더한 글자로 ‘창문으로 비쳐드는 밝은 달빛’에서 추출한 ‘밝음’을 본뜻으로.

月자가 금문에서는 水자와 비슷한 형태로도 쓰였고 이 글자가 만들어진 지 대략 1천 년 뒤의 자체인 소전에서 배 舟처럼 쓰이기도 했다가 예서에서는 다시 月로 돌아와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舟

鮮: 맥국(貉國)에서 나는 물고기 이름. ->(발음에 의한 가차) 신선하다, 드물다. ‘신선하다’를 본뜻으로 하는 글자는 魚자 셋. ‘드물다’를 본뜻으로 하는 글자는 ‘尟’(적을 선; ⼩-총13획; xiǎn)尠(적을 선; ⼩-총13획; xiǎn) 屳(날 선; ⼭-총5획; xiān)

[魂遊石]: 상석(床石) 뒤쪽 무덤 앞에 놓은 직사각형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하는 것이라 한다. 《사례편람(四禮便覽)》〈상례(喪禮)〉성분조(成墳條)에 '세속(世俗)에서 혼유석은 상석 북쪽에, 향안석(香案石)은 상석 남쪽에 둔다(俗置魂遊石於石牀之北,香案石於石牀之南)'는 기록이 있다.

[鼓石]: 무덤 앞의 상석을 괴는 북 모양으로 생긴 둥근 돌.

[陵]: 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능묘(陵墓)·능상(陵上)·능침(陵寢).

[祔左]: 부부를 합장할 때에, 아내를 남편의 왼쪽에 묻음. 祔(합사할 부; fù)合葬하다.

[長明燈]: 석등은 사찰뿐만 아니라 능묘 앞에 세워 사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기능을 갖고 있다. 고려 말에 처음 보이는데, 공민왕 玄陵의 장명등 이후 왕릉에는 반드시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일품 이상의 재상의 묘역에만 세울 수 있었으므로, 매장된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표시물이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불을 밝힐 수 있는 장명등의 火窓 부분에 실제로 기름 등잔을 놓아 묘역을 밝히는 기능을 했으나, 점차 형식적인 장식물이 되었다. 받침대와 몸체, 지붕의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초기에는 길고 날씬한 기둥 모양이었으나 차차 작고 뭉툭해졌다. 고려 말에 건조된 여주 신륵사 普濟尊者石鐘 앞 석등에서 잘 알 수 있다.

예감: 정자각 서쪽에 제향 후 축문을 태우던 곳으로 석함(石函)이라고 하며, 소대(소전대), 망료위(望燎位)라고도 한다.

망료위[望燎位]: 임금이 능에서 제사를 지내고 祝文을 태우던 곳. =소전대, 예감을 같게도 또는 달리 보는 분도 있다.

소전대[燒錢臺]: 능제를 마친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3대 태종왕릉(헌릉)까지만 있고 이후 예감으로 대체된다.

망주석 [望柱石]: 望頭石 ·望柱石表라고도 한다. 기둥의 윗부분이 寶珠形頭로 되어 돌받침 위에 올린다. 망주석은 중국에서 전하여 통일신라에서 발전되기 시작하여, 8세기경에는 왕릉의 석물 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墓制石物로 자리를 굳혀 오늘날에 이른다. 무덤의 시설형식에 따라 墓主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데, 무덤을 지키는 수호 신앙과 기념적인 기능을 가진 석조물이다. 중국의 《陳書》 에 적힌 “梁의 天監 6년(507)에 묘제를 바로잡되, 石人 ·石獸 ·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石柱만 세워 그 위에 이름 ·지위를 적을 것을 허가하였다”라는 대목에서도 망주석의 용도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현존하는 왕릉과 상류층의 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민간인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간혹 다람쥐 등을 조각하여 민속 생활의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홀[笏]: 1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에 손에 쥐던 물건. 조복(朝服), 제복(祭服), 공복(公服) 따위에 사용하였으며, 일품부터 사품까지는 상아홀, 오품 이하는 목홀(木笏)을 썼다. ≒수판(手板). 2 =홀기(笏記).

자운서원[紫雲書院]: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되어 1650년(효종 원년) 자운(紫雲)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1713년(숙종 39)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를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하다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69년 지방 유림의 기금과 국비보조로 복원하여 1975년과 1976년에 보수하였다. 높은 대지 위에 사당을 앉히고 사괴석 담장을 둘러 삼문 앞 계단으로 오르도록 설계하였다. 사당은 6칸으로 익공계(翼工系) 형식 팔작지붕이며 이이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그 외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夾門)은 양측면을 박공으로 마감한 솟을대문 모양이며,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좌우 능선에 이이와 부모의 묘소가 있다. 매년 8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