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書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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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要

速く書くことができるように、同じく漢字の筆書体である行書とは異なり、字画の省略が大きく行われる。文字ごとに決まった独特の省略をするため、文字ごとの形を覚えなければ書くことも読むこともできないことが多い。実際は隷書の時代からあったが、一般に使われたのはそれから数百年の月日が過ぎてからである。また、書家による違いが大きい場合もあり、例えば「書」という字は楷書体では1通りの書き方であるのに対し、草書体は幾通りかの書き方がある。

草書の「草」は草稿などの「草」である。また「草」には「下書き」という意味もある(例:起草)。「ぞんざい」という意味もある。

초서는 비교적 빠른 서체인 행서와는 달리, 더 빨리 쓸 수 있도록, 자획을 더 많이 생략한 서체이다. 문자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략으로 인해, 각 문자마다의 자형을 기억하지 않으면 쓸 수도, 읽을 수도 없는 것이 많다. 사실 예서시대부터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그로부터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뒤부터였다. 또 서예가에 따라 필체의 개인적인 차이가 큰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자면 '書'라는 글자는 해서체로 쓰는 방법은 한 가지뿐인데 반해, 초서체로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草書(초서)의 「草」는 시문의 초벌 원고를 뜻하는 草稿(초고)라고 할 때의 ‘草’이다. 또 이 ‘草’ 자에는 ‘초를 잡음’ ‘초 잡은 글’이라는 의미도 있다(예 : 起草(글의 초안을 잡음). ‘대충 날려 쓰다’라는 의미도 있다.


歷史

前漢から清

前漢前期に隷書を崩した「章草」(しょうそう)があり、漢の時代の篆書・隷書から発生したと概ね考えられている。章草は、現在のように文字を続けて崩していく形式ではなく、1字1字を崩していく形式だった。この章草が漢以降にいかなる工程を経て草書に発達したかは、古文書の他に主だった金石彫刻がないことから碑文研究において不明とされる。

文献では、『説文解字』に「漢興って草書有り」がみえる。一説には前漢の史游や後漢の張伯英が発明したとも言われる(中国の書論#書体の創始者を参照)。3世紀に一般化した。

草書体をさらに崩した書体を狂草と呼び、張旭、懐素などの能書家が有名である。

清代後期には、草書が失われ、一部の学者や書道家で使用されるのみであった。


西漢(서한)에서 淸(청)까지


서한 전기에 예서를 무너뜨린 ‘章草’(예서에서 초서로 변해가는 과도적 서체)가 있어서, 대체로 한나라 때의 전서 · 예서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장초는 현재와 같이 문자를 연속적으로 이어가며 무너뜨리거나 생략해 가는 방식이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로 무너뜨려가며 쓰는 방식이었다. 이 장초가 한나라 이후에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초서로 발달했는지에 관해서는 고문서 외에 주요한 금석문이 없어서 초서체 형성에 관한 연구가 쉽지 않다. 

문헌상으로는 에 ‘漢나라가 발흥하자 초서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일설에는 前漢의 史游나 後漢의 張伯英이 발명했다고 전한다. (중국의 書論 ‘서체의 창시자’ 참조). 초서는 3세기에 일반화했다. 초서체를 더욱 무너뜨린 서체를 狂草라 부르며, 張旭·懐素 등의 能書家가 유명하다.

청나라 말기에는 초서가 거의 없어지고 일부 학자나 서예가가 이용할 뿐이었다.


用途

王羲之の書を見ると、草書作品の「十七帖」は知人への書簡集であり、行書作品の「快雪時晴帖」や「喪乱帖」は冒頭に「羲之頓首」の定型句を持つ改まった文書である。この例から判断できるように、草書は『砕けた通常の筆記体』であり、行書は『より厳粛な場に供する書体』と言える。

왕희지의 글씨를 보면, 초서 작품으로 ‘十七帖’은 지인에 대한 서간집이며, 행서 작품 ‘快雪 時晴帖’이나  ‘喪乱帖’은 첫머리에 ‘羲之頓首’와 같은 정형구절을 볼 때 격식을 차린 문서이다. 이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초서는 ‘부서진 보통의 필기체’이며, 행서는 ‘보다 엄숙한 장소에 제공하는 서체’라 할 수 있다.


したがって、草書作品は石碑にはふさわしくなく、紙を媒体として広く常用された。芸術作品としての価値は、唐朝初期を底辺として、王羲之・献之親子やその子孫といわれる智永にかけての六朝~隋朝期、狂草で新たな世界を開いた張旭、懐素以降の唐朝後期から条幅が生まれた明朝にかけて高く評価されている。

따라서 초서 작품은 비석에는 어울리지 않고, 종이를 매개로 널리 상용되었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당나라 초기를 저변으로 하여 王羲之 · 献之 부자로부터 그 후손이라고 할 수 있는 智永에 걸친 六朝~隋나라 때까지, 그리고 狂草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었던 張旭, 懐素 이후 당나라 후기부터 条幅이 탄생한 명나라에 걸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草書は日本でも古くから普及し、平安時代に流麗な草書の達人として名をなした藤原佐理は、三跡の一に数えられた。明治以後の日本においては、楷書を『正式な書体』に位置づけ、行書を『日常的に用いる筆記体』と見なして教育を進めた。戦後暫くは汎用される『一般的な書体』であったが、20世紀末から意識変化がみられる。

초서는 일본에서도 예부터 보급되어 平安時代(헤이안 시대)에 유려한 초서의 달인으로 이름을 떨친 藤原佐理(후지와라 사리)는 三跡의 하나로 꼽혔다. 메이지(明治) 이후의 일본에서는 해서를 '정식 서체'로 규정하고, 행서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필기체'로 간주하고 교육을 진행했다. 전후 얼마동안 범용되던 ‘일반적인 서체’가 있었지만 20세기 말부터 의식의 변화가 보인다.


また、中華人民共和国において識字率向上の手段として、従来の繁体字を省略した「簡体字」を考案したが、その字や部首の多くは草書を範としている。

草書あるいは行書の日本化したものを「和様」と呼ぶことがある。御家流はこの流れである。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문맹 퇴치의 수단으로 기존 번체자를 생략 한 ‘간체’를 고안했지만, 그 글자와 대부분의 부수는 초서의 규범을 따르고 있다.

초서나 행서가 일본화 한 것을 ‘和様’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풍 서체 곧, 御家流(江戶 시대의 공문서에 쓰인 서체)의 흐름이다.


[1]ルファベットのいわゆる「筆記体」を草書体と呼ぶことがある。알파벳의 이른바 '필기체'를 초서체라 부를 수 있다.